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0화
“하늘이 보우하시어 황제 폐하께서 더할 나위 없이 큰 복을 누리게 되셨구나. 마침내 고비를 넘기게 되셨어.”
엽연채는 두 손을 모으고 두 눈을 감은 채 축복의 말을 몇 마디 했다.
“어서 음식을 마저 올리거라. 식사를 마친 후 태자부에 갈 것이다. 큰아가씨에게 황제 폐하가 어떠신지 직접 물어봐야겠구나.”
“예.”
혜연은 두 눈을 반짝이더니 탁자에 요리를 올리는 속도를 높였다.
역시 손놀림이 빨라진 청유는 하인증미鰕仁蒸眉 한 접시를 식탁에 올리더니 조금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그런데… 저희가 황제 폐하의 상태를 물어봐도 될까요?”
“폐하의 상태를 캐내려는 게 아니라 도의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뿐이다.”
엽연채는 배시시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봐라. 지금 온 거리의 사람들이 전부 알고 있지 않니.”
정선제는 자신이 회복됐다는 걸 모든 사람들이 알기를 바랄 것이다. 이 나라의 황제이자 주인인 그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 나라의 주인은 아직 바뀌지 않았고 아직 주인이 바뀔 때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대제의 황제는 아직까지 그였다. 그런데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가 기뻐할 리 있겠는가?
“혜연아, 너는 가서 준비를 하되 우선 궁으로 궁첩부터 보내거라.”
궁첩을 보내 정선제의 안부를 물은 다음 ‘한시도 기다리지 못하겠다.’라는 듯이 태자부에 가서 정선제의 상태를 알아보며 관심을 보일 것이다.
정선제의 병이 위중해진 후로 궁에선 금령禁令을 내려 조정 신하들과 부녀자들이 입궁하여 문안을 드리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정선제의 병이 회복된 지 얼마 안 돼서 금령은 아직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식사를 마친 엽연채는 의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후 마차를 타고 문을 나섰다.
* * *
그 시각 태자부.
묘연거의 시녀들은 거의 다 밖으로 내보냈고 녹지와 춘산만이 남아 주묘서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기다란 탑상에 비스듬히 기댄 주묘서는 봉황이 날개를 펴는 문양이 들어간 비단 담요를 무릎에 덮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음울했다.
그녀 곁에 앉아 있는 진씨 또한 표정이 아주 좋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이제 곧…….”
“됐어요. 더 이상 언급하지 마세요.”
주묘서는 말허리를 자르며 차가운 눈빛으로 진씨를 쓱 쳐다봤다. 그녀는 아직도 화가 나 가슴이 벌렁거리는 상태였다.
‘분명 곧 있으면 내가 황후가 될 수 있었는데…….’
“측비 마마, 진서후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이때, 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주묘서와 진씨는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고 주묘서가 냉랭한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뭐 하러 왔단 말이냐? 난 그 누구도 보고 싶지 않다.”
“어머. 큰아가씨, 누가 보고 싶지 않은 거예요?”
밖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가 내는 소리였다.
“방금 전에 문으로 들어설 때 이곳 시녀를 한 명 보았는데 큰아가씨가 병이 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말했죠. 병이 났으니 더더욱 아가씨를 봐야 한다고요.
그런데 지금 아가씨 목소리를 들어 보니 기운이 펄펄 넘치는 것 같으니, 참 이상하네요. 아, 그건 그렇고 백주 대낮에 문은 왜 잠가 놓은 거예요?”
주묘서는 더욱더 분통이 터졌고 진씨도 불쾌해진 심기를 추스르지 못했다.
춘산이 문 쪽으로 걸어가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을 열더니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에게 말했다.
“어떤 계집애가 헛소리를 했단 말입니까? 감히 우리 마마께서 병이 났다고 저주를 하다니. 이따가 그 계집애를 흠씬 두들겨 패겠습니다. 부인, 안으로 드시지요.”
엽연채는 안으로 들어갔고 예상했던 대로 진씨는 이미 와 있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하. 어머님도 계셨군요.”
그녀가 예를 올리자 진씨가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됐으니 앉거라. 보아하니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모양인데 집에서 태교에나 전념하거라. 별일 없으면 바깥출입은 삼가고.”
“의원이 자주 외출해서 몸을 움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아이한테 좋다고 했어요.”
엽연채는 배시시 웃으며 그리 말하고는 진씨의 하좌에 놓인 권의에 앉았다.
“들어 보니 황제 폐하의 병이 회복되셨다고 하던데, 지금 상태는 어떠신지 모르겠네요.”
주묘서와 진씨는 엽연채가 갑자기 이런 화제를 꺼내자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
주묘서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물어서 뭐 하려고요?”
그러자 엽연채는 놀라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이 소식을 듣게 됐으니까요. 거리에 이 이야기가 마구 퍼지고 있던데 우리는 확실히 모르잖아요. 그래서 물어보려고 왔죠. 어쨌든 큰아가씨와 태자 전하께서는 분명 궁에 들어갔을 테니 실제 상황에 대해 알고 있지 않나요?”
주묘서는 이 이야기를 하고픈 마음이 조금도 없어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춘산이 얼른 눈치껏 말했다.
“맞습니다. 폐하께서는 평안하십니다. 그러니 부인, 걱정 마세요.”
“하늘이 도우셨구나.”
엽연채는 안도의 한숨을 짓는 모습을 보이더니 주묘서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어째 큰아가씨는 기뻐 보이지 않네요?”
주묘서는 표정이 굳어졌다.
“내… 내 어디가 기쁘지 않아 보인다는 거예요? 요 며칠 입덧이 심해서 안색이 좀 안 좋은 것뿐이에요.”
“아, 그런 거였군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제가 들어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 큰아가씨는 사람을 시켜 차도 내오지 않네요? 이 새언니는 안중에도 없는 거예요?”
주묘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엽연채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을 한바탕 퍼붓고 싶었다. 그녀는 태자의 측비이고 장차 황후가 될 사람이다. 그런데 왜 고작 엽연채 따위를 안중에 둬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엽연채는 자신에게 마치 아랫사람을 부리는 말투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마디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직 황후가 아니며, 아직 정선제가 살아 있으니까 말이다.
“큰아가씨?”
엽연채는 재촉하듯 그녀를 쳐다봤다.
“난… 흥! 춘산아, 뭐 하고 있는 것이냐? 어서 가서 차를 내오지 않고!”
주묘서는 결국 애꿎은 춘산에게 화풀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춘산은 억울해 죽을 것 같았지만 얼른 돌아서서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손님맞이에 소홀했던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것뿐인데. 주묘서와 진씨의 빌어먹을 성격을 볼 때, 그녀가 이곳에 남아 이들을 지켜보지 않으면 이 두 사람은 또 엽연채와 얼굴을 붉힐 테니 말이었다.
어쨌든 춘산은 부랴부랴 차를 내왔고 엽연채는 좀 더 머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떠났다.
엽연채의 뒷모습이 정원 문밖으로 사라지자 주묘서는 그제야 대청으로 걸어가더니 그 방향을 가리키며 욕을 퍼부었다.
“저 빌어먹을 년! 내가 지금 황후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는 일부러 날 찾아와 모욕을 주는 거지! 빌어먹을 년! 저 빌어먹을 년!”
“됐으니 소란 피우지 말거라.”
진씨는 얼른 그녀를 붙잡으며 말렸다.
“네가 화를 내면 배 속에 있는 아이에게도 영향을 줄 게다.”
“아이요? 하하하!”
주묘서는 더욱 분이 치밀었다. 그녀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태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미뤄지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자 더욱 억울해진 주묘서는 눈물을 꾹꾹 참으며 마음속 이야기를 다 쏟아내 버렸다.
“제가 왜 기다려야 돼요? 무얼 위해 기다려야 돼요? 전 기다리고 싶지 않아요! 전 황후가 될 거예요! 그 죽지도 않는 늙… 우웁.”
진씨는 식겁하며 주묘서의 입을 틀어막고는 그녀를 나무랐다.
“이런 말은 우리 모녀가 뒤에서 몰래 하는 걸로 충분하다. 어디서 소리까지 지르려는 것이냐?”
진씨는 주묘서를 끌고 응접실로 돌아가 탑상에 앉혔고, 주묘서는 서럽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해요? 몇 년이나 더 설움을 겪어야 해요?”
“우선 태자 전하께 태자비 자리를 달라고 부탁해 보는 건 어떠냐?”
진씨가 말했다.
그러나 주묘서는 조금도 내키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태자비 자리를 아주 소중히 여겼을 테지만, 이젠 달랐다.
“태자비가 되면 뭐 해요? 태자비가 되어도 그 여인과 동등한 위치가 아니잖아요! 그 여인은 제 새언니이니 여전히 저보다 위에 있어요.”
그녀는 원래 단번에 황후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태자비나 되라고 하니, 이건 그녀가 한참 더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보다 못한 진씨가 노여워하며 말했다.
“지금 네가 뭘 어쩔 수 있단 말이냐? 폐하께서 회복을 하셨으니 방법이 없다.”
그런데 주묘서는 순간 잔인한 눈빛을 번득였다.
‘그러니 죽여 버려야지! 병으로 죽지 않았으니 죽여 버리면 그만이야.’
하지만 그녀는 감히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게다가 태자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태자가 동의하게 만들어야 한다!’
주묘서는 태자를 설득할 방법을 모색하며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됐으니 참고 있거라. 일단 태자비가 되고 맘 편히 아이를 낳거라. 그럼 그 아이가 태자의 유일한 적자가 되는 것 아니더냐.”
딸의 속내를 모르는 진씨는 그저 주묘서를 좀 더 달랜 후 그곳을 떠났다.
* * *
낮에 조정에 나간 태자는 태자부로 돌아가지 않고 궁에 남아 정선제를 돌봤다. 그리고 저녁 무렵, 태자와 정 황후는 정선제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정선제는 아직 침상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가 침상에 앉은 채로 식사를 하길, 또 가족들이 함께 모여 식사하길 원했기 때문에 채결은 침실 안에 상을 차렸다.
정선제는 팔보계사육八寶鷄絲肉을 한 그릇 먹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붙였다.
“그간 다들 고생이 많았다. 짐 때문에 걱정도 했을 테고.”
그의 눈에는 순간 기쁨과 안도의 눈물이 어리었다. 그동안 정 황후와 태자가 편히 쉬지도 자지도 못하고 어떻게 그를 보살폈는지 그는 전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이번 명절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는 걸 짐도 알고 있다. 그럴싸한 연회조차 열지 못했지. 이미 정월 보름이 지나가긴 했지만 짐이 두 사람과 조정 신하들을 위해 궁에서 연회를 열어 주고자 한다. 닷새 후에 열 것이야.”
정선제는 희색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태자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미소를 지었지만 사실 속은 말이 아니었다.
이제 온 거리의 사람들이 정선제의 병이 회복됐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추측해 볼 것도 없이 분명 정선제가 퍼뜨린 것이리라.
백성들은 이미 새 주인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태자인 자신이 제위에 오르는 걸 이미 받아들였는데 결과는 이렇게 되었다.
지금 정선제는 한시도 참을 수 없다는 듯 궁에서 연회를 열겠다고 말했다. 분명 사람들이 그가 회복했음을 믿지 않을까 봐 걱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약이 정말로 영험한 것이라면, 나 의정이 했던 말이 진실이라면 정선제는 곧 조정으로 돌아와 다시 천자의 의자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계속해서 그 아래에 서 있게 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