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9화
허옇게 질린 석대전은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이 틀어 막혀 있었다. 여양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입을 틀어막고 있던 천을 빼냈다. 그러자 석대전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우리는 협력한 사이예요……. 그리고 우리는 당신에게 원한이 있으니 입을 열지 않을 거예요! 또, 그 때문에라도 그 사람들은 우리를 믿을 거예요…….”
“5백 냥을 준다고 하니 부족하다며 5백 냥을 더 요구했지! 아주 욕심이 끝이 없구나!”
여양은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퉤 하고 침을 뱉더니 사납게 쏘아붙였다.
“방금 전에 내가 당신들에게 돈을 더 달라고 요구했을 때 당신들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생각해 보시지!”
그랬다. 상대의 욕심이 끝이 없으니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자는 얼굴이 종잇장처럼 허예져 버렸다.
지금 배후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일을 생각해 보니 자신들은 방금 전 심부름꾼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돈을 받았으니 지금 이 순간에는 상대의 뜻대로 움직이겠지만 알고 있는 게 너무 많았다. 자신들조차도 후환을 없애고자 했는데 권력자들은 오죽하랴.
이 일이 끝나면 그들의 말로는, 운 좋게 일이 년은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후에는 ‘뜻밖의 사고’로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목숨이 아깝지 않으면 계속 그렇게 거짓말을 하거라!”
주운환의 예리하고 무정한 눈빛이 그들에게 날아들었다.
“반대로 진실을 말한다면 내가 황제 폐하께 말씀드려 배후에 있는 사람이 너희들에게 준 돈을 너희들에게 줄 수 있다. 구휼금인 셈 치고. 그리고 일이 끝나면 천 냥을 더 얹어 줄 수 있지. 난 떳떳하게 황제 폐하 앞에서 정식으로 줄 것이다.”
“흥,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지!”
여양은 하하하 하고 시원하게 웃더니 잡고 있던 두 사람을 바닥으로 홱 밀쳐 버렸다.
“사실을 말하면 어떠한 위험도 감수할 필요가 없고 2천 냥도 얻을 수 있다. 안전하게 돈을 벌 수 있으니, 결코 밑지는 장사가 아니지!”
여양의 말을 끝으로 주운환과 그가 창문 밖으로 휙 사라지자 석씨 부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심하게 헐떡거렸다.
부자는 속으로 셈을 해 보다가 결국 주운환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미 일의 속사정을 다 알고 있는 주운환을 상대하는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었다. 괜히 목숨만 잃게 될 것이다.
반면, 이 일이 폭로되어 배후에 있는 사람이 죽게 되면 자신들은 안전해진다. 게다가 떳떳하게 돈도 받을 수 있다. 그것도 천 냥이나 더 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석씨네는 지금 대전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사주했다는 이야기를 먼저 한 다음 상황을 역전시켜 진상을 밝힌 것이었다.
주운환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상대를 설득하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본인이 처한 상황이 어떤지 제대로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그보다 더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다.
“이, 이……!”
주운환에게 밀쳐져 바닥에 엎어진 요양성은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무, 무얼 하려는 건가?”
정선제와 조정 대신들도 깜짝 놀라 두 눈을 부릅떴고 정선제는 계속해서 기침을 하며 말했다.
“캑캑…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진서후… 이곳은 조정이다! 무엄한 행동은 삼가거라!”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주운환을 가리켰다.
정선제는 이미 이 일을 주운환이 벌인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주운환이 비적의 외손자이고 그들이 한패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그가 앉아 있는 이 황좌를 뒤집으려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지금 석씨가 갑자기 말을 바꾸었고 정선제가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주운환이 돌발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자 정선제는 몹시 놀랐고 또 화가 치밀었다.
“맞습니다. 이리 방자하게 굴다니!”
전지신도 새파란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바로 그때, 진무가 얼른 격양된 목소리를 냈다.
“폐하, 누군가가 석씨 일가를 매수해 진서후를 모함하는 게 분명합니다!”
이미 다시 무릎을 꿇은 주운환이 고개를 들더니 정선제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건이 일어난 후로 소신은 단 한 번도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비적들의 말을 믿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들은 원래 소신이 추포한 자들이니 당연히 소신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칠 것이옵니다. 그러니 따져 볼 수 있는 거라곤 석씨의 집에서 발견된 증거뿐인데, 지금 석씨가 자신이 매수됐다고 증언했습니다.”
정선제와 태자는 깜짝 놀랐다. 확실히 비적들은 결국 비적이니 증거는 석씨 쪽에서 찾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석씨가 매수되어 주운환을 모함하려 했다고 자백한 상황이었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태자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요양성을 보더니 그가 주운환을 모략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잖아도 요씨 가문에 심한 편견을 갖고 있던 태자는 눈앞의 상황을 보니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앞으로 한 발짝 나와 이렇게 말했다.
“아바마마. 진서후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우선 분명하게 물어보셔야 합니다.”
“쿨럭쿨럭……!”
정선제는 통증 때문에 가슴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짐, 짐도 당연히 알고 있다……. 짐은 물어보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까 이야기를 마저 해 보거라!”
황제의 불호령에 석씨는 새파란 얼굴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매수했는지, 또 어떻게 말해야 한다고 알려 주었는지를 빠짐없이 진술했다.
하지만 주운환이 본인들을 협박한 사실은 감히 한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게 되면 주운환이 혐의를 벗는 일이 어려워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씨는 이미 주운환 편에 서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순간 주둥이를 잘못 놀려 일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면 제 활로만 더 좁아지게 될 터였다.
그의 진술을 다 들은 조정 신하들은 소스라치며 헉 소리를 냈다. 다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정선제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두 눈을 부릅뜨며 추궁했다.
“그게 모두 사실이더냐?”
“예…….”
석씨는 몸을 떨면서도 번복하지 않았다.
“평범한 백성인 소인이 어찌 감히 거짓을 고하겠사옵니까.”
“이 고얀 것!”
이때 요양성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더니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보기에는 네놈이 진서후에게 매수된 것 같구나.”
“비적들을 구출하고 소전이 비적들을 사주한 일 같은 건 형부 쪽에서 제일 먼저 나왔습니다.”
주운환이 써늘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거기다 이 일이 벌어진 후 폐하께서는 곧장 삼사에 이 사건을 조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일을 벌일 시간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지금 보니 당신들이 직권을 이용해 꾸민 연극이었군요.”
“자, 자네! 악의적인 말로 중상모략하지 말게!”
요양성은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요 상서가 절 적대시하는 걸 모르는 이가 어디 있습니까? 태자비 일 때문에 내 가죽을 벗기고 힘줄을 뽑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겠죠.”
이 말에 대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황후 자리를 놓고 태자비와 주묘서가 다투고 있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고 이 때문에 요양성과 주운환도 자연스레 원수지간이 되었다.
주운환이 이어서 말했다.
“그 때문에 요 상서는 비적 떼, 그리고 마 지부와 결탁해 날 동우산에서 죽이려고 한 겁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마 지부와 비적 떼는 실패해서 체포되고 말았지요. 일이 틀어졌으니 요 상서는 자신이 벌인 일을 비적들이 자백할까 봐 두려워 그들을 구출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실패할 것을 대비해 대안을 또 마련해 두었고, 비적들을 구출해 내지 못하자 바로 그 대안을 사용했습니다. 바로 비적 떼와 한패가 되어 날 모함하는 거였죠. 때마침 내가 군법에 따라 소전을 처벌한 일을 이용해 석씨 일가를 매수하여 날 모함한 겁니다.”
이 말이 나오자마자 조정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확실히 주운환이 비적들의 외손자라는 말과 그가 일부러 비적들을 잡아들인 뒤 다시 구출해 내려고 했다는 말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태자는 곧바로 주운환의 말을 믿고는, 새파란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그래, 그랬구나! 아주 잘하는 짓이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딸이구나. 일전에는 태자비가 직접 춘화도를 그리더니 이젠 요 상서가 충신을 모함할 줄이야.”
“이……!”
요양성은 표정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
‘저것도 사위라고!’
그는 소매를 홱 뿌리치더니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서후. 자네와 나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날 물고 늘어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증거가 있습니다.”
주운환은 그와 입씨름 따위를 벌이는 대신 품속에서 서신 한 장을 꺼냈다.
“이게 무엇이냐?”
“예, 전하. 소신을 동우산에서 죽이기 위해 범인이 비밀 모의를 하려고 마 지부에게 보낸 서신이옵니다. 당시 전서구를 이용해 서신을 전달했는데 우연히 소신의 내자가 쏜 화살에 그 전서구가 맞았습니다.”
주운환이 새로운 증거물을 제시하자 사람들은 또다시 입을 쩍 벌렸다. 특히나 허를 찔린 요양성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사라져 버린 서신이 뜻밖에도 저들의 손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요양성은 얼른 평정심을 되찾고 냉소를 지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겁니까?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진서후의 내자가 맞춘 거요? 너무 공교롭잖소이까.”
요양성뿐만 아니라 조정 신하들도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다고 생각했다.
주운환이 말했다.
“다들 들은 바가 있으실 겁니다. 음력 섣달에 제가 비적들을 소탕하러 갔는데, 그때 제 내자가 회임을 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천 리 길도 마다 않고 갑자기 절 찾아온 일에 대해서요. 바로 이 서신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자는 제가 위험에 처할까 봐 걱정이 되어 위험을 무릅쓰고 절 찾아왔던 겁니다.”
조정 신하들은 크게 술렁대기 시작했다. 진서후는 워낙 뛰어난 인물이라 그에게 아첨하고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고, 자연히 그들은 진서후부의 일거수일투족에 주의를 기울였다.
연말에 도성 밖이 뒤숭숭할 때 엽연채가 자신의 안위도 돌보지 않고 도성 밖으로 나갔던 일 역시 다들 유심히 지켜봤었다.
이때, 반지명이 나서서 주운환에게 물었다.
“이 서신이 정말로 배후에 있는 사람이 마 지부에게 보낸 거라고 해도 이 일과 연관이 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겁니까? 또 요 상서가 했다는 건 어떻게 증명할 겁니까?”
“증명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제 손에 들어온 서신과 이미 황제 폐하께 올려진, 비적 하동에게서 얻은 방어진이 그려진 그림, 그리고 석씨 손에 있는 방어진 그림이 전부 한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는 걸 충분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부 한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는 걸 증명만 한다면 바로 요 상서가 벌인 일이라는 것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주운환의 대답에 요양성은 낯빛이 확 변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