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2화
그로부터 얼마 있지 않아 운하는 정말 약속대로 그에게 약을 보내 주었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두 사람은 더는 사적인 만남을 갖지 못했다.
그러니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서 그는 인생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과객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그의 인생을 환하게 밝혀 준 밝은 빛이었다.
그의 삶도 그녀가 지어 준 이름처럼 밝고 아름다워져 앞으로 그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모두 견뎌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랬는데, 공주가 궁에서 쫓겨나고 그리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될지 그 누가 알았으랴.
명휘는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또다시 빛을 잃게 됐음을 죽어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방법을 강구한 끝에 죽은 척을 해서 궁을 빠져나갔지만, 아무리 수소문을 해도 끝끝내 그녀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후 그는 피난민들을 모아 세력을 형성했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진서후가 나타나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
‘그런데 지금 진서후의 모습을 보니…….’
욱휘가 이렇게 공주와 진서후의 외양을 곱씹고 있는데, 금위군들이 죄인들을 포박하여 한 명씩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폐하! 폐하!”
상석의 정선제는 비적들과 요양성에게 처벌을 내린 후 바로 혼절하고 말았다.
태자 등은 깜짝 놀라 얼른 앞으로 달려나왔고 채결이 정선제를 부축해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조정 신하들은 그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태자가 정색을 하며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다들 자신이 해야 할 일이나 제대로 하시오.”
조정 신하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선제가 정말로 당장에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보니 그들은 태자에게 더욱더 경외심이 들었다.
태자는 장찬과 반지명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명했다.
“대리시경과 반 어사는 가서 남아 있는 증거와 세부적인 부분을 조사하시오.”
“예.”
장찬과 반지명은 앞으로 한 걸음 나와 공수하고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태자는 이번에는 상관수를 쳐다보며 명을 내렸다.
“상관 대장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요부姚府를 봉쇄하고 밖에 있는 요씨 가문 사람들도 모두 요부로 불러들여 폐하의 처분을 기다리라고 하시오.”
“예.”
상관수는 공수한 뒤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고, 대전을 나온 그는 수하들을 데리고 맹렬한 기세로 궁을 나섰다.
* * *
한편, 오늘 대전에서 진서후를 심문한다는 걸 안 백성들은 궁 밖에 모여들어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주루들은 이 사건에 관심이 있는 백성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장박원은 그중에서도 전망이 가장 좋은 주루 안에 앉아 있었다. 그는 창가에 기대어 앉아 여유롭게 차를 따르고 있었고 탁자 위에는 술과 안주가 가득 차려져 있었다.
그는 지금 궁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어쩌면 황제가 진노하여 금위군에게 주운환을 끌어내라고 한 뒤 당장 참형하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지.’
장박원은 생각하면 할수록 흥분이 밀려왔다.
“어어. 나왔다! 나왔어!”
갑자기 누군가가 놀라 크게 소리를 쳤다.
장박원이 얼른 창문 밖을 내다보니 상관수가 두 줄로 선 금위군들을 이끌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궁문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들 검은색 정복正服을 입은지라 모습만으로도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장박원은 금위군이 주운환을 끌고 나와 사람들 앞에서 참수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자 속으로 실망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저들이 분명 진서후부에 가서 가산을 몰수할 거라는 생각이 들며 정신이 번쩍 났다.
장박원이 그 광경을 자기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자 진서후부에 가려는 찰나, 아래층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보니 십여 명의 금위군들이 안으로 들이닥치더니 2층으로 뛰어 올라온 게 아닌가. 공손히 허리를 숙인 채 그들을 안내하는 점원이 이렇게 말했다.
“나리들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지금 저쪽 매화 귀빈실에 있습니다.”
점원은 그리 말하며 금위군들을 이끌고 2층 대당을 지나갔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놀라움과 흥분을 동시에 느꼈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금위군들이 자기들 쪽으로 걸어오자 얼른 길을 내주었다.
“비키시오! 비키란 말이오! “죄인의 가족이 이곳에 있고, 우린 명을 받아 그들을 체포하러 온 거요.”
금위군들 중 한 명이 냉랭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아이고. 정말로 진서후가 단죄되었나 보구나. 한데 그 가족들이 이곳에 있다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한 영감이 아이고 소리를 내자, 옆에 있던 한 노파가 상심한 얼굴로 한탄했다.
장박원은 한껏 흥분하여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직접 진서후부에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수고를 덜게 될 줄이야. 지금 체포하려는 사람은 누굴까? 아, 분명 엽연채겠구나.’
상대를 추측한 장박원은 흥분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오늘 대전에서 심문이 있다는 이야기에 자신조차도 이곳에 와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내인 엽연채는 당연히 왔을 것이었다.
“어, 나왔다! 에엥? 어떻게 된 거지?!”
그런데 앞에 있던 백성들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게 아닌가. 고개를 내밀고 그쪽을 쳐다본 장박원은 뻣뻣하게 경직되고 말았다.
끌려 나온 사람은 노란색 배자를 입고 화려하게 치장을 한, 웬 환갑 가까이 되어 보이는 노부인이었다. 좀 낯이 익긴 했지만 누구인지 단박에 떠오르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이 사람은… 엽연채가 아니지 않은가?’
장박원은 노부인을 결박해 이쪽으로 걸어오는 금위군들에게 황급히 물었다.
“저기 형님들, 이 노부인은 누굽니까? 설마 진서후의 할머니입니까?”
그러자 그중 한 명이 퉤 하고 침을 바닥에 갈기더니 이렇게 대꾸했다.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요! 이 여인이 어떻게 진서후의 할머니겠소. 진짜 진서후의 할머니라고 해도 우리는 그분을 잡을 수 없소.”
“그럼 왜 이 노부인을 잡아가는 겁니까……? 이 사람은……?”
장박원은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 사람은 요 상서의 아내이자 태자비의 생모인 진씨요. 방금 전에 대전에서 심문하여 진서후가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 밝혀졌소.
요 상서 그 사람은 정말… 퉤, 상서는 무슨! 요양성이 비적 떼와 결탁해 동우산에서 진서후를 살해하려고 했는데 실패로 돌아가자 또 비적 떼와 범행을 공모했다고 하오. 여러 증거와 증인들이 나타나면서 마침내 사건의 전말이 명확히 밝혀졌소. 진상이 낱낱이 드러나면서 진서후의 결백도 증명됐고.
하여 황제 폐하께서 요씨 가문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일가족을 참형에 처하라고 판결을 내리셨소!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말라고 하셨단 말이오.”
이로써 전말을 알게 된 백성들은 다 함께 환호성을 질렀고 손뼉을 요란하게 쳤다.
“잘됐네, 잘됐어! 우리는 진서후가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 충신을 모함하는 간신은 다 죽어 버려야 돼!”
반면 장박원의 머릿속에는 쾅 하고 굉음이 울려 퍼졌다. 순간 뇌리가 백지장처럼 하얘진 반면에 안색은 숯처럼 시꺼메졌다. 좋아라 웃고 떠드는 백성들의 모습을 그가 어찌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정신없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 자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이후, 금위군들은 요 노부인을 체포해 집 안에 가둬 놓은 후 요씨 가문 저택을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상관수는 요씨 가문 사람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체포된 것을 확인한 뒤 이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궁으로 돌아갔다.
* * *
그 시각 황궁 안.
정선제는 침상 위에 누워 있었고, 태자와 정 황후, 노왕 등은 침상 곁을 둘러싼 채 다들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나 의정은 정선제 몸에 꽂혀 있던 바늘을 하나하나 뽑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정, 아바마마는 어떤가?”
태자가 황급히 물었으나 나 의정은 깊은 한숨과 함께 재차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하아…….”
그에 태자 등은 낯빛이 확 변하더니 침상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태자의 애통한 외침에 정 황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운을 뗐다.
“요 며칠 동안 분명 상태가 좋으셨는데 지금은 왜 갑자기…….”
나 의정이 몸을 굽히며 대답했다.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면… 며칠 동안은 정신이 아주 또렷해지기도 합니다…….”
“이 돌팔이가!”
정 황후는 화가 나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 의정은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고 노왕이 그런 그를 변호해 주었다.
“어마마마…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쇠약해집니다. 나 의정은 이미 최선을 다했습니다.”
“폐하… 폐하……!”
그에 정 황후는 감정을 주체 못하고 정선제의 몸 위에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때, 이계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전하, 상관 대장이 돌아왔습니다.”
태자는 그제야 눈물을 닦으며 이계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태자가 나오자 상관수는 공수하고 상황을 보고했다.
“소신, 이미 요씨 가문 저택을 포위했고, 그 집안 상전들이 모두 잡혀왔는지 빠짐없이 확인했사옵니다.”
“알겠네.”
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나운 눈빛을 번득였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이계에게 물었다.
“진서후는?”
“대전 밖에 있사옵니다. 소인이 어서 가서 불러오겠습니다.”
이계는 밖으로 뛰어나갔고 잠시 후 주운환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를 뵈옵니다.”
주운환이 예를 올렸다.
“진서후,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네.”
태자는 앞으로 다가가 주운환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난 자네가 결백하다고 계속 믿고 있었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신도 알고 있사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소신을 억울하게 만들어도, 그들이 제아무리 증거가 충분하다는 말을 해도 전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신을 믿어 주셨습니다……. 소신을…….”
태자는 감격해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더니 감정이 격양되어 저도 모르게 또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 역시 진서후의 마음을 잘 아네! 그러니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어.”
주운환과 태자는 서로 눈을 마주쳤고 이어 태자는 ‘하하’ 너털웃음을 지었다.
“금위군들이 이미 요씨 가문 저택을 포위하고 있네. 진서후, 내 잠시 후 자네가 성지를 받들어 직접 요씨 가문에 가서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게 할 것이네!”
“예.”
주운환은 얼른 명을 받들었고 옆에 있던 상관수는 깜짝 놀라 숨을 헉 들이켰다.
가산을 몰수하는 건 짭짤한 수익이 보장되는 일이었다. 한 가문의 실정이 어떠한지, 얼마나 많은 재산을 몰래 숨겨 놓았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 공개적인 장부만 제출하고 나면 요씨 가문에서 개인적으로 몰래 숨겨 놓은 것들은 가산을 몰수하는 관리가 가져가게 된다.
황제와 태자도 당연히 이 점을 알고 있으니, 가산을 몰수하러 누구를 보낸다면 그 사람에게 하사품을 내리는 것과 다름없는 셈이었다.
“전하.”
이때, 채결이 태자를 부르러 나와 몸을 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