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6화
정오가 되어 양왕이 다시 돌아왔을 때, 조앵기는 또 열이 나서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고 적잖이 괴로운지 낑낑거리며 눈물을 쏟고 있었다.
양왕과 함께 온 주 선생이 그녀의 맥을 짚더니 이렇게 말했다.
“몸조리를 잘해야 하옵니다.”
날씨가 너무 춥고 계속 풍찬노숙한 게 주된 원인이었다.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니 당연히 영양 상태 역시 나쁠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양왕을 향해 주 선생이 다시 말했다.
“눈보라가 멈추면 출발해야 하옵니다. 더는 지연되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러니 왕비 마마는 우선 이곳에 머무르시는 편이 가장 좋을 듯하옵니다…….”
그는 그리 말하며 양왕을 쳐다봤는데, 양왕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눈빛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주 선생은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양왕비는 그야말로 번거로운 짐짝이었다.
애초에 도성을 떠나면서 그녀를 데려오면 안 되는 것이었다.
오는 내내, 그녀 한 사람 때문에 양왕이 탄 말은 전처럼 빨리 달릴 수 없었다. 추격병이 뒤쫓아오는, 생사를 다투는 순간에도 그녀 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호위병들의 수가 배로 늘어났음은 두말하면 입만 아픈 일이었다.
그녀만 없었다면 지금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3백여 명의 정예 부대가 다 죽고 고작 열명 남짓만 남았을 리가 있는가.
그러니 현실적으로 이제는 그녀를 버려야만 했다. 하지만 양왕은 이 일을 감정적으로 처리했고, 이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전하, 소인은 먼저 가서 약을 달이겠사옵니다.”
결국 주 선생은 이 말만 남기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양왕은 침상에 앉아 아까와 다름없는 얼굴로 조앵기를 내려다봤다. 침상에 누워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콩알만 한 크기의 땀방울이 이마를 따라 계속 아래로 또르르 흘러내렸다.
양왕은 어젯밤처럼 찐빵을 물에 불려 죽처럼 만든 다음 그녀의 입에 넣어 줬지만 그녀는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몸을 돌리며 먹지 않으려고 했다.
“이 고얀 것!”
또다시 눈 속에 노기가 치민 양왕은 그릇을 냅다 집어 던졌다.
“젊은 양반…….”
위 할멈은 그 소리를 듣고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구석에 깨져 있는 그릇을 보자 아까워 죽을 것만 같았다.
‘원래도 집 안에 그릇이 많지 않은데 하나를 이렇게 낭비해 버리다니!’
그러나 양왕은 그녀를 쳐다보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홱 밖으로 나갈 뿐이었다. 아픈 처자와 둘만 남은 위 할멈은 뭐 저런 사내가 다 있나, 어안이 벙벙했다.
양왕은 작은 집을 나오더니 곧장 언동 등이 쉬고 있는, 토지신土地神을 모시는 낡은 사당으로 가더니 몸을 돌려 말 위에 올랐다.
“전하…….”
언동은 깜짝 놀라 운을 뗐으나 그가 질문을 다 하기도 전에 양왕은 말채찍을 힘껏 내리쳤고 말은 그대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밖은 또다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양왕은 마을 밖으로 나가는 오솔길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그들이 왔던 서쪽으로 향하는 길과 남쪽으로 향하는 길이 나 있었다.
이곳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산촌이 있으니 근처에 분명 읍도 있을 것이었다. 이리 판단한 그는 말을 타고 남쪽으로 향해 난 오솔길로 말을 몰았고, 반 시진을 달리자 마침내 읍내를 찾아냈다.
하지만 거센 바람과 눈보라가 휘몰아쳐 행인들이 거의 없으니 밖으로 나와 노점을 편 소상인들도 자연히 드물었다. 그는 한참을 둘러보았지만 원하던 것을 찾아내지 못했고 날이 어두워지자 결국 허탕만 친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양왕이 위 할멈의 집으로 돌아오자 이미 어둠이 주변에 내려앉은 후였다.
주 선생은 주방에서 약을 달이고 있었고, 위 할멈은 응접실에서 어제의 그 찐빵을 만들고 있었는데 무려 탁자 하나를 가득 채우는 양이었다.
양왕은 주 선생이 위 할멈에게 찐빵을 만들라고 했음을 바로 눈치챘다. 이곳을 떠난 뒤 길에서 먹을 건량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양왕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걸어가더니 한편에 앉아 위 할멈이 찐빵을 만드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위 할멈은 묵묵히 찐빵을 빚었고 다 만들자 밖으로 나가 손을 씻었다. 그러자 양왕은 탁자 위에 있는 가장 큰 찐빵을 하나 집어 들더니 주물럭거렸다. 그러자 찐빵 위에 길쭉한 두 개의 귀가 생겼고 양왕은 그것을 보며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어찌 됐든 귀가 완성되자 그는 찜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찐빵들 사이로 그 찐빵을 집어 던졌다. 이게 바로 오늘 저녁이었다.
양왕은 방으로 돌아갔고, 그 후에 위 할멈이 돌아와 보니 찜기에 못 보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귀가 두 개 달린 찐빵 하나였다. 할멈은 그것을 보고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아무 말 없이 계속 찐빵들을 쪄 냈다.
얼마 후, 찐빵이 다 쪄지자 양왕은 찐빵을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조앵기는 여전히 의식이 혼미한 상태인지라 양왕은 그녀의 조그만 얼굴을 톡톡 건드려 깨웠다.
조앵기는 칭얼거리며 눈을 떴는데, 그녀의 흐린 시야에 탁자 위에 올려진 그릇 하나가 담겼다. 그 그릇 안에는 찐빵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어렴풋이 귀가 두 개 달린 게 보였다.
“토자포……!”
조앵기는 감격스러운 나머지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그녀는 꿈속에서조차 부드럽고 맛있는 토자포를 먹었고 토자포의 소는 새콤하고 달달했다.
그녀는 후다닥 침상에서 일어나 그 찐빵을 낚아채더니 두 손으로 그것을 들고 ‘아앙’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하지만 입에 들어가자마자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히잉…….”
토자포가 아닌 것을 깨닫고 울상을 짓는데, 양왕이 차갑고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을러댔다.
“찐빵을 뱉으면 널 던져 버릴 것이다.”
“으으…….”
조앵기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인 채 계속해서 귀가 달린 찐빵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입 안에 음식이 들어가니 또 배가 좀 고픈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건 비록 토자포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귀는 달려 있었다.
조앵기가 음식을 다 먹자 주 선생이 찾아와 탕약을 건넸고 그녀는 약을 마시고 다시 누웠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이 되자 조앵기는 그런대로 열이 내렸다.
양왕은 아침 일찍 일어나 그녀에게 양쪽으로 올림머리를 해 주었고, 외투로 그녀를 단단히 감싼 후 그녀를 안고 문을 나섰다.
마을 밖으로 나온 그는 토지신을 모시는 버려진 사당으로 갔고 말 위에 오른 후 그녀를 자신의 앞에 앉혔다. 그러고는 소매 없는 두꺼운 외투로 그녀를 한 번 더 감쌌다.
조앵기는 양왕의 품속에서 그를 두 손으로 껴안은 다음 옷깃 밖으로 머리를 슬쩍 내밀었다. 그러자 양왕의 잘생긴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썩 들어가지 못할까!”
그는 심지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안으로 꾹꾹 눌렀다.
“으윽……! 히잉……!”
조앵기는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포기한 그녀는 양왕의 품으로 파고들어 찰싹 매달렸다. 그녀는 말 머리를 등지고 그를 마주한 채 말 위에 타고 있었다.
“가자!”
양왕은 조금 경직된 채 말채찍을 내리쳤다. 십여 마리의 말들은 쏜살같이 내달리더니 이내 설원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조앵기는 안쪽으로 몸을 웅크린 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반 시진을 달리는 동안 미동도 없자 양왕은 그녀의 호흡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옷깃을 당겨 벌리더니 고개를 숙여 그녀를 힐끗 확인했다. 그녀는 그의 품에 기대어 꼭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자 양왕은 움찔하더니 소매 없는 외투를 열어젖혀 그녀를 위로 확 잡아당겼다.
“아! 흑…….”
조앵기가 앓는 소리를 냈는데, 그 모습이 새끼 고양이처럼 연약하고 가여워 보였다.
“흥!”
그녀를 들어 올린 양왕은 손으로 무게를 어림잡아 보니 전보다 훨씬 가벼운 느낌을 받았다. 너무 가벼워서 휙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다시 그녀를 자신 앞에 내려놓았는데 이번에는 방향을 바꿔 자신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도록 했다.
조앵기는 추워서 몸을 덜덜 떨다가 입을 삐죽거리더니 알아서 그의 소매 없는 외투를 끌어당겨 자신의 몸을 감쌌다. 그러고는 턱 아래 부분에 매듭을 지어 머리만 밖으로 드러내고는 멍한 눈빛을 보였다.
양왕은 얼빠진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픽 냉소를 짓더니 말채찍을 힘껏 내리치며 수하들에게 일렀다.
“이제 박주로 간다. 언동이 너는 앞에서 길을 안내하거라.”
“예.”
뒤에 있던 언동은 대답을 하더니 말을 타고 먼저 앞으로 달려 나갔다.
눈발은 점점 더 거세졌고, 잠시 후 말을 탄 사람들은 설경 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 * *
요양성이 단죄되고 요씨 가문이 전 재산을 몰수당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정선제는 여전히 위중한 상태였고 태자는 정선제를 대신해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바로 경위영 대장이었던 오일의를 해임하고 주운환에게 정1품 경위영 대장직을 맡긴 것이었다. 그리하여 주운환은 경위영의 8만 군사를 다스리게 되었다.
경위영의 업무는 도성 근교에 주둔하며 수도를 지키는 일이었으니, 이제 도성의 안위가 주운환의 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날 밤, 태자는 묘언거에서 밤을 보냈다. 지금 주묘서는 회임을 한 상태였고 태자는 요즘 새로 들어온 두 명의 통방이 마음에 쏙 들었지만 더욱 중요해진 주운환의 입장을 생각해서 주묘서의 처소에서 밤을 보냈다.
삼경三更(밤 11시~새벽 1시)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밤중이라 태자와 주묘서는 당연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문을 마구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쾅쾅쾅!
“전하! 전하!”
이계의 목소리였다.
태자와 주묘서는 단잠을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깨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야밤중에 무슨 일이냐!”
그런데 또 쾅 하고 큰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이계가 곧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고, 그는 심지어 허락도 받지 않고 침실로 들이닥쳤다.
“전하……!”
“이!”
태자는 진노해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가 화를 다 내기도 전에 이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먼저 말했다.
“폐하… 폐하께서…….”
“폐하께서 왜?”
태자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런 시간에 이계가 감히 예법도 신경 쓰지 않고 경망스럽게 안으로 들이닥쳐 부황을 언급하는 걸 보니 설마… 부황이 붕어하신 걸까?’
태자는 이런 생각을 하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기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좀 아프고 괴로웠다.
“무슨 일이냐?”
반면, 주묘서는 오직 설렘과 흥분만이 몰려왔다. 황제가 죽었으니 이제 그녀가 황후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