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3화
“채 공공, 어째서 궁침에서 아바마마를 보필하고 있지 않은가? 설마 아바마마께서…….”
그리 말하던 태자는 낯빛이 확 변했다.
“설마, 아바마마께서……?”
“크흠. 그게 아니라…….”
채결은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허약한 상태이시기는 하나 그래도 정신이 돌아오셨습니다. 지금 진서후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자 태자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진서후, 어서 가 보게.”
“예.”
주운환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채결을 따라갔고, 상관수도 공수를 한 뒤 자리에서 물러나 다른 일을 보러 갔다.
그러자 정원에는 태자와 이계만 남게 되었다. 이계는 앞으로 다가서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방금 전 진서후의 그 표정을 보니 ‘전하를 위해 이 한 몸 다 바치고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옵니다.’ 같은 말을 꺼내려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태자는 흡족한 듯 소리 내 웃으면서도 말없이 득의양양한 눈빛만 번득였다.
이계의 말대로였으나 이런 말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었다. 주운환은 일국의 대장군이고 지금 천자는 아직 자신이 아니라 정선제이니 말이다.
부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서로 속내를 잘 알고 있으니 그거면 충분했다.
“역시 전하께서는 현명하십니다. 모든 증거가 진서후를 가리키고 있어 저희조차도 믿게 되었는데… 전하께서는 의심하면서도 여전히 진서후를 위로하셨습니다.”
이계가 태자를 추어올리자 태자는 품위 있는 얼굴에 의기양양한 기색을 내비쳤다.
“제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런 지모智謀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태자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운환이 뛰어난 인재이기 때문에 주묘서를 측비로 들인 것 아닌가.
그리고 주운환은 이미 자신에게 포섭된 상태였다. 태자는 자신이 힘들게 포섭한 사람이 허무하게 끝장나 버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번 일을 통해 주운환은 완벽하게 내 사람이 되었으니 더는 뒷일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정선제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보아하니 요 며칠이 한계일 것 같았다.
그리고 요양성은 죄를 지었으니 자신이 제위에 오르면 태자비를 바로 폐위하고 주묘서를 황후의 자리에 앉힐 것이다. 나라를 안정시키는 주운환이라는 인재도 있으니 그야말로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이다.
태자가 이렇듯 꿈에 젖어 있는 동안, 주운환은 정선제의 궁침에 들어가 문안을 드린 후 이렇게 말했다.
“폐하, 석씨 일가는 요양성에게 미혹되어 그자에게서 천 냥을 받았습니다. 이는 부정한 돈이옵니다.”
이에 정선제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짐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천 냥은 그들의 진실함과 충성심을 봐서 상으로 주도록 하여라.”
“예, 하지만 소신이 보니 석씨 일가는 사는 게 녹록지 않아 보였습니다. 하여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구휼금으로 천 냥을 더 주고자 하옵니다.”
“네 뜻대로 하거라!”
정선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주운환은 인사하며 재차 공수했다. 그때 석씨 일가에게 주겠다고 약조했던 돈을 이제 떳떳하게 줄 수 있게 되었다.
주운환은 정선제와 이야기를 좀 더 나눈 후 그곳을 떠나갔다. 그러자 정선제의 궁침에는 순식간에 정적만이 흘렀다.
잠시 후, 유일하게 곁에 남아 그를 보필하고 있던 채결이 운을 뗐다.
“참, 얼마 전에 용효를 도성 밖으로 파견했습니다. 폐하, 도로 불러들일까요?”
“용효라… 캑캑. 뭘 하러 도성 밖으로 나갔다는 말이냐?”
정선제는 병마에 시달려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폐하, 잊으셨습니까? 당시 여러 증거가 갖춰지자 폐하께서… 크흠, 용효를 도성 밖으로 파견해 진서후의 생모 일을 조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일의 진상이 밝혀졌으니 다시 도성으로 불러들이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채결이 순간 망설이다가 끝까지 고하자 정선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뗐다.
“네 말은…….”
“아!”
이때, 누군가가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그러자 덩달아 크게 놀란 채결이 고개를 홱 돌리며 외쳤다.
“누구냐!”
소리를 낸 사람은 젊은 여인이었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호박색 바탕의 고급 비단으로 만든 짧은 적삼과 금실로 수를 놓은 푸른색 계열의 마면군을 입고 있었다. 칠흑같이 검고 숱 많은 머리카락을 둥글게 감아 올려 독특한 느낌이 나는 번도계翻刀髻로 만든 그녀는 외모가 부드럽고 얌전해 보였다.
“갈란군주?”
채결은 얼떨떨해져 그녀를 불렀다.
이 사람은 바로 불운하게도 요절해 버린 정선제의 차남 평왕이 남긴 유일한 혈육, 갈란군주였다.
갈란군주는 평왕이 열네 살 때 궁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로 정선제의 첫 손주였다. 또한 평왕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혈육이기도 하여 정선제는 그녀를 아주 예뻐했다.
갈란군주는 안으로 들어오더니 정선제에게 예를 올렸다.
“할바마마를 뵈옵니다.”
“캑캑… 네가 왔구나. 하지만 짐은 조용히 쉬고 싶단다.”
정선제는 정말로 조용히 쉬고 싶었다. 병으로 인한 통증 때문에 너무도 고통스러운 탓에 그 누구와도 한담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전 그저 할바마마를 뵙고 싶어 왔을 뿐입니다.”
이리 답하는 갈란군주는 낯빛이 조금 창백했다.
“방금 전에 문 앞에 도착했는데 할바마마와 채 공공이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 내용을 듣게 되었습니다.”
정선제는 기침을 하며 손을 가로저었고 그의 뜻을 알아챈 채결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비밀 같은 게 아니니 군주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시 주운환은 혐의가 있었으니 당연히 사람을 파견해 사건의 경위를 조사해야만 했다. 이는 본래 삼사가 해야 하는 일이며 공개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일이었다. 한데 정선제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자신이 직접 사람을 파견한 것뿐이니 별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할바마마.”
갈란군주는 떠나지 않고 침대 머리맡에 놓인 수돈 위에 앉더니 이렇게 말했다.
“제가 쓸데없이 참견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왕 사람을 파견한 김에 계속 조사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진서후는 우리 대제를 떠받칠 동량입니다. 그런데 지금 누군가가 이 약점을 이용해 그를 모해하려고 했으니 또 그러지 말라는 보장이 없사옵니다. 차라리 미리 분명하게 조사해 놓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럼 나중에 누군가가 이를 빌미로 말썽을 부리려 하면 바로 반격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자 정선제와 채결은 멍한 표정을 지었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정선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란이가 아주 지혜롭구나… 캑캑…….”
채결도 미소를 지으며 동조했다.
“군주의 말씀이 일리가 있사옵니다.”
“쿨럭. 란이에게 상을 내리거라.”
정선제의 명에 채결은 그리하겠다 대답하고는 바로 방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쟁반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쟁반 위에는 옥여의 하나와 벽옥 벼루 두 개가 올려져 있었다.
갈란군주는 미소를 지으며 이것들을 건네받았다.
“할바마마,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군주께는 항상 폐하를 위한 마음뿐이시군요. 하지만 이 일을 밖으로 발설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반드시 비밀을 엄수하셔야 하옵니다.”
“알겠네.”
갈란군주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채결은 그녀와 한담을 좀 더 나눈 후 그녀를 돌려보냈다.
* * *
요양성의 분탕질이 해결되자 대제를 뒤덮고 있던 검은 먹구름도 걷히며 맑게 갠 화창한 날씨가 찾아왔다.
흰 구름이 떠 있는 푸른 하늘 위로 검은 빛깔을 띤 매 한 마리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 아래, 한없이 넓은 설산 사이로 십여 명의 사람들이 말을 탄 채 눈이 소복이 쌓인 길을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한없이 넓은 설산에는 냉랭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선 또 작은 눈송이가 떨어졌다. 마치 하얀 눈으로 가득한 이곳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다른 색채마저 전부 뒤덮어 버리려는 것처럼 말이다. 십여 명으로 이루어진 무리는 이곳에서 무력하고 취약해 보였다.
무리를 이끄는 양왕은 깃을 위로 세우고 소매가 없는 검은색 외투로 몸을 꽁꽁 감싸고 있었고, 머리에는 외투에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매력적인 두 눈만 밖으로 드러낸 모습이었다.
도성을 떠난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갔다. 떠날 때 양왕은 3백여 명의 부하를 데리고 왔는데 도성에서 그를 죽이려고 파견된 사람들에게 속속 당해 이제 고작 열다섯 명만이 곁에 남아 있었다.
이때, 하늘에서 검은 매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그의 팔 위에 내려앉았다.
양왕이 매의 다리에 묶인 편지통을 풀은 뒤 팔을 휘두르자 매는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
이때, 그의 앞에 덮여 있는 커다란 외투 속에서 조그만 머리 하나가 밖으로 나와 두리번거리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다시 풀 죽은 모습으로 안으로 쏙 들어가서 그의 가슴팍에 기대었다.
양왕은 서신을 펼쳐보더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기뻐하는가 싶었으나 이내 다시 표정이 음랭하게 변했다.
“전하.”
그의 뒤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나이가 적지 않아 보이는 이 사내는 바로 양왕의 참모이자 주운환의 스승인 주 선생이었다.
“도성에서 보내온 서신이옵니까?”
“그렇네.”
양왕이 고개를 주억이자 주 선생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양왕이 도성을 떠났지만 도성 안에는 여전히 그의 밀정들이 있어 도성에서 무슨 큰일이 생길 때마다 그에게 서신을 보내왔다.
하지만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면 괜히 주군의 위치만 발각될까 봐 염려되어 최대한 서신을 적게 보내려고 했다.
그러니 서신이 왔다는 건 도성 안에 뭔가 큰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였다.
“가자!”
양왕은 그리 말하며 말채찍을 힘껏 내리쳤다.
“쉴 곳을 찾게 되면 다시 상의하자꾸나.”
“예.”
주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을 살폈다.
“바람과 눈이 멈추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날도 곧 어두워질 테고요. 적당한 곳을 찾아 일단 야영하며 쉬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아직 건량乾糧도 좀 남아 있으니 일단 오늘밤이 지난 후에 다시 이야기하시지요.”
그 말을 들은 양왕은 자기 가슴 앞에 놓인 불룩 튀어나온 봇짐 위에 손을 올렸는데, 옷 위로도 몹시 뜨거운 느낌이 전해졌다.
그의 품으로 파고든 그녀의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호흡 또한 거칠었다. 이를 느낀 양왕의 고혹적인 얼굴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