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8화
“그게…….”
정 황후는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예.”
나 의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보충했다.
“검붉은 피를 토하는 건 증상 중의 하나이옵니다. 소신이 계속해서 침을 놓기만 하면 폐하는 분명 호전되실 겁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시간이 많이 소요되니 전하와 황후 마마께서는 먼저 돌아가서 쉬셔도 되옵니다.”
“허튼소리 말게. 지금 아바마마의 병이 위중한데 아들인 내가 어찌 쉴 수 있겠는가!”
태자가 호통을 치자 옆에 있던 채결이 미소를 지으며 나섰다.
“그럼 마마와 태자 전하께서는 이곳에서 폐하의 시중을 드시지요.”
별수 없이 나 의정은 침울하고 답답한 분위기 속에서 침을 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날이 밝아오는 시간이라 사람들이 제일 버티기 힘든 시간이었다. 반 시진쯤 가만히 서 있자 태자와 정 황후는 눈이 조금씩 감겨 왔다. 주묘서는 이미 근처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전하, 측비 마마를 보시지요……. 마마께서는 지금 회임을 한 몸이라 견디기 힘드실 겁니다. 측비 마마와 전하 모두 효심이 지극하여 폐하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으시겠지만 이로 인해 황손을 힘들게 한다면 폐하께서는 분명 책망하실 겁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우선 측비 마마를 모시고 가서 쉬시옵소서.”
채결이 앞으로 나와 이리 말하자 그러잖아도 한계를 느끼던 태자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공공의 말이 맞네. 내가 아바마마의 심기를 어지럽혀서는 안 되지.”
그리 말하고는 주묘서 곁으로 걸어가더니 그녀를 톡톡 치며 깨웠다.
채결은 이번에는 정 황후 곁으로 걸어가더니 이렇게 말했다.
“마마께서도 며칠 동안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하셨으니 일단 돌아가 쉬시옵소서. 그래야 기운이 생겨 폐하를 다시 돌보실 수 있을 겁니다.”
“공공의 말이 일리가 있군.”
정 황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모자와 주묘서는 함께 궁침을 떠났다. 정 황후는 봉의궁으로 돌아갔고 태자 부부는 태자부 대신 동궁으로 향했다.
처소로 향해 두 시진을 자고 나니 날은 완전히 밝아졌다. 그러나 잠을 설친 태자와 주묘서는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쿵쿵쿵 하는 발소리가 또다시 울려 퍼지더니 이계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전하! 전하!”
태자와 주묘서는 짜증을 내며 눈을 뜨다가 순간 흠칫했다. 또 정선제 쪽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바마마께서는 어떠시냐?”
태자는 침상에서 내려오며 급히 옷을 갖추어 입었고, 이계는 그를 쳐다보며 이렇게 고했다.
“폐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태자는 넋이 나간 표정을 짓더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는지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어젯밤만 해도 분명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정말이옵니다!”
“이런…….”
이계가 확신에 차 다시금 고하자 태자는 정신을 가다듬고 기쁜 목소리를 냈다.
“아바마마께서 마침내 회복하셨구나.”
그는 그리 말하며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고 주묘서는 얼른 뒤를 따르며 그를 불러 세웠다.
“전하, 잠시만요!”
정선제의 궁침 문 밖에 도착한 그들은 마침 역시 소식을 듣고 온 정 황후와 마주쳤고 함께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그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선제는 기운이 넘치는 모습으로 침상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채결이 그에게 제비집을 넣은 고기 죽을 먹여 주고 있었다.
정선제는 그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왔구나……. 에휴. 짐은 다시는 너희들을 보지 못할 줄 알았다.”
태자와 주묘서 그리고 정 황후는 순간 반응을 하지 못했다.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그들은 정선제가 깨어났다고 해도 반송장으로 겨우 눈이나 뜨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제저녁, 사경을 헤매던 그 모습이리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가 정말로 깨어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뜻밖에도 탑상에 앉아서 죽도 넙죽넙죽 잘 받아먹고 있었다.
“약문, 정건.”
정선제는 그들을 쳐다보고는 감격스러워하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짐은 다시는 두 사람을 보지 못할 줄 알았다.”
정 황후와 태자는 여전히 얼떨떨한 채였고 마음속에는 온갖 감정이 교차했다. 하지만 정선제가 오랫동안 부르지 않았던 두 사람의 이름을 지금 갑자기 불러 주니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찌 됐든 정선제는 정 황후의 남편이며 태자의 친아버지였다. 두 사람의 가장 가까운 혈육이었다.
“아바마마!”
태자가 바로 눈시울을 붉히며 앞으로 다가갔다.
“폐하… 다 나으신 겁니까?”
정 황후도 서둘러 앞으로 다가갔다.
반면, 뒤에 선 주묘서는 가족들이 한데 모인 아름다운 장면을 쳐다보며 표정이 싹 굳어졌다. 가슴속에서는 원망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게 뭐야? 곧 죽는 거 아니었어? 왜 갑자기 살아난 거야?’
이래서야 도대체 언제 황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모자는 감격에 겨운 얼굴로 정선제의 침상 곁으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정선제도 크게 감동하며 하하 소리 내 웃었다.
“짐은 다 나았다! 이제 괜찮다.”
그 말에 정 황후와 태자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정선제는 얼굴이 불그스레했고, 윤기가 도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혈색도 조금 돌아와 있었다. 어제처럼 창백하지도 않고 기운이 꽤나 넘치는 모습이었다.
“하하하. 몸이 날아오를 듯이 가볍구나! 이런 느낌… 정말 좋구나.”
정선제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폐하! 폐하!”
정 황후와 태자는 깜짝 놀라 얼른 그를 자리에 앉혔다.
“푹 쉬시는 편이 좋습니다.”
“쉬라고?”
정선제는 조급한 모습으로 거절했다.
“짐은 침상에서 몇 개월 동안 누워 있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고 싶구나. 하하하.”
정 황후와 태자는 움찔하며 놀랐고 태자는 황급히 다시 한번 그를 만류했다.
“아바마마, 하루 이틀 더 몸조리를 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정선제는 두 사람이 자신의 몸에 신경을 써 주는 모습을 보더니 그들의 호의를 저버리기 곤란해 호탕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겠다. 그럼 하루 더 몸조리를 하고 내일 나가 봐야겠구나. 나 의정, 그래도 괜찮겠지?”
나 의정이 그를 죽음의 문턱에서 끌고 돌아왔으니 정선제는 그를 매우 신임하고 총애했다.
“물론이옵니다.”
나 의정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폐하, 식사를 하신 후에 소신이 다시 침을 놓아 드리겠습니다.”
“그래.”
정선제는 얼른 대답했고 말을 마친 그는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채결은 사람을 시켜 음식을 한가득 내오게 했다. 연와녹육죽燕窩鹿肉粥, 진주계화면호珍珠桂花面糊, 수정동과교水晶冬瓜餃 등 다 소화에 좋은 음식들이었다.
정선제는 대접에 담긴 연와녹육죽을 단숨에 비우더니 진주계화면호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이렇게 입맛이 좋을 수가 없었다. 나 의정이 말리지 않았다면 정선제는 더 먹으려고 했을 것이다.
정선제는 입을 닦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음식들은 전에 몸보신할 때 자주 먹던 것들이라 질렸었는데, 알고 보니 대단히 맛난 것들이었구나.”
정 황후와 태자는 이 모습을 보고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어디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이던 병자의 모습이란 말인가.
나 의정이 침을 다 놓자 정선제는 피곤해 곯아떨어졌다.
정 황후와 태자는 곯아떨어진 정선제의 모습을 쳐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잠을 잔다는 건 상태가 아주 좋은 건 아니라는 뜻이니 말이다.
정 황후와 태자는 나 의정을 따라 함께 정선제의 궁침을 떠났고 그들은 근처에 있는 포하抱廈로 걸어갔다. 주묘서도 어둡게 착 가라앉은 얼굴로 그 뒤를 따라갔다.
태자가 황급히 물었다.
“아바마마께서… 회광반조回光返照(죽기 직전에 잠깐 상태가 좋아짐)를 보이시는 것 같은데… 얼마나 버티실 수 있을 것 같은가? 우리가 곁에서 많이 보살펴 드려야겠지?”
“전하, 걱정 마십시오. 폐하께서는 회광반조를 보이시는 것이 아니옵니다. 폐하의 병세는 이미 회복되셨습니다.”
나 의정의 확신에 태자와 정 황후는 깜짝 놀랐고, 주묘서는 낯빛이 어둡게 변했다.
“이 돌팔… 크흠. 나 의정, 허풍 떨지 말게. 난 소갈증이 치료될 수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네.”
“그게…….”
나 의정은 그저 공수하며 말했다.
“소신도 장담하기는 어렵사옵니다만 어쨌든 폐하의 병세는 회복되었습니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약만 복용하시면 되옵니다.”
“그 약재들은 모두 구하기 희귀한 것들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얼마간 먹을 수 있는가?”
“측비 마마, 이 약을 다 먹기만 하면 병세가 통제 가능한 범위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되면 다른 약으로 몸조리를 하면 되옵니다.”
“이……!”
나 의정의 답변에 주묘서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약 달일 시간이 되었사옵니다. 소신은 황제 폐하께 드릴 약을 달이러 가야 하니 전하, 마마,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정 황후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살짝 굳어졌지만 안간힘을 다해 미소를 보이려고 했다.
“그럼 의정은 어서 가 보게나. 폐하께 제때에 약을 드려야 하네.”
“예.”
나 의정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돌아서서 이곳을 떠났다.
태자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정 황후가 말했다.
“가자. 우선 봉의궁으로 돌아가자꾸나.”
그들은 포하를 나와 잰걸음으로 봉의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뒤에서 쫓아가던 주묘서는 몸이 무거워 모자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전하… 기다려 주세요.”
지금 마음이 복잡한 태자는 그녀가 조금 성가셨는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춘산아, 측비가 지친 것 같으니 일단 측비를 부축해 동궁으로 돌아가 쉬고 있거라.”
주묘서를 부축하고 있던 춘산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얼른 대답했다.
“예.”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주묘서에게 말했다.
“측비 마마, 우선 동궁으로 돌아가시죠.”
“아…….”
주묘서는 혼자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태자와 정 황후의 모습은 이미 모퉁이로 사라진 후였다. 그녀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도 지금 이 모자를 상대할 기분이 아니었다. 이게 다 죽지도 않는 그 늙은이 때문이었다.
‘어째서 아직도 살아 있단 말인가? 어째서 죽지 않느냔 말이다!’
한편, 태자와 정 황후는 봉의궁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정 황후를 모시고 온 사 마마가 차가운 목소리로 아랫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너희들은 전부 나가 보거라.”
궁녀들은 얼른 대답을 하고는 모두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