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641화 (641/858)

제641화

“하하. 이건 장발초록육醬潑楚鹿肉이구나. 건아,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다.”

정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장발초록육 한 점을 집어 태자의 그릇에 놓아줬다.

“폐하와 건이 모두 장발초록육을 좋아하죠. 북초에서 얻을 수 있는 생사슴고기를 써야만 이런 맛이 나오는데, 북초가 너무 먼 탓에 아무리 많이 가져와도 오는 길에 상하고 남은 걸론 몇 끼밖에 먹을 수가 없지만요. 폐하, 기억하십니까? 건이가 여덟 살 때 한 접시밖에 남지 않자 폐하께서 전부 건이에게 주셨던 일을요.”

태자는 이 말을 듣고는 멍한 표정을 지었고 불현듯 정 황후가 재차 강조했던 ‘안정’과 ‘효’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또 어릴 적 정선제가 자신에게 잘해 줬던 기억도 떠오르자 방금 전에 느꼈던 거북한 기분은 차츰 옅어져 갔다.

그가 고개를 돌려 보니 정선제는 빙그레 웃으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구려. 짐은 잊어버렸는데.”

“폐하께서는 당연히 잊으셨겠죠.”

정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 있어서 태자에 대한 관심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의 한 부분이니 말이죠. 어떻게 일일이 기억하실 수 있겠습니까?”

정선제는 이 말에 크게 기뻐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황후 말이 옳소. 그러니 그간 두 사람 역시 짐을 보살피는 게 힘들지 않았겠지!”

“그럼요.”

황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으나 태자는 조금 죄책감이 들어 저도 모르게 코를 매만졌다. 자신은 짜증이 날 대로 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짐은 오늘 장발초록육을 먹을 수 없소. 담백한 음식만 먹을 수 있소.”

정선제는 본인 말대로 담백한 음식을 먹긴 했지만 입맛이 너무 좋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밥을 싹 먹어 치웠다.

한편 태자는 어릴 적 일이 떠오르자 마음속 우울한 기분이 사라졌고, 늘 자신을 사랑하고 보호해 줬던 아버지가 단숨에 죽을 두 대접이나 해치우는 모습에 기쁜 마음이 들었다.

* * *

식사를 마친 후, 태자는 궁을 나섰다.

태자부로 돌아온 그가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녹지가 달려와 말했다.

“전하, 돌아오셨군요. 마마께서 전하와 식사를 하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자 태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이미 말을 전하지 않았느냐? 궁에서 아바마마를 모시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할 거라고 말이다.”

“아… 그러셨습니까…….”

녹지는 놀라서 멍한 얼굴로 주저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게… 하인들이 보고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하여… 마마께서 전하를 한 시진 가까이 기다리셨습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태자는 주묘서를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렇게 오랫동안 그를 기다렸다 하니 요청을 무시하기도 곤란했다. 그는 아직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상태이니 주운환을 더욱더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태자는 발길을 돌려 묘언거에 갔다. 과연 주묘서는 식탁 앞에 앉아 있었고 식탁 위에 올려진 음식에는 하나도 손을 안 댄 모습이었다.

“전하, 돌아오셨군요.”

주묘서는 얼른 그에게 달려갔다.

“내 오늘 돌아와서 식사를 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는데 하인들이 당신에게 알리지 않아 괜히 헛고생하게 만들었군.”

“예?”

주묘서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소첩이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음식도 준비해 놨는데요. 에휴… 그래도 전하께서 폐하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걸 보니 폐하의 건강이 분명 점점 더 좋아지시는 거겠죠.”

“그렇소.”

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 앞에 앉았다.

“정말 잘된 일이네요. 폐하께서는 분명 만수무강하실 겁니다. 호호호!”

태자는 ‘만수무강’이라는 말을 듣자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황제가 정말로 만수무강한다면 큰일 아닌가. 그는 이제 겨우 육십 대였다.

* * *

귀족들은 정월 스무날에 모두 정선제의 궁첩을 받았다. 궁첩에는 정월 스무이튿날에 궁에서 봄맞이 연회를 여니 참석하라고 쓰여 있었다.

궁첩을 받은 후 진서후부의 여종들은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주운환이 한동안 억울한 누명을 써 수난을 겪었는데 이제 마침내 먹구름이 걷히고 밝은 빛을 보게 되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때마침 정선제의 병도 회복되었으니 앞으로 밥 먹을 때, 잠잘 때는 물론이고 크게 웃고 싶어도 불안해 몸을 사려야 할 일은 없게 되었다.

청유와 혜연 등은 궁에서 여는 시끌벅적하고 흥겨운 연회에 참석한단 사실에 한껏 들떠 있었다.

이에 그들은 여러 종류의 치마와 적삼, 수를 놓은 외투 등을 침상 위에 가득 펼쳐 놓았다. 청유와 백수는 연회 때 엽연채가 어떤 옷을 입어야 하고 어떻게 꾸며야 조화로워 보일지를 두고 재잘거리며 상의하고 있었다.

엽연채는 탑상에 앉아 행복하게 웃으며 혜연과 함께 아이가 입을 작은 옷에 수를 놓고 있었다. 한껏 들뜨고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나리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이때, 밖에서 소월의 신바람 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 나리께서 돌아오셨다네요.”

청유와 백수는 바로 까르르 웃었다.

엽연채가 함박웃음을 짓고 고개를 기울여 보니 다층 진열장 너머로 훤칠한 사내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소월이 ‘촤르륵’ 소리를 내며 주렴을 걷어 올리자 지쳐 보이는 주운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암청색 기린 문양이 들어간 소매 없는 외투를 입고 은관을 쓴 그는 그녀를 보더니 말을 꺼내기도 전에 웃음부터 지었다.

“부인.”

그는 엽연채에게 다가와 그녀를 확 자신의 무릎에 앉히더니 먼저 ‘쪽’ 소리를 내며 입맞춤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무거워졌네요.”

엽연채는 까르르 웃더니 당연한 소리를 한다고 대꾸했다.

“부군, 돌아왔군요.”

그러고는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대고는 비비적거렸다.

“네.”

주운환은 고개를 숙여 다시 입맞춤하더니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그간 눌러야만 했던 그리움을 표출했다.

“부인, 귀여운 우리 부인.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네.”

달달한 기분이 든 엽연채는 그의 어깨에 기대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어머’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요 녀석이 부군을 차려고 해요.”

주운환이 그녀의 배를 어루만졌고 정말로 안에서 움직이는 게 느껴지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무예를 익힐 재목이군요.”

부부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자 혜연과 청유 등은 미소를 지으며 얼른 자리를 떴고 밖으로 나가기 전에 눈치 있게 문도 닫았다.

“부인, 폐하께서 제게 도성으로 돌아와 궁에서 베푸는 연회에 참석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폐하께서는 이미 건강을 회복하셨어요. 제가 어제 주묘서 쪽에 가 봤는데 역시나 안절부절못하고 있더라고요.”

이리 대꾸한 엽연채가 다른 화제를 꺼냈다.

“양왕 전하 쪽에서는… 소식이 있었나요?”

그녀는 전에 이야기했던 바를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정선제의 상태가 좋아지기만 하면 태자와 정선제 사이를 이간질해 태자가 모반을 일으키도록 부추길 거라고 했었다.

“네, 전하와 부하들은 지금 박주로 가고 있습니다.”

“박주요?”

엽연채가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묻자 주운환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쪽에 선황후께서 남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양왕 전하께서는 그 사람들을 찾아 전하와 일행들의 호송을 맡겨 함께 돌아오시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야기를 끝냈고, 이월 말에 전하께서 능주로 돌아오실 겁니다.”

마침내 서광을 보게 된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 앵기는 어떻게 지내고 있대요?”

“그 이야기는 서신에 없었습니다.”

주운환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엽연채는 벗의 소식을 알 수 없어 순간 기운이 좀 빠졌지만 한 달만 있으면 큰일이 성사된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주운환이 돌아오자 진서후부는 더욱 화목하고 평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 * *

정월 스무이튿날, 황궁에선 봄맞이 연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귀족들이 미시未時(오후 1시~3시)쯤에 잇달아 외출하자 큰길에 있던 백성들과 소상인들은 얼른 그들에게 길을 내줬고, 화려한 마차들이 꿈틀거리는 용처럼 여러 거리 위를 지나갔다.

마차와 마차를 끄는 준마들의 모습이 빼어날 뿐 아니라 마차 위에 걸린 풍등風燈 역시 정교하고 세련된지라 시선을 끌었다.

아직 겨울의 추위가 전부 물러가지 않은 이른 봄이라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큰길 위의 마차들이 분위기를 순식간에 떠들썩하게 만들며 추위를 순식간에 몰아냈다.

얼마 후, 모든 마차들이 궁문 밖에 한데 모여 기다렸다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진서후부 마차는 동화문에서 멈춰 섰고 주운환은 여느 때처럼 먼저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엽연채를 부축해 줬다.

“고모가 왔을지 모르겠네요.”

“오늘 봄맞이 연회는 아주 성대하게 치러져 조금이라도 안면 있는 사람들은 전부 초대되었습니다. 그러니 진씨 가문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고모님은 개월 수가 많이 차서 오셨을지 모르겠군요.”

이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후야, 후 부인.”

어리둥절해진 엽연채가 사람들 틈에서 고개를 들어 보니 근처에 서 있는 춘산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엽연채 쪽으로 걸어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측비 마마께서 특별히 소인에게 후 부인을 모셔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엽연채는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가씨가 마음을 써 줬구나. 그래, 측비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이미 청휘원에 도착하셨습니다. 측비 마마의 자당께서도 도착하셨고요. 어서 가시지요.”

“그래.”

엽연채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는 춘산을 따라 그곳을 떠났고 혜연과 청유는 자리에 남아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청유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 측비와 우리 마님은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잖아. 만나기만 하면 항상 서로 눈썹을 치켜세우며 눈을 부라렸는데, 오늘은 웬일로 먼저 호의를 보이네.”

“모처럼 말썽을 부리지 않을 생각인가 본데, 우리도 신경 쓰지 말자.”

혜연은 흔쾌히 따라나서는 엽연채와 주운환의 모습을 보더니 청유에게 이리 일러 뒀다. 그러자 눈치 빠른 청유는 고개를 까닥였다.

“그래. 우리 포하抱廈로 가서 쉬고 있자.”

주인을 따라온 하인들은 궁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지정된 장소에 머물러야 했다.

엽연채와 주운환은 춘산을 따라 걸어가면서 많은 귀빈들을 마주쳤다. 그들은 잇달아 다가와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눴고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 모두를 상대해 줬다.

청휘원으로 들어가자 어린 환관 한 명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후야께서 오셨군요. 마침 상관 대인께서 후야를 찾고 계셨습니다.”

“그래.”

주운환은 몸을 돌려 엽연채에게 말했다.

“먼저 가 볼게요.”

“네.”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보내자 춘산이 친절하게 홀로 남은 그녀를 챙겼다.

“부인, 이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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