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9화
정 황후는 길상의 의미를 지닌 용봉龍鳳 문양이 들어간 기다란 탑상으로 걸어갔고 태자는 콧방귀를 한 번 뀌더니 뒷짐을 진 채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아바마마께서… 병이 나으셨네요.”
정 황후는 기다란 탑상 위에 천천히 앉으며 대꾸했다.
“그러게 말이다.”
태자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전에 정선제의 병이 위중했을 때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정선제의 모습을 쳐다보며 마음 아파했다. 어쨌든 정선제는 그의 아버지였다. 항상 자신을 위해 생각해 주었고 본인의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조차 자신을 위해 양왕을 제거하려고 해 주었다.
이렇게 좋은 아버지가 병이 들어 생사의 갈림길을 헤매고 있으니, 태자는 항상 아버지가 평안하고 건강해지기를,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빌었다.
하지만 아무리 빈다고 한들 이 기도가 아무런 소용도 없을 거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병세가 이리 위중한데 어떻게 좋아질 수 있겠는가.
아버지가 이렇게 아들을 떠나려 하니 그는 마음이 아팠고 괴로웠다.
그런데 그의 기도가 정말로 이뤄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버지가 건강을 회복할 줄 말이다.
태자는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바마마께서 건강이 좋아지시다니……. 전, 전 언제가 되어야 제위에 오를 수 있는 것이옵니까?”
오랫동안 참아 왔던 그는 결국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태자!”
정 황후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런 말은 해서는 안 되네.”
태자는 깜짝 놀랐지만 또 미간을 잔뜩 째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소자는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그럼 뭐 어쩌고 싶은 겐가?”
정 황후는 냉랭한 눈으로 그를 쓱 쳐다봤고, 태자는 뜨끔해져 입을 열지 못했다. 정 황후는 조급해하는 그의 얼굴을 보더니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태자가 조급해하는데 이 어미라고 어찌 조급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네! 절대로 모험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야.”
그러자 태자의 부드럽고 품위 있는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건아, 이리 와 앉거라.”
정 황후는 그리 말하며 자기 옆에 놓인 이무기 문양이 들어간 수돈을 가리켰다.
“사 마마, 자네는 가서 전하께서 드실 능사차凌沙茶를 내오게.”
태자는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했고 순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정 황후가 그에게 와서 앉으라고 하니 그는 그쪽으로 걸어가 도포를 걷어 올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사 마마는 금세 쟁반을 들고 돌아와 태자에게 찻잔을 건넸다. 태자는 차를 한 모금 마시자 마음이 가까스로 조금 안정되었다.
그런 그를 보며 정 황후가 운을 뗐다.
“건아, 우리가 안정적으로 한 걸음씩 내디디며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게 무엇 덕분이었느냐?”
태자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 황후가 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효孝였습니다.”
“맞다.”
정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지금 안정적인 상태이고 네가 제위에 오르는 건 조만간에 있을 일이다. 양왕은 밖을 떠돌고 있으니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고 네 큰형과 다섯째 동생은 둘 다 세력이 없다. 게다가 주운환 같은 자가 네 뒤에 있지 않느냐. 우리는 괜한 위험을 무릅써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태자는 숨을 몇 번 깊이 들이마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마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가 제위에 오르는 건 명백한 일이다. 그저 조금 늦어지는 것뿐이니 모험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럼 됐다. 네가 일시적인 감정에 휘둘릴까 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정 황후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게다가 네 아버지는 연세도 있으시고 많이 허약해지셨다. 주묘서가 말한 것처럼 소갈증이 치료된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길어 봐야 고작 한 해쯤 더 버티는 거다. 그리고 길다고 해도 겨우 일이 년 남짓이다. 조금 더 기다리자꾸나.”
“어마마마의 말씀이 맞사옵니다.”
“게다가 네 아버지는 정말로 널 아끼고 사랑하셨다.”
정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옛 기억을 풀어놓았다.
“어릴 땐 직접 널 가르치기도 하셨지.”
그녀는 태자가 어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정선제가 어떻게 그를 가르쳤는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그를 길러 냈는지, 하나하나 빠짐없이 상기시켜 줬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차갑고 어두웠던 태자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마음 또한 누그러졌다. 정선제는 그의 아버지로서 그에게 정말 잘해 줬다. 그러니 정선제의 죽음을 바라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하자 태자는 조금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정 황후는 그의 마음이 간신히 평온을 되찾는 걸 보더니 그제야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도 피곤할 테니 이만 돌아가 보거라. 방금 전 궁침에서 나 의정이 네 아버지가 지친 상태라고 하지 않았더냐. 아마 내일까지는 그런 상태이실 게다. 보니 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아버지 곁에 가지 말거라.”
“예, 그럼 소자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태자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태자가 떠나자 정 황후는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냅다 집어 던졌다. 찻잔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쨍그랑!
“마마.”
사 마마는 깜짝 놀라 얼른 그녀에게로 달려가더니 깨진 찻잔 조각을 정리하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래!”
정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내 또 원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건이가 제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하필… 나 의정이란 놈이 훼방을 놓았구나!”
그녀는 화가 나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녀도 태자와 마찬가지로 초조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태자 앞에서는 냉정하고 진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그녀 스스로도 침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태자에게 진정하라고 하겠는가.
지금 두 사람은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러니 ‘안정’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길이었다.
방금 전 그녀가 했던 말은 태자를 속이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한 걸음씩 안정적으로 내디뎌야만 한다. 한 발이라도 잘못 내디뎌서는 안 된다.
* * *
태자의 마음속 풍랑은 가까스로 가라앉았지만 그럼에도 심중은 여전히 언짢고 답답했다.
봉의궁을 나온 그는 동궁에 들르지 않고 곧장 동화문으로 달려가며 이계에게 말했다.
“가서 주 측비를 불러오거라.”
“예.”
이계는 대답을 하고선 바로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태자가 동화문에 도착하자 주묘서도 비슷한 시간에 그곳에 도착했고 두 사람은 마차에 오른 후 함께 출궁했다.
마차 안. 어두운 낯빛의 주묘서가 고개를 들어 보니 태자의 표정은 차가웠지만 크게 초조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는지 저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하… 제위에는 언제 오를 수 있는 것이옵니까?”
그러자 태자는 깜짝 놀라더니 그녀를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것이오!”
태자는 정선제가 전에 그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지를 떠올리며 미묘한 감정 속에 잠겨 있었다. 조금 초조하기는 했지만 속에 여러 모순된 감정들이 한데 뒤섞인 채였다.
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바마마가 건강하고 장수하시는 게 가장 중요하오. 측비는 어째서 온종일 그 생각만 하는 것이오?”
주묘서는 낯빛이 하얗게 변했고 분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마음속은 여전히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죽지도 않는 늙은이! 목숨 줄이 더럽게도 긴 늙은이 같으니라고!’
한편, 태자 일행이 궁을 떠난 후, 나 의정은 약을 다 달인 후 한가한 시간을 틈타 서신 한 장을 적더니 검은 매의 다리에 그 서신을 묶은 후 매를 날려 보냈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정선제의 병이 회복됐다는 소식이 금세 도성 안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 시각, 진서후부.
엽연채는 반청飯廳에 앉아 있었고 백수는 아홉 가지 반찬을 넣을 수 있는 조칠彫漆이 된 커다란 찬합을 들고 있었다. 그녀가 뚜껑을 열자 청유와 혜연이 안에 들어 있는 요리들을 하나하나 식탁 위에 올려놨다.
제일 먼저 꺼낸 요리는 두시점어豆豉鮎魚였는데 엽연채는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건 부군이 좋아하시는 요리인데.”
그러자 청유는 ‘피식’ 웃더니 또 진주회주자珍珠燴肘子 한 접시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놨다.
“며칠 지나면 휴가를 받으니 나리께서도 그때 분명 돌아오실 겁니다.”
주운환은 이미 경위영을 넘겨받았고, 처음 맡는 일이니 당연히 바쁘게 처리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수도 근교로 갔고 한 달에 한 번 휴가를 보내러 돌아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님, 마님!”
이때, 누군가가 기쁜 목소리로 소리쳤다. 소월이 요란하게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얼굴에 희색을 띠며 소식을 전했다.
“황제 폐하께서 회복하셨다고 합니다!”
그 말에 혜연과 청유는 깜짝 놀랐다.
“어? 황제 폐하께서 회복하셨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병을 회복하셨다는 말이죠. 그게 아니면 폐하께서 뭘 회복하셨겠어요?”
그러나 소월 역시 자기 입으로 말하면서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폐하께서 병을 회복하셔서 이제 침상에 앉아 식사도 하실 수 있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러자 혜연 등은 깜짝 놀라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정선제의 몸 상태에 대해 누가 감히 함부로 거짓을 퍼뜨릴 수 있겠는가. 밖에서 이런 이야기가 떠도는 걸 보니 분명 사실일 것이다.
혜연과 청유는 서로 시선을 맞췄고 두 사람은 순간 기쁜 눈빛을 보였다. 청유가 먼저 배시시 웃으며 엽연채에게 말을 붙였다.
“마님, 정말 잘되었습니다!”
“맞습니다, 맞아요.”
혜연도 맞장구를 치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정선제가 죽었다면 태자가 제위에 오르게 되니 주묘서가 황후가 됐을 것 아닌가. 요즘 주묘서가 몹시도 우쭐거리며 잘난 체하고 있는 건 하늘만이 알 것이다. 아직 감히 뭘 어떻게 하지는 못했지만 항상 자신이 미래의 황후라는 티를 내고 다녔다.
그런데 지금 정선제의 병이 회복됐으니 예비 황후인 주묘서의 꿈은 또 미뤄지고 만 것이다. 정말 통쾌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가 와도 정말로 그쪽에 무릎을 꿇을 필요도 없지만 말이야.’
엽연채는 이리 생각하며 입꼬리를 쓱 올렸다. 정선제의 중병이 갑자기 호전된 건 원래 양왕의 계획 중 일부였다. 이리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태자의 불만을 이끌어 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