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1화
조정 신하들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잇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비적 하동의 손에서 얻어 낸 그림은 요양성이 수사해서 얻어 낸 것이었고 그가 직접 황제에게 바친 것이었다.
증거들이 전부 주운환이 요양성을 모함하려고 일부러 응연송묵을 사용해서 준비한 거라면, 어째서 소전이 직접 그렸다는 그림도 같은 먹을 사용해 그렸단 말인가? 설마 들통날 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들통날 걸 예상했다면 일부러 자신을 나락으로 빠뜨릴 이유가 어디 있는가?
반편이나 이런 짓을 할 것이다.
그러니 이로써 요양성이 주운환을 모함하려고 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동우산의 일이 실패로 돌아가고 감옥 안에 갇힌 비적들이 그의 정체를 불까 봐 요양성이 비적들을 구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또한 실패로 끝날까 봐 대안을 남겨 두었는데, 그 대안이란 게 바로 주운환이 석소전을 사주해서 잔당들을 이용해 비적들을 구출하려 했다고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과연 비적들을 구출하는 게 실패로 끝나자마자 그는 그 수를 썼다.
정말 한 단계씩 교묘하게 짜 놓은 계략이었다. 전 단계와 다음 단계가 긴밀히 맞물려 상대를 사지로 몰아가는, 몹시도 음흉하고 악랄한 계략이었다.
“하, 아주 대단하십니다! 장인이 이런 분인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요.”
바로 그때, 태자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그는 일부러 이 순간 요양성을 ‘장인’이라고 불렀다. 그러고는 실망으로 가득한 얼굴로 거듭 분통을 터트렸다.
“태자비가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부부간의 정을 생각해 지금껏 폐위하지는 않았습니다. 요씨 가문과의 정도 염두에 두고 있었지요. 그런데 잘못을 저지른 건 분명 태자비인데 요씨 가문은 반성하기는커녕 진서후에게 분개하여 이런 악랄한 짓을 벌였습니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요양성은 어둡게 착 가라앉은 얼굴로 태자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저 짐승 같은 놈. 가식적인 자식! 태자비를 폐위하지 않은 건 분명 옛정을 생각하는 척하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그런데 지금 이렇게 말하니 꼭 진심처럼 들리는구나.
하, 그렇게 옛정을 생각했다면 주묘서가 태자비를 억누르는 걸 내버려 두었을까. 애초에 주묘서를 측비로 들이는 일부터 없었을 테지.’
“요양성!”
요양성이 치를 떠는데, 상석의 정선제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아직도 할 말이 더 남았느냐?”
화가 날 대로 난 그는 분노의 힘 덕분인지 마침내 완벽한 문장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었다. 요양성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끝까지 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폐하, 폐하. 소신은 억울하옵니다! 소신은 정말 억울하옵니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무력하기만 했다. 더욱이 뒤에 있던 비적들은 몸에서 힘이 쭉 빠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이 상황이 탐탁지 않은 홍광수는 악다구니를 쓰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황제 놈! 넌 곱게 못 죽을 게다! 곱게 못 죽을 거야!”
욱휘도 이를 악물며 속으로 원한을 불태웠다. 딱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대제에서 가장 유능한 무장을 제거할 수 있었다.
‘딱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이 빌어먹을 황제 놈아! 주운환은 내 외손자다!”
욱휘가 거리를 재는 동안, 홍광수는 정신줄을 놓은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주운환! 내가 네 외조부다! 그래, 그래… 모두 요양성이 벌인 짓이야. 이자가 내 손자를 모함했어. 내 손자는 무고하다……! 너희가……!”
화가 나 펄쩍 뛸 것만 같은 홍광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며 큰 소리로 고함을 쳐 댔다.
홍광수의 발광에 주운환의 잘생긴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성큼성큼 홍광수 앞으로 걸어가 그를 냅다 걷어차 버렸다.
“난 외조부가 없다!”
“악!”
홍광수는 돼지 멱따는 소리로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더니 뒤에 있는 기둥에 부딪혔고 입에서 피를 뿜어내더니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주운환은 몸을 옆으로 돌려 욱휘를 내려다봤다. 욱휘는 지금 넋이 나간 상태였다. 키가 큰 그는 꼿꼿한 자세로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어 주운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눈앞의 소년은 견줄 데 없이 수려하고 화려한 외모에 타고난 맵시를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이 생김새는… 이 용모는…….’
욱휘는 처음으로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주운환을 보게 되었다. 전에 몇 번 접촉한 적은 있었지만 모두 멀리서 봤었고 그는 시력도 좋지 않아 어렴풋이 그의 형체만 봤었다. 그래서 주운환이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주운환을 본 욱휘는 어안이 다 벙벙했다. 운하 공주와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공주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줄곧 공주가 그렇게 허무히 죽었다는 걸 믿지 못했다. 그에 오랫동안 공주의 흔적을 찾아다녔지만 늘 허탕만 쳤기에, 끝내는 공주가 정말로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 사내는……. 이렇게 닮은 걸 보니 설마 공주의 아들인 걸까?’
욱휘의 머릿속에 번뜩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자신들이 어떻게 주운환을 모함했는지를 새삼 깨달은 것이다. 자신들은 주운환의 생모가 내력이 불분명하다는 흠을 이용해 그를 모함했다.
‘생모의 내력이 불분명하다면… 낙운…….’
생각을 하던 욱휘는 갑자기 쿨럭 피를 토했다.
그렇다, 이자가 바로 공주의 아들인 것이다.
주운환은 욱휘가 각혈하는 모습을 보더니 코웃음을 치고는 바로 몸을 돌렸다.
‘아니… 잠깐만……!’
욱휘는 급히 두 눈을 부릅뜨더니 주운환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직 제대로 못 봤어……. 얼굴을 한 번만 더 보면…….’
하지만 주운환은 이미 돌아섰고 정선제가 있는 방향을 향해 한 걸음씩 발을 옮겼다.
욱휘는 점점 멀어져 가는, 점점 더 흐릿해져 가는 주운환의 모습을 쳐다보며 무너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편, 상석의 정선제는 다시 자신 앞에 서 있는 주운환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죄책감이 들며 가슴속에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정녕 자신이 주운환을 억울하게 만든 것이다.
지금 이렇게 주운환을 보고 있으니 더욱더 운하와 닮아 보였다. 과연 그는 운하의 환생이었다. 어떻게 그에게 더 이상 미안한 짓을, 그를 배신하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주운환은 운하가 저를 그리워해서 환생해 곁으로 온 사람이었다. 정선제는 이런 생각을 하자 고통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에 그는 주운환을 쳐다보며 진심으로 사과했다.
“진서후… 짐이 자넬 오해했다. 짐이… 마음이 아프구나.”
그는 눈시울까지 붉혔다. 조정 신하들은 그의 말을 듣고 또 표정을 보더니 모두 깜짝 놀라 기함하고 말았다.
‘천자가 사과를 하다니?’
주운환도 놀라긴 마찬가지라 그저 고개를 숙이고 공수했다.
“소신이 폐하께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이게 다 음흉한 간신 때문이옵니다. 폐하의 병이 위중한 틈을 타 빈틈을 노렸던 것이옵니다.”
정선제는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운환은 자신을 탓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주운환이 분명 이렇게 나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면, 운하는 단 한 번도 그를 탓한 적이 없었으니까. 이는 소 황후의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캑, 컥! 캑캑……!”
정선제는 감정이 격양되자 기침이 계속 나왔다. 기침을 하도 해서 폐부가 다 찢어지는 것만 같았고 허리도 제대로 펴지지 않는 지경이었다.
“폐하! 폐하!”
조정 신하들은 실색해 큰 소리로 외치며 앞다투어 정선제의 상태를 보려고 했고, 이미 앞으로 한 발짝 나온 태자가 심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바마마. 이미 진상은 밝혀졌으니 어서 돌아가서 쉬시옵소서.”
“아니다…….”
정선제는 손사래를 치더니 힘겹게 한 마디 한 마디 이었다.
“짐이, 짐이 직접 저들을 처벌할 것이다……. 비적 홍광수와 욱휘, 하동은 구족을 멸한다! 그리고 요양성은… 관직을 삭탈하고 전 재산을 몰수하며 일가족을 참형에 처한다! 입추 이후에 사형을 집행할 것이다!”
말을 마친 정선제는 몸을 휘청이다가 하마터면 그대로 정신을 잃을 뻔했다.
낯빛이 하얗게 질린 요양성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아. 폐하, 아니 되옵니다……!”
홍광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발버둥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지만, 금위군 둘이 그를 바로 제압했다.
“하하하하, 이 빌어먹을 황제 놈아! 넌 곱게 죽지 못할 게다!”
욱휘는 호위병에게 제압되어 바닥에 엎드려 있었지만 여전히 고개를 쳐들고 너털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고는 듣기 흉한 말들을 하나하나 이 사이에서 짜내 듯 힘을 줘서 말했다.
“네가 하는 일마다 난관에 부딪히고 네 뜻대로 풀리지 않기를 저주할 거다! 대제가 혼란에 잠식되고 나라의 주인이 바뀔 거다! 난 이 왕조의 씨가 마르라고 저주할 거다! 그리고… 내 이름은 욱휘가 아니다. 난 명휘다!”
욱휘가 이런 저주로운 말을 정선제 앞에서 마구 쏟아내자 조정 신하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고 금위군들이 황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된 욱휘는 그저 흐릿한 주운환의 형체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명휘. 이 이름은 바로 그녀가 그에게 지어 준 이름이었다.
그는 과거 궁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어린 환관에 불과했다.
한번은 정 귀비의 궁으로 보낼 분재盆栽를 깨뜨려 매를 맞았는데 그는 미천한 환관이라 약조차 얻을 수 없었고, 다친 몸으로도 계속해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처가 너무 아팠기 때문에 한가한 틈을 타 몰래 울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기, 넌 누구니? 왜 여기서 울고 있는 거야?”
누군가의 부드럽고 아리따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청초하면서도 귀티가 흐르는 어린 여자아이가 뒷짐을 진 채 다가와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그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던 그 소녀가 바로 운하 공주였다.
“보아하니 다친 것 같은데 내가 잠시 후에 사람을 시켜 약을 보내 주마.”
운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
그때 그는 과분한 관심을 받아 기뻐하면서도 놀랐고, 그에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는 그저 허드렛일이나 하는 어린 환관에 불과하고 그녀는 지고지상한 공주인데 그런 그녀가 그에게 염려를 보였으니 당연했다.
그는 순간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방금 전 그녀가 했던 질문에 대답만 겨우 했다.
“소인은 욱휘라고 하옵니다. 눈이 항상 흐릿하여 귀비 마마의 분재를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욱휘라고?”
운하는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고개를 까딱하더니 재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욱郁이라는 글자가 좋지 않구나. 그 글자를 들으니 기분이 안 좋아지니 말이다. 앞으로는 명휘明輝라고 부르거라. 좋지 않느냐?”
그녀는 그리 말하고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