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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642화 (642/858)

제642화

엽연채가 백옥이 깔린 오솔길을 걸어가며 살펴보니 주위에는 정자와 누각들이 자리하고 있어 아주 화려한 모습이었고 귀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함께 경치를 감상하거나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고 있어 떠들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엽연채는 춘산을 따라갔고 금세 투구 모양의 팔각지붕이 달린 정자에 도착했다. 안에는 한눈에도 값비싼 의복을 입은 귀부인들이 앉아 있었고 주묘서가 그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귀부인들은 노왕비, 신양 공주, 갈란군주 등 신분 높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전에 가운데에 앉아 있던 사람은 태자비였는데 이제 태자비가 없으니 주묘서가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마치 사람들이 그녀를 추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주묘서는 엽연채를 보고는 일순 차가운 눈빛을 번득였지만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새언니, 왔군요! 계속 새언니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노왕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 측비와 진서후 부인은 사이가 정말 좋군.”

“그럼요.”

주묘서는 엽연채를 끌어당기며 그녀를 자신 옆에 앉혔다.

엽연채는 두 눈을 가볍게 깜빡이더니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아가씨가 이렇게 일찍 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주묘서는 자신을 조금도 난처하게 하지 않는 엽연채의 모습에 내심 놀랐다. 자신이 이처럼 갑자기 호의를 보이면 분명 엽연채가 잔뜩 비아냥거릴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자연스럽게 호의를 받아들이는 게 아닌가.

주묘서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빌어먹을 년, 실은 진작부터 내 환심을 사고 싶었는데 체면 때문에 그러지 못했던 거구나?’

따져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은 곧 황후가 될 몸 아닌가. 그런데도 자신이 먼저 엽연채에게 친한 척을 해야 하는 상황이 도리어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원대한 계획을 위해서라도 참아야만 했다. 최대한 빨리 황후가 되기 위해서는 잠깐 숙일 줄도 알아야 했다.

“새언니, 머리꽂이가 참 아름답네요.”

주묘서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아첨을 하자 엽연채는 머리꽂이를 만지작거렸다. 이건 방울이 달린 평범한 백옥 머리꽂이라 특별히 추켜세울 것도 없었다. 그에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마음에 들어요? 그럼 선물로 줄게요.”

주묘서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귀하지도 않은 걸 뭐 하러 주겠단 거야?’

“그냥 예뻐서 칭찬한 것뿐이에요. 새언니는 참 다정하시네요.”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호호호’ 웃었고 노왕비는 이렇게 말했다.

“올케와 시누이 사이가 정말 좋군.”

주묘서는 입꼬리를 위로 당겼다.

그런데 바로 그때, 갈란군주가 엽연채를 쓱 쳐다보더니 갑자기 깜짝 놀라는 게 아닌가.

“어머, 진서후 부인. 부인 손에 찬 그 팔찌는!”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했고 일제히 엽연채의 하얀 손목에 시선이 향했다. 옷소매에 살짝 가려진 순금 팔찌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지만 형태가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란아, 왜 그러니?”

노왕비가 묻자 엽연채도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는데, 갈란군주는 조그만 얼굴을 살짝 위로 든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엽연채는 지난번 태자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 강심설의 일로 갈란군주를 꾸짖었고 자신들 두 사람은 그렇게 척을 지게 되었다.

“부인, 부인의 팔찌를 내게 보여 줄 수 있는가?”

갈란군주가 냉락한 목소리로 묻자 사람들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이 태도를 보아하니 무언가 트집을 잡으려는 게 분명했다. 노왕비가 얼른 상황을 원만히 수습하려고 나섰다.

“란아, 무슨 일이 있거든 좋게 말해야지.”

“흥!”

갈란군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엽연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네가 찬 그 팔찌가 작년에 폐하께서 베푼 연회에서 내가 잃어버린 팔찌와 아주 비슷하단 말이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저런,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 줄 알고? 무려 진서후 부인인데!’

갈란군주는 정선제가 가장 아끼는 손녀이며 존귀한 신분이라 예전에는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경위영 대장의 부인이기도 했으니. 그런데 이제 경위영 대장 오일의는 불구가 되었고 직위도 해제되었다. 경위영은 이미 주운환에게 넘어간 후였다.

사람들은 모두 이 생각을 하다가 갈란군주의 의중을 알아챘다. 주운환이 갈란군주의 남편을 대신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불만을 가진 갈란군주가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트집이라는 게 너무 얼토당토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엽연채가 그녀의 팔찌를 훔쳤다고 모함하는 건 너무했다.

“란아, 네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잖니.”

노왕비는 옅은 한숨을 쉬며 갈란군주를 다독였다. 그녀는 예전부터 갈란군주를 예뻐해 왔던 사람이라 갈란군주가 계란으로 바위치기 격인 일을 벌이는 걸 바라지 않았다.

“제가 뭘 잘못 봤다는 말씀이세요? 설령 제가 잘못 봤다고 해도 진서후 부인에게 팔찌를 보여 달라고 할 수는 있잖아요.”

갈란군주는 눈썹을 추켜세우며 엽연채를 쳐다봤다.

“안 그래요?”

엽연채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찰나, 주묘서가 냉랭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터무니없는 말씀 마세요. 공연히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군요.”

신양 공주도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란아, 진정하거라.”

“하.”

엽연채는 싸늘한 눈빛으로 갈란군주를 쓱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군주께서 보이라고 하면 보여야 되나요? 군주께서 군주의 물건이 제게 있다고 말씀하시면 제가 사람들 앞에서 몸수색이라도 당해야 된단 소리신가요?”

“무어라? 너, 너희들이 감히 날 업신여기는구나!”

갈란군주는 입술을 꽉 깨물며 모욕당한 표정을 지었다.

노왕비는 갈란군주가 안쓰러워서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은 그녀였다. 간신히 훌륭한 사내에게 시집을 가게 됐다 했지만, 결국 그 남편도 불구가 됐으니 당연히 엽연채가 잘나가는 모습을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갈란군주, 대체 뭐 하는 게냐?”

이때, 누군가의 싸늘한 호통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정선제가 환관 넷이 든 활간 위에 앉아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사람들은 얼른 예를 올렸다.

“일어나거라.”

정선제가 손을 들어 예를 면해 주자 엽연채는 고개를 들어 정선제를 살펴보았다. 밝은 빛깔의 황포黃袍를 입은 그는 혈색이 좋고 얼굴에 윤기가 흘렀으며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큰 병이 나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벌써 밖으로 나오신 것이옵니까?”

신양 공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정선제는 손을 가로젓더니 미소와 함께 그녀를 안심시켰다.

“짐이 오래간만에 일어났으니 당연히 여기저기 다니며 바람도 쐬고 너희들도 봐야 하지 않겠느냐. 참, 한데 여기서 무슨 소란을 피우고 있던 것이냐?”

“할바마마.”

갈란군주는 눈시울을 붉히며 얼른 그에게로 걸어가 억울하다고 일러바쳤다.

“손녀는 그저 진서후 부인의 팔찌를 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부인이 팔찌를 주지 않았습니다.”

갈란군주가 중요한 부분은 빼고 지엽적인 이야기만 하자 정선제는 호기심이 동했다.

“음? 무슨 팔찌를 말하는 것이냐?”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그제야 손을 내밀었다. 구슬 장식이 찰랑거리는 순금 팔찌가 온전히 보였다. 찬란한 금빛이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잡아끄는 게 아주 화려하고 아름다운 팔찌였다.

한편, 정선제는 그 팔찌를 쳐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 팔찌를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이 팔찌는 그가 혼인 당일 밤에 소 황후에게 주었던 선물이었다.

소씨 가문에 변고가 생기기 전부터 그와 소 황후 사이의 감정은 이미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그는 그녀의 궁을 찾은 지 오래되었고 자연히 그녀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팔찌를 보자 몹시 놀랍고도 슬픈 마음이 들었다. 정선제는 저도 모르게 소 황후와 함께했던 즐거웠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 팔찌가 어떻게 엽연채의 손에 들어간 거지?’

도통 알 수가 없어 정선제가 의아해하는데, 갈란군주는 두 눈을 부릅뜨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아. 제가 잘못 봤던 거군요. 제 것이 아니옵니다. 흥!”

그녀는 엽연채를 곤경에 빠뜨려 우쭐해하는 표정을 지었고 고개를 숙일 때 기다란 속눈썹으로 눈 속의 싸늘한 빛을 숨겼다.

정선제는 크게 놀라 엽연채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팔찌는 어디서 났느냐?”

“저희 할머님께서 주신 것이옵니다.”

엽연채의 대답에 정선제는 또 한 번 놀라며 물었다.

“할머님? 자네 할머님이라면……?”

“주씨 가문 노부인인 매梅 노태군老太君이 제 할머님입니다. 그분께서 제게 첫만남 선물로 주신 것이옵니다.”

정선제는 멍한 표정을 지었고 그제야 매 노태군이 누구인지 떠올랐다. 그녀도 소 황후와 마찬가지로 장수 가문의 용감한 여식으로, 젊었을 때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도 했던 여장부였다.

갑자기 팔찌를 보게 된 정선제는 큰 충격을 받아 기침을 했다.

채결은 기침 소리를 듣더니 아연실색했다. 얼마 전, 죽음이 임박했을 때도 정선제는 이렇게 기침을 했었다. 그때 각인되었던 죽음의 공포가 다시 밀려들었다.

“폐하, 어서 돌아가시죠. 바람이 셉니다.”

“맞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큰 병이 나은 지 얼마 안 됐으니 밖에 오래 머무르시면 아니 되옵니다.”

노왕비가 말했다.

“알겠다, 일단 돌아가자꾸나.”

정선제는 가슴을 움켜잡았고 병마에 시달릴 때 느끼던, 숨이 탁 막히는 듯한 답답한 느낌이 몰려오자 스스로도 놀라고 말았다. 간신히 회복하게 되었으니 방심해서는 안 된다.

“활간을 들어라!”

채결이 큰 소리로 외치자 사람들은 모두 정선제를 둘러싸고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

궁침으로 돌아온 채결은 얼른 나 의정을 불렀고, 나 의정은 진맥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폐하의 용태가 점점 더 좋아지고 있기는 하나 몸조리에 유의하셔야 하옵니다. 봄추위가 살을 에는 듯하니 보온에 신경을 쓰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편히 가지시고 이런저런 걱정을 많이 하시면 안 된다는 걸 꼭 기억하셔야 하옵니다.”

정선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 의정을 내보내더니 채결에게 일렀다.

“그 팔찌는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구나.”

“폐하, 선황후 마마께서 살아 계셨을 때 매 노태군과 사이가 좋으셨습니다. 아마 마마께서… 매 노태군에게 하사하신 듯하옵니다.”

채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선제는 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가슴이 다시 답답해졌다. 사실 그도 그랬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마음에 걸렸다.

‘왜 그 팔찌를 다른 사람에게 하사했을까?’

그 팔찌는 자신이 특별히 솜씨 좋은 장인을 찾아 무려 3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제작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혼 첫날밤에 그가 선물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두 사람은 그때 아주 행복했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하사했다라. 아마, 그녀가 자신에게 실망했고 고통과 절망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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