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8화
심부름꾼을 본 석대전이 얼른 더듬더듬 변명을 했다.
“무,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것이냐……! 우리는… 우리가 무슨 음모를 꾸민다는 것이냐!”
“하, 잡아떼려고 하네?”
그 심부름꾼은 허허 웃더니 건들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다 들었거든요! 당신들이 감히 진서후를 모함하려고 하는 걸요! 그분은 조정의 중신이에요. 그런데 감히 그분을 모함하려고 하다니. 그건 죽음을 면치 못할 죕니다! 구족을 멸할 죄라고요!”
석씨 등은 낯빛이 하얗게 질렸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허, 허튼소리 말거라……!”
그래도 끝까지 잡아떼려고 하는데 뜻밖에도 심부름꾼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 아까처럼 실실대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내가 다 들었거든요? 무슨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당신들에게 천 냥을 줬다고 했잖아요! 쯧쯧쯧. 고발하지 않을 테니 내게 절반을 줘요.”
석씨의 가족들은 그가 고발하지 않겠다고 하자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지만 그가 뒤에 뱉은 말에 또다시 낯빛이 싹 변했다.
어려도 낯을 가리지 않는 석구자가 대뜸 이렇게 소리쳤다.
“우리 돈이에요! 절반을 가져가겠다고 하는데, 아예 뺏어 가지 그래요!”
“하하. 어리지만 영리한 녀석일세. 좋아요, 안 줘도 돼요. 하지만… 까먹은 건 아니겠죠? 이 객줏집 안은 관리들로 가득 차 있단 사실을요. 내가 여기서 크게 소리치기만 하면 당신들의 음모는 다 탄로날 거예요.”
발각된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힌 석대전은 얼른 이렇게 말했다.
“줄게! 주면 될 거 아냐! 아버지, 줘 버리세요! 손해를 보더라도 액땜한 셈 쳐야죠!”
석씨는 얼떨떨했지만 그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그는 얼른 신발 밑바닥을 더듬거려 은표 한 장을 꺼내더니 그 심부름꾼의 손에 집어 던졌다.
“옜다! 가져가거라!”
은표를 챙긴 심부름꾼은 뛸 듯이 기뻐하며 그곳을 떠났다.
석씨의 가족들은 바로 자리에 주저앉았고 석씨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발각된 거지……. 이런……. 다행히도 돈을 줘서 쫓아 버렸지만 5백 냥이나 뺏기고 말았어.”
“제 고기와 교자가 절반으로 줄어들었어요!”
석구자는 불만스러워 입이 댓 발 나왔다.
“그런데 저자가… 정말로 말하지 않을까요?”
석씨의 아내가 불안하단 듯 운을 떼자 석씨와 석대전은 낯빛이 확 변했고 이어 석씨가 말했다.
“하긴. 저렇게 재물을 탐내는 걸 보니 마음보가 고운 사람은 아닐 게다. 저자가 말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어?”
“돈은 이미 챙겼으니 저자가 약조를 어기고 저희를 고발해 버리면…….”
석대전은 낯빛이 창백해졌다.
“설령 지금 고발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중에 돈을 다 쓰면 또 이 일을 들먹이며 우리를 협박하거나… 갑자기 우리를 고발하고 싶어진다면…….”
떠듬떠듬 말하는 그의 얼굴은 공포로 가득했다.
이렇게 나중을 생각해 보니 분명해졌다. 방금 그자를 그렇게 순순히 놓아주면 안 됐다. 돈을 받았으니 당분간이야 조용히 지내겠지만 이후에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석씨가 매서운 눈빛을 번득이는 찰나, 석대전이 또다시 입을 뗐다.
“아니면… 저희가 그자를 불러서… 지금 이 객줏집은 관리들로 가득 차 있으니…….”
뒷말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아도 뻔했다. 만약 이런 때에 고용인 하나가 실종된다면, 객줏집에서도 어떤 관리가 한 짓이라고 생각해 감히 따지고 들려고 하지 않을 것이었다.
석대전과 석씨는 서로 눈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상대의 눈에서 살의를 보았다.
석씨는 아내를 보더니 조금 떠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늦었으니 당신은 춘란이와 구자를 데리고 가서 이만 자게.”
“알겠어요.”
석씨의 아내는 대답을 하고는 손자를 데리고 며느리와 함께 방에서 나갔다.
석대전은 식구들을 문밖으로 데려다준 뒤 다시 대당大堂으로 달려왔다.
객줏집 주인 등은 이미 잠들어 있었고, 방금 전 그 심부름꾼은 야경을 맡았는지 팔선상에 앉아서 턱을 괸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석대전은 가슴이 조마조마했지만 다섯 식구의 목숨이 제게 달려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앞으로 다가가 그자에게 말을 붙였다.
“이봐, 아우. 발 닦을 물 좀 방으로 가져다주게.”
그 심부름꾼은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헤헤 웃으며 흔쾌히 말했다.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석대전은 방으로 돌아갔고 석씨와 함께 두꺼운 솜이불을 들고 탑상 위에 앉아 사람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더니 그 점원이 발 닦을 물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형님, 방금 전에 생각해 봤는데 5백 냥은 너무 적은 것 같아요!”
석씨와 석대전은 사나운 눈빛을 번득였다. 과연 욕심이 끝이 없는 인간이었다.
지금에야 돈으로 입을 막았다고 해도 나중에 돈을 다 쓰고 나면 또다시 협박하며 돈을 더 내놓으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럼 자신들은 평생 이자에게 돈을 갖다 바치느라 등골이 휠 것이었다.
“하하. 알겠네. 돈은 전부 자네에게 줄 테니 고발하지만 말아 주게나.”
석씨는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애썼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걸 억제할 수 없었다. 두 사람도 이런 일을 해 보기는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하. 역시 영감님이 눈치가 있으시네요.”
심부름꾼은 대꾸와 함께 탁 소리를 내며 발 닦을 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석대전은 그가 허리를 굽히는 틈을 타 ‘하앗’ 소리를 내며 두꺼운 솜이불로 덮치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대가 몸을 옆으로 기울여 손쉽게 피해 버렸다.
“아니, 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부자는 자신들의 계획이 들통났다는 생각에 낯빛이 확 변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금 망설이던 석씨가 결연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대전아!”
부자는 냅다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심부름꾼은 이번에도 잽싸게 피하더니 오히려 혼자서 두 사람을 수월히 제압했다.
“하, 감히 이 몸에게 덤비다니!”
“이, 이…….”
심부름꾼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반면, 석씨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이때,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객줏집의 창사窗紗가 걷혔다. 부자는 갑작스레 바람이 불어오자 깜짝 놀라 고개를 홱 들어 올렸는데, 그 순간 뻣뻣하게 경직되고 말았다.
보니 대체 언제부터 있었는지, 창틀 위에 웬 사내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빨간색 테두리를 두른 검은색 화려한 포복을 입은 그는 금색 연꽃과 구슬로 장식된 관冠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하늘에 홀로 떠 있는 달처럼 시린 느낌을 풍겼지만, 눈썹꼬리와 눈꼬리에는 그윽하면서도 매력적인 분위기가 담겨 있었고 살짝 위로 올라간 붉은 입술 역시 고혹적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아주 존귀해 보이지만 동시에 앉아 있는 자세에서 씩씩하고 호방한 기세가 느껴지는 사내였다. 그가 다리를 꼬자 검은색 화려한 의복이 촤르륵 펼쳐지며 마치 검은 물결이 출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상대를 압도할 만큼 대단한 기세를 풍기면서도 우아하고 고귀한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너희 같은 것들도 화근을 뿌리 뽑고 사람을 죽여 입막음을 해야 한다는 걸 아는구나.”
그 사내는 붉은 입술을 씩 당기며 조롱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의 용모와 풍채를 보고 멍해졌던 부자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고 그가 한 말을 한발 늦게 이해하고는 낯빛이 싹 변했다.
“무,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겁니까……! 우리는…….”
“그래, 너희는 악인을 도와 나쁜 짓을 벌이려고 했지. 조정의 중신을 모함하려고 했고 간신배를 도와 대제의 수호신을 죽이려고 했다! 이건 죽음을 면치 못할 죄다! 내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너희 스스로 잘 알겠지. 그렇지 않으면 발각될까 봐 덜덜 떨지 않았을 테니.”
두 사람을 손쉽게 제압한 심부름꾼이 냉소와 함께 다시 한번 콕 짚었다. 정곡을 찔린 부자는 낯빛이 창백해졌고 입술도 파르르 떨었다.
석씨는 두 눈을 부릅뜨더니 이렇게 물었다.
“다, 당신은… 누굽니까?”
물으면서도 실은 그가 누구인지 이미 짐작이 갔다. 이 특별한 외양과 분위기는 전에 소전이 말했던 ‘그 사람’과 매우 흡사했다.
“내가 바로 진서후다.”
주운환이 싸늘한 목소리로 신분을 밝히자 이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부자는 맥이 탁 풀리더니 하마터면 바닥에 납죽 엎드릴 뻔했다.
“당신이 바로 소전을 죽인……!”
그러나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다음 순간, 석씨는 성난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이 살인마! 내 아들을 살려 내!”
“영감도 젊었을 때 징병에 응해 군대에 들어갔다고 들었네.”
주운환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전장에 나가 봤던 사람인데 설마 군율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그러자 석씨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순간 아무 말도 감히 꺼내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석대전이 부친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뭐, 뭘 하고 싶은 겁니까?”
“걱정 말거라. 난 너희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벌벌대는 그를 향해 주운환이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희들이 도중에 죽는다면 도성 사람들은 필시 내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너희들을 죽여 입막음을 했다고 생각하겠지.”
“당신들, 지금 보니 한패였구나.”
석대전은 심부름꾼과 주운환을 한 번씩 쳐다보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에 심부름꾼은 헤헤 웃더니 모자를 벗었다.
“정답이야!”
여양이 비웃듯 말을 받자 석씨는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눈알을 굴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흥, 우, 우릴 놔줘!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진서후가 사람을 죽여 입… 웁웁……!”
두 사람이 한패이고 눈앞에 서 있는 자가 그 진서후라고 해도, 소리만 지르면 끝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상황에서 진서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줄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석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양이 그들의 입을 틀어막았고, 둘은 두 눈만 치켜뜬 채 겁에 질린 얼굴로 주운환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보니 주운환의 무정한 눈빛이 두 사람의 얼굴에 향해 있었다. 그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방금 전에 너희들도 사람을 죽여 입막음을 하려고 하지 않았느냐? 아는 게 너무 많기 때문이었지. 지금은 돈에 매수되어 너희들 뜻대로 행동하겠지만 언제 또 돈을 위해 이 일을 폭로할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을 터.
너희들조차도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희들을 매수한 검은 옷을 입은 사람과 조정 대신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허를 찔린 부자는 순간 소스라쳤고, 이어 종전보다도 더 온몸을 떨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