소설리스트

가유서부-644화 (644/858)

제644화

태자는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장수? 그래. 오십 대에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할바마마를 제외하고는 역대 황제들은 전부 장수했지! 구십의 고령에 이른 황제도 있었고 나머지 황제들도 칠팔십까지 살았어.’

정선제도 팔순까지 살게 된다면 자신은 앞으로 스무 해나 더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자 태자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는 이미 서른이었다. 앞으로 20년을 더 기다리게 된다면 그땐 벌써 쉰 아닌가. 거의 중노인이 되어서야 황제가 되는 것이다.

이건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한창나이에 재능이 넘치는 젊은 황제가 되고 싶었다. 청춘의 무한한 정력을 가진 채 천자의 기쁨을 누리고 싶었다.

“전하! 전하!”

주묘서는 계속해서 그를 졸랐다.

태자의 초조한 마음이 극에 달했는데도 주묘서는 여전히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러자 태자는 그녀를 노려보고는 가볍게 경고했다.

“소란 피우지 말고 음식이나 먹게.”

“전하…….”

주묘서는 마음 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티나지 않게 올라가 있었다.

지금 태자의 기분은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황후의 자리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처럼 태자 또한 줄곧 황위를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지금 느끼는 기분이 바로 그가 느끼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그를 자극해야 하는지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주위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가 귀를 즐겁게 했고 무희들도 쉬지 않고 춤을 추고 있었다. 대전 안은 즐거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그를 괴롭게 할 터였다.

태자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정 황후가 정선제를 위해 반찬을 집어 주는 모습이 보였다. 정선제는 새우가 들어간 교자 하나를 집어 한 입 베어 물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맛있군. 황후도 들게나.”

전에는 이런 간식거리들이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고 진작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몇 달 동안 죽만 먹은 데다가 병이 회복되고 나니 새 생명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뭘 봐도 예쁘게 보였고 뭘 먹어도 맛있게 느껴졌다.

태자는 어제 정선제와 함께 식사를 할 때만 해도 그가 잘 먹고 건강한 모습을 보며 기뻐했었다. 그런데 지금 입맛이 좋은 정선제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가 잘 먹는 게 못마땅하고 아주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입맛도 저렇게 좋고 먹기도 저리 잘 먹다니. 잘 먹고 잘 자니 정말 수십 년은 더 살게 되는 거 아닐까?’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엽연채는 차갑고 어두운 태자의 낯빛을 쳐다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주묘서는 정말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못된 짓을 벌이는 능력 하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다.

해시亥時(밤 9시~11시)의 절반이 흐르자 연회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갔다.

정선제는 폭죽을 터뜨리게 했고 커다란 불꽃이 공중에서 큰 소리를 내며 터지자 도성 전체에 화려한 불꽃이 순식간에 찬란한 빛을 뿜어냈고 노을빛처럼 아름다운 불꽃이 빙글빙글 돌며 하늘 위로 올라갔다.

궁 밖의 백성들은 문밖으로 나와 그 화려한 광경을 쳐다봤고 불꽃을 가리키며 찬사를 보내기도 하고 웃음꽃을 피우기도 했다. 정말 떠들썩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지막 불꽃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지고 나니 모든 것이 다시 고요함과 적막으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정선제는 호탕하게 하하 웃더니 아쉬워하며 연회를 마무리했고 사람들은 잇달아 대전을 떠났다.

“새언니, 우리 같이 가요.”

주묘서는 이번에도 미소를 머금고 엽연채에게 먼저 다가갔다. 그러자 엽연채도 잔잔한 미소로 화답했다.

“좋아요!”

태자는 멀리서 사이가 좋은 주묘서와 엽연채의 모습을 쳐다보더니 또 저도 모르게 주운환을 힐끗 쳐다봤다.

주묘서와 주운환 남매의 관계는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다. 경위영은 자신의 수중에 있는 것과 다름없고 주운환이 구한 응성과 서남도 주운환의 세력이니 이 또한 전부 자신의 것이었다.

‘이런 권세라면…….’

태자는 이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불타올랐다.

‘하지만 거병이나 모반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면!’

태자는 낯빛이 확 변해서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아주 많았다. 한 걸음씩 신중하고 침착하게 나아가야 한 치의 실수도 없을 것이다. 천천히 기다리면 된다. 모험을 하거나 위험한 지경에 빠질 수 있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정선제가 정말로 이삼십 년을 더 살게 된다면…….’

태자는 계속 갈등했지만 그의 속내에서 아직까지는 ‘안정’이라는 단어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숙부님.”

그때, 누군가의 아리따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니 연보라색 의복을 입은 아리땁고 부드러운 생김새의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바로 갈란군주였다.

“란아.”

태자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주묘서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녀는 갈란군주를 싫어했다. 갈란군주는 자신의 오라비와 정혼했다가 중간에 가세가 기울자마자 도망가 버린 나쁜 여인이었으니까.

갈란군주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엽연채를 쳐다보며 사과했다.

“진서후 부인. 좀 전에는 정말 미안했어요. 내가 부인을 오해하는 바람에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네요.”

그러자 엽연채는 호호 웃고는 괜찮다고 답례했다.

“오해가 풀렸으면 됐습니다.”

“늦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러나 주운환은 싸늘한 눈빛으로 갈란군주를 쓱 쳐다보고는 엽연채의 손을 끌어당겼다.

“갑시다.”

그렇게 그들은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갈란군주는 난초 문양이 들어간 반투명한 경라능선輕羅菱扇을 손에 쥔 채 입술을 살며시 가리며 몸을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러자 머리에 꽂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보요가 흔들리며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하지만 엽연채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부채에 감춰진 두 눈동자에는 조롱기가 섞인 싸늘한 눈빛이 스쳤다.

‘두고 봐라. 큰코다칠 날이 올 게다!’

* * *

태화전의 손님들은 다 흩어졌지만 아직 흥겨운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감옥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습기로 가득했다.

요양성 일가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감옥 두 칸에 갇혀 있었다.

여인 감옥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태어난 지 3개월도 안 된 요씨 가문 적출 증손자가 동사했기 때문이었다.

구석에 앉아 있는 요양성은 절망의 눈빛을 보이긴커녕 밖을 쳐다보며 비아냥거렸다.

“하하. 폭죽을 터뜨리네. 아주 흥겹기 이를 데 없구나! 지금…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겠지!”

‘갈란군주!’

생각을 하던 요양성은 싸늘한 눈빛을 번득였다.

‘비적의 외손자는 무슨!’

사실 그는 처음부터 주운환이 운하 공주를 닮았다는 걸 겨냥해 함정을 팠다.

비적 떼를 구출하는 게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빠져나오기 위해 화를 주운환에게 전가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요양성은 주운환도 반편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가만히 서서 자신을 모함하도록 그냥 놔둘 리가 있겠는가? 그러니 이번에는 빠져나오기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때마침 요 노부인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주운환을 보니 운하 공주를 닮았더군요.”

요양성은 그 말을 듣자마자 한 가지 묘책이 떠올랐다. 아예 주운환이 이 상황을 만회하고, 자신은 단죄되어 영원히 재기할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즉, 그는 지금 일시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뿐이었다. 이미 여러 계책을 교묘히 엮어 놓았고 그중 가장 중요한 계책은 뒤에 등장할 것이다. 바로 주운환이 운하 공주의 아들임을 밝히는 일 말이다.

하지만 요양성은 그건 당연히 진실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주운환의 출생에 손을 댔다. 주운환을 나락에 빠뜨려 영원히 재기할 수 없도록 하는 가능성을 만드는 것이었다.

일단 길이 나면 아주 확실한 증거는 필요하지 않았다. 정선제가 의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정선제는 분명 죽이면 죽였지 용서하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 주운환을 처리해 버릴 것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지고지상의 황제라 해도 주운환을 이유 없이 죽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영웅이고 진서후이니 말이다.

그러니 정선제는 분명 판결을 뒤집을 것이고 주운환이 정말로 비적의 손자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요씨 가문은 무죄로 석방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억울한 누명을 썼으니 공적을 쌓았다고 기록될 것이다.

그리되면 그는 다시 위로 올라갈 것이고 태자비도 다시 총애를 받을 것이다. 그야말로 일석삼조였다.

요양성은 요씨 가문 몇백 명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해 앞날을 도모하려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을 실행하려면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리저리 생각을 해 보던 요양성은 갈란군주를 떠올렸다.

갈란군주의 남편은 오일의인데 그는 비적과의 교전 때문에 불구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 추후 경위영은 분명 주운환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갈란군주는 질투심이 강한데 이를 어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자연히 주운환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울 것이다.

게다가 갈란군주는 자신의 작은며느리와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요양성은 며느리로부터 그녀가 엽연채를 싫어한다는 이야기도 넌지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여섯 살밖에 안 된 갈란군주의 아들이 작년에 사찰에 가서 놀다가 숲에서 뭘 잘못 먹었는지 이후로 자주 경련이 일어나 극심한 통증을 겪고 있단 사실이었다.

나 의정조차 손을 쓰지 못했고, 오로지 요 노부인이 제작한 향만이 아이의 통증을 완화할 수 있었다.

갈란군주는 자신의 아들을 살리고 앙갚음까지 할 수 있으니 당연히 목숨 걸고 도울 것이었다.

* * *

궁에서 연회를 베푼 후, 정선제는 며칠 동안 몸조리를 더 한 뒤에 정식으로 조정에 나왔다!

조회에 참석한 정선제는 정식으로 주운환을 경위영 지휘사로 임명해 그에게 도성의 안위를 지키는 5만 정예병을 다스리게 했다.

태자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얼마 전에 그가 주운환을 지휘사로 임명했는데 지금 정선제가 또 그를 임명하는 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모든 사람들에게 이 힘은 황제인 그의 것이며 주운환이 충성을 다하는 사람 또한 황제인 그라는 것을 알리려는 의도였다.

이 일로 태자의 마음속에는 답답함과 거북한 느낌 같은 것들이 가득해졌다.

얼마 후, 정 황후도 정선제가 주운환을 다시 임명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게 됐다.

그녀는 마음이 불편해진 태자가 그릇된 생각을 품고 결국 위험을 무릅쓰는 어리석은 짓을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에 하루 걸러 사 마마를 시켜 태자와 주묘서를 궁으로 불러 식사를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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