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0화
“진서후, 외람된 질문인데 이것들에 무슨 특별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채결의 질문에 주운환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정선제가 입을 열었다.
“이리 가져오너라…….”
채결은 얼른 밑으로 뛰어 내려가 주운환이 가지고 온 서신과 석씨에게서 구한 방어진이 그려진 그림 그리고 이미 형부에서 직접 제출한, 하동에게서 얻었다고 하는 방어진이 그려진 그림을 전부 정선제의 탁자 위에 하나하나 올려놓았다.
가장 왼쪽에 놓인 건 서신이었는데 귀족들이 자주 사용하는 낙도선지駱都宣紙가 꼬깃꼬깃 뭉쳐져 있었고 그것을 펴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거짓으로 도망침. 동우산東牛山으로 유인하면 지원군이 있음.」
종이도 그렇고 평범한 필체라 누구의 손에서 나온 것인지 특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탁자 중간에 있는 건 하동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바로 소전이 다시 그렸다던 방어진이었다. 종이는 풀을 원료로 만든 평범한 것으로, 농가에서 자주 사용하는 종류였다.
마지막으로 오른쪽에 있는 건 석씨의 손에서 나온 그림인데, 들은 바에 의하면 소전이 잃어버렸던 방어진 원본이라고 했고 종이는 역시 낙도선지였다.
정선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 서신과 그림들을 살폈다. 그러나 봐도 봐도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 저절로 이마에 주름이 더욱 짙게 잡혔다.
“쿨럭, 쿨럭……!”
결국 정선제는 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이렇게 명했다.
“채결아, 가지고 가서 저들에게도 보여 주거라.”
“예.”
채결은 대답을 하고서는 종이들을 쟁반에 올린 다음 아래로 가져갔다.
채결이 옆에 있는 어린 환관에게 눈짓을 하자 그는 나전을 상감한 높이가 낮은 기다란 녹나무 탁자를 가져와 대전 중앙에 놓았다. 그러자 채결이 세 가지 종이를 가지런히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정선제가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실마리가 있는지… 한번들 보거라.”
여지와 반지명 등은 서로 시선을 맞추더니 잇달아 앞으로 나와 서신과 방어진의 필체 등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유심히 살펴봤다.
그렇게 한참을 보더니 다들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정말 아무런 실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전지신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봐도 진서후가 위조한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서신과 석씨의 손에서 나온 방어진이 그려진 그림은 모두 같은 종이를 사용했습니다. 둘 다 귀족들이 자주 사용하는 낙도선지입니다.
그에 반해 하동에게서 찾아낸 방어진이 그려진 그림은 풀을 원료로 만든 품질이 떨어지는 종이를 사용했습니다. 이건 석소전이 급하게 집에 있는 종이를 사용해 기억에 의존해서 다시 한 장 그려 냈기 때문이겠지요.”
전지신은 한동안 주운환에게 아첨을 하며 잘 보이고 싶어 했지만 주운환에게 일이 생긴 후로 그리했던 걸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었다. 그래서 방금 전에도 주운환을 궁지에 모는 데 일조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주운환이 사건을 뒤집으려 하자 전지신은 주운환이 자신에게 보복할까 봐 두려워졌다. 주운환이 정말로 이 비적들과 한패이기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게 된 그는 주운환에게 죄를 붙이려고 갖은 애를 썼다.
반면, 여지는 턱을 매만지더니 이렇게 말했다.
“필적을 봐도 실마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석소전의 필적이 아닌 걸까요? 다른 누구의 필적일까요?”
그러자 이번에는 반지명이 말문을 열었다.
“일단 다른 건 차치하고 하동에게서 찾아낸 방어진 그림부터 이야기하죠. 필적 감정을 해 보니 확실히 석소전의 것과 닮았습니다. 석소전은 글을 알지만 글을 자주 쓰지는 않아서 남아 있는 문서가 아주 적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장찬이 처음으로 입을 뗐다.
“진서후는 요 상서가 사주한 거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남아 있는 이 두 가지도 요 상서가 쓴 걸까요? 지금 보니 요 상서의 필적과 닮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자 요양성이 대번에 콧방귀를 뀌며 반박했다.
“내 글자는 이렇게 못생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서신과 방어진에 쓰여 있는 글자는 그저 아주 평범할 따름이었다. 다만 요양성이 서예에 특별히 재주가 있기에 이 글자들을 못생겼다고 비웃으며 자신이 쓴 게 아니라고 강조한 것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진무가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일부러 이상하게 썼을 수도 있잖습니까. 사람을 시켜 필적을 검증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러자 여지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걸 누가 직접 쓰려고 하겠소이까?”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캑캑……. 아무 단서도 안 보이는 것이냐?”
정선제는 계속해서 기침을 멈추지 못했다.
요양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입술을 위로 끌어당겼다. 그에 반해 뒤에 있던 비적들은 다들 몸이 경직되어 있었고 석씨 등도 초조한 마음에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응연송묵凝煙松墨을 썼습니다.”
이때,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들 고개를 돌려 보니 말을 꺼낸 사람은 다름 아닌 유 재상이었다.
그래도 조정 신하들은 어리둥절해할 뿐, 그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요양성만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탁자 위에 있는 서신과 방어진 그림을 쳐다보고는 안색이 확 변했다.
“재상의 말씀이 맞습니다. 바로 응연송묵을 썼죠.”
주운환의 이 말에 정선제도 바로 반응을 보이더니 채결을 불렀다.
“이리 가져와… 캑캑… 짐에게 보여 주거라.”
채결은 얼른 뛰어 내려가 서신과 방어진이 그려진 그림들을 도로 가져왔고 정선제는 그것들을 다시금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붓과 먹에 대해 특별히 조예가 깊은 사람은 아니어서 다시 본다고 해도 응연송묵이 뭔지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주운환이 이렇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 유 재상도 이를 알아보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속에 거칠고 사나운 파도가 밀어닥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응연송묵이 뭐지? 설마 주운환이 정말로 억울한 누명을 쓴 걸까?’
정선제는 이런 생각을 하며 자연히 주운환에게 시선을 향했다.
주운환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였는데, 검붉은 화려한 의복이 바닥에 펼쳐져 있어 마치 검은 구름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준미하고 화려한 그의 용모에선 존귀한 분위기가 흘러넘쳤고 사람들은 기품을 잃지 않는 그의 모습에 탄복해 마지않는 눈치였다.
정선제도 지금 자세히 보니 그는 운하와 더욱 닮은 듯했다. 운하를 닮은 주운환이 이 옹졸하고 시건방져 보이는 비적 떼의 두목 홍광수와 대체 어디가 닮았단 말인가?
게다가 비적의 외손자라는 둥 체포했다가 다시 구출해 내려고 했다는 둥 하는 추측은 원래부터 좀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정선제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설마 자신이 주운환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단 말인가?
“응연송묵이 무엇이냐?”
그때 태자가 묻자 주운환이 답했다.
“응연송묵은 북초北楚에서 공물로 바친 먹입니다. 이 먹은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지만 아무리 품질이 낮은 종이에 써도 그대로 응고되어 번지지 않고 윤이 나며 질감이 부드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 아주 옅은 솔향기가 나는데 자세히 맡아 봐야 그 향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북초의 예대사倪大師에게서 얻은 것이옵니다.”
“맞습니다.”
유 재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보충했다.
“6년 전에 북초에서 공물로 무려 백 근의 응연송묵을 보냈습니다. 당시 폐하께서는 이를 나눠 주셨고 소신은 한 근을 받았습니다.
이 응연송묵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어떤 종이에 써도 즉시 응고되어 번지지 않는다는 건데, 소신들이 평소에 사용하는 종이는 다 좋은 것들이라 어떤 먹을 써도 이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응연송묵의 장점이 소신들에게는 그다지 두드러지는 장점이 아니었습니다. 소신들이 보기에는 보방묵寶芳墨과 산내묵山來墨이 더 나았습니다.”
유 재상이 말을 마치자 주운환이 다시 입을 뗐다.
“소신은 내자에게서 이 밀서를 건네받은 후 자세히 살펴보다가 응연송묵으로 쓰여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무부內務府로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당시 폐하께서 유 재상에게 한 근, 태자 전하와 양왕 전하, 노왕 전하와 용왕 전하 그리고 정국공鄭國公에게 각각 한 근을 하사하셨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폐하께서 쓰시려고 남겨 두셨죠.”
“아… 그……!”
채결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소인도 생각이 났사옵니다. 당시 응연송묵을 처음 접하신 폐하께서는 이를 마음에 들어 하시며 많이 남겨 두셨습니다. 그런데 사주에서 진상한 보방묵과 비교를 해 보시더니 역시 우리 대제의 보방묵이 쓰기에 더 편하다는 걸 알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무려 여든 근의 응연송묵이 남게 되었죠.
이후에 요 상서가 어서방에 오셨는데 소인이 응연송묵을 치우는 걸 보고는 지난번에 아주 잘 썼다는 말을 하셨어요. 그러자 폐하께서 남아 있는 응연송묵을 모두 요 상서에게 하사하셨습니다.”
채결이 과거 일을 언급하며 요양성을 쳐다보자 요양성은 낯빛이 창백해지더니 목소리를 떨며 항변했다.
“폐하, 소신은 억울하옵니다. 나중에 소신이 이 응연송묵을 많이 가져가기는 했지만 이건 유 재상과 정국공, 태자 전하와 양왕 전하 등 황자 전하들도 갖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그러나 주운환이 그의 말을 딱 잘라 버렸다.
“먹을 하사한 건 이미 6년 전의 일입니다. 게다가 유 재상 등은 한 근만 받으셨죠. 당시 먹을 하사할 때 폐하께서는 종이와 먹은 서예를 할 때 쓰는 것이니 모두에게 아낌없이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셔 놓아 봤자 곰팡이만 피니 그리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게지요.
그래서 유 재상과 정국공 등은 이미 먹을 다 사용했습니다. 지금 밀서를 쓰려고 해도 아직까지 먹이 남아 있을 수가 없죠.”
“맞습니다.”
진무가 때를 놓치지 않고 주운환을 도왔다.
“폐하께서 먹을 하사하신 후로 요 상서는 몇 년 동안 줄곧 응연송묵을 사용해 온 게 틀림없습니다. 쓰다 보니 너무 익숙해져서 이 먹이 특별하다는 걸 모르게 된 겁니다. 평범한 먹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그래서 밀서를 쓰든 그림을 그리든 간에 요 상서는 종이를 바꾸는 것만 기억하고 이미 너무 익숙해진, 쓰다 보니 당연시된 응연송묵을 바꾸는 건 까먹고 만 게 틀림없습니다.”
요양성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반사적으로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하얗게 질린 그는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더니 또다시 억울함을 호소했다.
“폐하, 소, 소신은 정말로 억울하옵니다……. 소신은 진서후가 어떻게 응연송묵에 대해 알게 된 건지 알고 싶습니다. 진서후는 분명 소신이 이 먹을 사용한다는 걸 알게 되자 이 먹으로 ‘밀서’라는 것을 작성하고 그림을 그려 석씨에게 건넨 것이옵니다.”
주운환은 차디찬 표정으로 억지를 부리는 그를 비웃었다.
“요 상서도 참 대단하시군요. 그럼 한번 설명해 보시지요. 비적에게서 가져온 그림에도 어째서 응연송묵으로 쓰인 글씨가 있는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