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3화
정선제는 더는 생각을 이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점점 더 괴로워졌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가 저를 죽도록 미워하고 증오하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폐하, 자책하실 필요 없사옵니다. 마마께서 처음에는 화가 나셨을 수도 있지만, 이젠 폐하를 용서하셨을 게 분명하옵니다.”
그의 마음을 알고 있는 채결이 얼른 그를 거듭 위로했다.
“폐하, 어째서 이런 생각은 하지 않으시옵니까? 지금 그 팔찌는 다른 사람도 아닌 진서후 부인에게 가 있습니다. 그리고 진서후는… 폐하께서도 공주 마마의 환생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지요. 분명 그러할 것이옵니다.
그러니 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이겠죠. 더욱이 진서후가 폐하를 곁에서 보필하고 있으니, 이게 마마께서 이미 폐하를 용서하셨단 뜻이 아니면 또 무엇이겠사옵니까.”
정선제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채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방금 전 나 의정이 괜한 걱정을 많이 하면 안 된다고 했으니 말이다.
채결은 얼른 미소를 지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폐하, 일단 약부터 드시지요. 그런 다음, 저녁 연회까지 좀 쉬고 계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동안 폐하의 문안을 여쭈는 첩자가 서재에 한가득 쌓여 있어 놓을 데가 없을 정도이고, 신하들도 모두 폐하를 뵙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사옵니다.”
이 말을 들은 정선제는 자신이 천하를 통치하는 황제임을 새삼스레 떠올리며 기분이 아주 상쾌해졌다.
* * *
한편. 정선제가 떠난 후, 엽연채와 갈란군주가 있는 청휘원의 분위기는 조금 경직되어 있었다.
노왕비는 분위기를 풀고자 얼른 이렇게 말했다.
“아유. 우리 여기 가만히 앉아서 뭐 하는 겁니까? 앞에 매화가 저리 아름답게 피었는데 말이죠.”
“맞습니다.”
영국후 부인이 얼른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이번 겨울에 저희 모두 궁에 들어오지 못해 이곳에 핀 매화를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안 보면 철이 지나갈 겁니다. 주 부인은 회임을 한 상태지만 그래도 적당히 움직이는 편이 더 좋을 거예요.”
엽연채도 갈란군주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순순히 응했다.
“네, 그럼 같이 가 보시죠.”
그러나 주묘서는 대화를 듣고 있으니 짜증이 확 치밀었다. 어째서 엽연채를 여주인인 것처럼 만든단 말인가. 다들 하나같이 엽연채를 추켜세우지 못해 안달이었다.
하지만 주묘서는 속이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거짓웃음을 지어야 했다.
‘어디 두고 보자! 내가 황후가 되면 그때 어디 한번 보자고!
“그래요. 함께 가서 봐요.”
갈란군주는 엽연채의 도도한 모습을 쳐다보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래, 그렇게 우쭐거리고 오만하게 굴어라! 잠시 후에 보게 될 한매寒梅처럼 네 세상도 곧 끝이 날 테니까!’
엽연채는 갈란군주를 상대할 기분이 아니라 돌아서서 신양 공주 등과 정자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꽃구경을 하고 있자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궁녀들과 환관들은 경축일이나 축제 때 추녀 끝에 걸어 두는 등롱燈籠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어 멀리서 쩌렁쩌렁한 징과 북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은 대전에서 연회가 시작됐음을 알게 되었다.
“새언니, 연회장으로 이만 갈까요.”
주묘서는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의 팔짱을 꼈지만 속으로는 순간 혐오감을 느꼈다. 하지만 원대한 계획을 위해 참을 수 있었다.
엽연채도 제게 들러붙는 주묘서를 보고 있으니 혐오감이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 역시 원대한 계획을 위해 참기로 했다.
엽연채와 주묘서가 아치형으로 된 청휘원의 문을 나오자 함께 서 있는 주운환과 태자의 모습이 보였다.
주묘서는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더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태자를 불렀다.
“전하!”
태자는 주묘서와 엽연채가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나오는 모습을 보자 만족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올케와 시누이가 함께 나왔군.”
“전하도 제 오라버니와 함께 계시는데 저라고 새언니와 함께 다니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요?”
엽연채는 주묘서가 주운환을 ‘오라버니’라고 부르자 온몸에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다. 주묘서의 친오라비가 주비양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오늘 주비양과 강심설, 심지어 주종과까지 전부 이곳에 오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엽연채는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순간 조롱하는 눈빛을 보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주묘서는 지금 안간힘을 다해 자신과 가까운 척을 해서 태자가 자신들 두 사람의 관계가 견고하다고 생각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태자가 모반을 일으키는 데 자신감을 더해 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친오라비인 주비양은 당연히 이곳에 오지 않는 편이 나았다. 안 그러면 그녀와 주운환의 관계가 한 다리 건너야 하는 관계처럼 보일 것 아닌가.
“전하, 저희와 함께 가시죠.”
주운환은 이리 말하며 엽연채의 손을 잡아당겼다.
사람들은 속속 대전으로 모여들었고 어린 환관들은 진작부터 손님들을 연회석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태자는 왼쪽 하좌의 첫 번째 자리에 앉았고 주운환은 오른쪽 하좌의 두 번째 자리에 앉았다. 오른쪽 하좌 첫 번째 자리에 앉은 사람은 유 재상이었다.
주위에선 관현악기가 내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소리가 은은히 울려 펴졌고 조정 신하들은 대부분 자리에 앉은 후였다.
“황제 폐하 납시오. 황후 마마 납시오!”
이때, 환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어 정선제가 정 황후의 부축을 받으며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조정 신하들과 귀족들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고 이어 다들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더니 두 팔을 땅에 대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큰절을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정선제는 너무 익숙해져 버린 의례적인 말을 들으며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지고 흥분을 느낀 적이 없었다. 과거 제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됐을 때 느꼈던 기분처럼 격정이 솟구쳤다.
탁자 앞에 선 정선제는 아래에서 고개를 숙인 채 신하로서 복종하는 그들의 모습을 쳐다보며 만족스러운 듯 큰 웃음을 지었다.
“하하, 일어나거라.”
“황송하옵나이다, 폐하.”
사람들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대다수는 앉으려 하지 않고 다들 눈시울을 붉히며 황제를 쳐다봤다. 특히 일부 노신들은 공수하더니 감격을 금치 못했다.
“소신들은 폐하께서 분명 회복하실 거라는 걸 알고 있었사옵니다.”
그에 신하들은 앞다투어 공손하게 비슷한 말들을 건넸다.
태자는 하하 웃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이때, 정 황후가 태자를 쳐다보자 그는 움찔하더니 가볍게 호흡을 하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면서 정선제가 자신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지를 떠올리려고 애를 썼고 간신히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다.
“다들 자리에 앉거라. 연회를 시작하겠다.”
정선제는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았고, 정 황후가 미소를 지으며 염려하는 말을 건넸다.
“폐하, 술을 드시면 안 됩니다. 오늘은 차로 대신해야만 하옵니다.”
“이거 참. 그럼 짐보고 어떡하라는 말이오? 짐은 술이 당긴단 말이오. 미주美酒가 눈앞에 떡하니 있는데 입에 댈 수도 없다니.”
정선제가 웃음을 띠며 난처해하자 유 재상이 말했다.
“폐하의 건강이 무엇보다 중하니 차로 술을 대신하옵소서. 소신 또한 폐하와 함께 차를 마시겠사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아래에 있는 귀족들도 다들 맞장구를 쳤다.
그리하여 연회장에는 술은 내오지 않고 차만 내오게 되었다.
태자의 술 또한 차로 바뀌어 그는 운무차雲霧茶를 손에 들었다. 향긋한 차향이 코를 찔렀는데 이는 정선제가 평소 가장 즐겨 마시는 차였다.
정 황후는 태자 쪽으로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건아, 너에게도 오늘 같은 날이 오는구나.”
“어마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네가 어릴 때 병이 나 태의가 흰죽만 먹어야 한다고 했는데 네가 싫다고 했단다. 그러자 폐하께서 널 달래기 위해 너와 함께 흰죽을 드셨지.”
정 황후의 이야기에 태자는 어리둥절했다가 크게 감동했다. 그런 일도 있었단 말인가?
“황송하옵니다. 아바마마.”
정선제는 하하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그도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주묘서는 자애로운 아버지와 효심 깊은 아들의 모습을 보고는 못마땅하여 콧방귀를 뀌더니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차가 정말 향긋합니다. 전하도 어서 드셔 보세요! 장수하셔야죠!”
태자는 장수라는 말을 듣자 또 기분이 이상야릇해졌다.
‘아바마마께서는 얼마나 더 사시려는 걸까?’
주묘서는 눈알을 굴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속살거렸다.
“폐하를 보세요. 혈색 좋고 얼굴에 윤기가 흐르는 걸 보니 저희는 아무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그런데 전하… 보세요. 함께 궁에 들어온 사람들은 전부 정실들인데 전… 고귀한 태자 측비이기는 하나 어쨌든 측비입니다. 요씨는 이미 끝났는데 전하께서는 언제…….”
이 말인즉슨 그녀를 태자비에 책봉해 달라는 의미였다.
태자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거북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그의 계획은 바로 제위에 오르고 주묘서 또한 한 번에 황후의 자리에 올라 바로 봉의궁에 들어가서 어머니의 마음으로 천하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주묘서를 황후에 책봉하면 그는 다시 혼례식을 치를 수 있고 떠들썩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일단 모두 다 미뤄졌으니 우선 그녀를 태자비에 책봉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그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고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것만 같았다.
“전하!”
주묘서는 입을 삐죽거렸고 계속해서 그를 졸랐다.
“앞으로도 궁에서 여는 연회가 많을 텐데 소첩이 계속 이런 식으로 참석하면 정말 보기 안 좋을 것이옵니다.”
그녀가 말을 하면 할수록 태자는 점점 더 짜증이 났다. 궁에서 여는 연회는 앞으로도 많을 테고, 아직 갈망하는 자리에 앉으려면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할 것이었다.
주묘서는 그의 표정을 보더니 두 눈을 살짝 깜빡이며 목소리를 죽였다.
“폐하를 보세요. 지금 얼마나 좋아지셨어요. 점점 더 젊어지시는 듯한 느낌이에요! 머리카락 몇 가닥도 검게 변했고요!
폐하께서는 이제 겨우 육십 대이시니 어쩌면 앞으로 이삼십 년은 더 살게 되실지도 몰라요. 에휴, 먼저 가신 선황 폐하를 제외하고는 역대 선조들께서는 전부 장수하시지 않았던가요? 그러니 폐하께서도 분명 장수하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