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7화
그때 등우안이 나서서 말했다.
“며칠 전에 저희가 석씨의 집을 찾아가 석소전이 살해된 사실을 전했습니다. 이 노부부는 크게 상심했고 범인을 응징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한 후에 저희는 석소전이 명절에 집으로 돌아와 무슨 일을 했는지 물어봤습니다…….”
“저희 아들이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석씨는 너무도 가슴이 아픈지 허허 웃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구월에 소전이가 진서후와 함께 서남에서 돌아왔는데 그때 얼마나 흥분해 있었는지 모릅니다. 진서후가 자신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지, 자신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신이 나 재잘재잘 말해 줬습니다. 누가 보아도 앞날이 아주 밝았었죠!
그런데 이번 명절 때 집에 와서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더군요. 저희 노부부에게 남몰래 큰돈도 주었습니다. 무려 은화 3백 냥이었죠! 소인들은 깜짝 놀라 전이에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애는 전쟁터는 아주 위험한 곳이라 앞날을 예측할 수가 없고 언제든지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으니 그 때문에 이 돈을 진서후가 하사했다고 했습니다. 그 돈을 저희에게 주면서 자기가 타지에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어도 소인들이 삼시 세끼를 해결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진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때 소인들은 그저 소전이가 걱정이 많은 것이라고 치부하고 깊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관리분들이 질문을 했을 때 다시 떠올려 보니 그제야 알게 되었사옵니다. 그때 소전이는 분명 진서후의 명령을 받아 비적들을 구출하는 일을 맡았어야만 했던 겁니다.
전이 그 어리석은 놈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하지 않으면 진서후가 소인들을 해칠 거라고 생각해 명령을 따른 것입니다. 소전이는 일이 끝나면 진서후가 분명 자신을 죽여 입막음을 하리라는 걸 알고는 소인들에게 돈을 남겨 줬던 것이옵니다…….”
석씨는 그리 말하며 눈물을 훔쳤고 석씨의 아내는 얼굴을 가린 채 침음성을 흘렸다. 옆에 있는 어린 손주도 조부모를 따라 눈물을 흘렸다.
주위에 있는 조정 대신들은 그들을 동정하는 마음에 잇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진무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말은 그저 추측에 불과하옵니다.”
그러자 정선제가 또다시 싸늘한 눈으로 진무를 쓱 쳐다봤다.
진무는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정선제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에서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렇게 됐으니 차라리 소신껏 나가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예, 대인 말씀대로 확실히 이건 저희 추측에 불과했습니다. 이 물건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말이죠…….”
석씨가 눈물을 닦으며 이 말을 보태자 등우안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동조했다.
“맞습니다. 소신 등은 석씨 집안 사람들에게 질문을 마친 후 집에서 증거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해 낙담하던 찰나, 여기 이 아이가 종이뭉치를 가지고 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다가가 종이뭉치를 확인해 보니 바로 방어진이 그려진 그림이었습니다!
저희도 그땐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방어진은 비적들에게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랬으니 최종적으로 폐하의 탁자 위에 올라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이런 생각들을 했지요. 그래서 석씨에게 물어보니 석소전이 이 종이를 찾았었다고 했습니다.”
석씨는 울면서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날 저녁 소전이가 집으로 돌아와 소인들에게 은화를 건넨 후 갑자기 소인들을 모두 불렀습니다. 서신 한 장이 안 보인다며 누군가 자기 방에서 가져간 게 아니냐고 묻더군요.
말도 안 되지요. 소인들은 전부 농부들이라 글자조차 읽지 못하는데 그 애의 서신을 뭐 하러 가져가겠습니까! 그때 손주도 가져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촉박해서 그랬는지 결국에는 전이는 방으로 돌아가 종이를 꺼내 자기가 한 장 더 그리더군요. 소인이 뭘 그리는 거냐고 물었더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소인이 뭘 알겠습니까? 그저 그 아이가 알아서 하게 놔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이는 그림을 다 그린 다음에 바로 떠났고, 그 후에도 소인들은 원래 있었다던 서신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여기 관리분들이 찾아오신 날 손주가 그 서신을 가지고 놀고 있던 걸 보게 된 겁니다.
손주를 추궁하니 그제야 이 녀석이 그때 서신을 재미있는 물건이라고 생각해 마을로 가져가 아이들과 함께 봤는데, 소똥이란 놈에게 빼앗겼다고 했습니다. 혼이 날까 봐 자기가 가져갔다고 솔직히 말하지 못했다고요. 소전이가 떠난 다음에야 그 소똥이란 애가 서신을 손주에게 돌려줬다고 합니다.”
석씨의 말에 대전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각기 다른 표정을 지었고 정선제는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지신은 두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그랬던 거군! 주운환이 소전에게 방어진이 그려진 그림을 주었는데 소전이 그걸 잃어버려 자신이 한 장 새로 그렸던 겁니다! 이제 주운환이 그렸던 원본이 나타났으니 이게 그 증거입니다! 죄인은 벌을 면치 못하는 법 아닙니까!”
“잠시만요. 이 그림이 정말 진서후의 손에서 나온 거란 말입니까?”
진무가 재차 나서자 요양성은 주운환을 쓱 쳐다보더니 차가운 눈빛을 번득이며 냉소를 지었다.
“석소전이란 자가 그림을 그릴 줄 압니까?”
“그럼요.”
전지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형부와 어사대, 대리시가 함께 조사했고 증거 또한 함께 찾아낸 겁니다! 그리고 석소전은 진서후가 입막음을 하려고 살해한 것이 분명하고요! 이제 증인과 물증이 모두 갖춰졌으니, 주운환, 네 죄를 네가 알렷다!”
한편, 더없이 음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선제는 크나큰 실망감을 느꼈다. 게다가 지금 병으로 인한 통증으로 말도 못 하게 고생하고 있으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그가 성을 내려고 하는데 뜻밖에도 아래에 있는 석씨가 또 울부짖었다.
“아아… 내 아들아! 비참하게 죽은 내 아들아! 진서후가 비적 떼와 결탁해 널 이용했구나! 그건 그렇다 쳐도 결국 널 죽이기까지 했어……. 흑흑… 원래는 이렇게 이야기했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소인들은 죽는 게 정말로 두렵사옵니다! 또 도저히 진서후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울 수가 없사옵니다!”
정선제와 태자는 크게 분노해 주운환을 어떻게 참수할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대신들 또한 다들 주운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눈빛으로 주운환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피해자’인 석씨가 갑자기 이런 말을 뱉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다들 멍한 표정을 지었고, 개중 여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모두의 황당함을 대표로 드러냈다.
“이봐, 석씨. 자네 울다가 정신줄을 놓은 겐가?”
“아, 아닙니다! 전 멀쩡합니다!”
석씨는 그리 말하며 온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는 주위에 있는 조정 신하들을 둘러보더니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 자리에 계신 나리인지… 비적인지…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분이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을 시켜 소인들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시키셨습니다.
그자가 전이가 진서후에게 맞아 죽었다고 소식을 전하더니 충격을 받은 소인들에게 갑자기 은화 천 냥을 건네는 게 아닙니까. 이 그림을 주며 소인들에게 방금 전처럼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전의 원수를 갚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일석이조라고 했죠! 이, 이리 자백하니 부디 소인들을 죽이지 마세요!”
정선제 등은 이 말을 듣고는 더욱 맹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석씨가 방금 주운환을 범인으로 지목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정선제도 사전에 소식을 전해 받았는데 방금 들은 말과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석씨가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꾼 걸까? 자신이 매수되었고 또 무슨 원수를 갚는다는 말을 하며 누가 그를 죽이려 한다는데,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이때, 주운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표정이 싹 굳어 버린 요양성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그의 멱살을 확 움켜잡고는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 상서, 준비한 연극은 다 끝났을 테니 이제 제 차례입니다!”
석씨 부부는 바닥에 쓰러진 요양성을 보고 있자니 몸이 한층 더 덜덜 떨렸다.
관리들이 오기 며칠 전에, 검은 옷을 입은 낯선 이가 자신들의 집에 찾아왔었다. 그는 대뜸 자신들에게 소전이 진서후에게 살해당했다고 말했다.
그때 자신들 두 사람은 정말로 슬픔을 금할 길이 없었다. 소전은 두 사람의 친자식일뿐더러 능력이 있어 앞으로 집안을 일으키고 자신들의 생계를 책임질 귀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 후,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종이 한 장을 주면서 조사를 나온 관리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알려 줬다.
들으면서 가만 따져 보니 정말로 묘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수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단 이야기 아닌가.
하지만 준다는 돈이 너무 적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뜻밖에도 고작 5백 냥만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석씨는 그 사람과 가격을 흥정했고 결국 천 냥을 받아 냈다.
천 냥은 소전이 살아 있다고 해도 한평생 벌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큰돈이었다.
이후 검은 옷의 사람이 말했던 것처럼 며칠 지나지 않아 관리들이 찾아왔다. 자신들은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시킨 대로 이야기했고 결국 도성으로 오게 되었다.
도성으로 오는 길에는 한바탕 해 보려고 단단히 별렀고, 어떻게 주운환에게 복수할지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그런데 폭설이 내려 길이 막히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바로 도성에 입성하지 못하고, 객줏집에서 묵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석씨는 식구를 모두 방 안으로 불러 모았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하고 사이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줬다. 도성에 들어가면 입궁해 주운환을 모함해야 하는데, 누구 하나라도 실수해서 들통나게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하므로 반드시 모두 이 일을 알고 있어야만 했다.
다행히도 큰아들과 며느리는 둘 다 똑똑했고 손자인 구자 또한 아주 총명한 아이였다. 일곱 살밖에 안 됐는데도 꾀가 어찌나 많은지, 다 큰 어른들조차 구자를 당해 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석씨의 식구들은 수군덕거리며 한창 상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끼익 소리가 나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의 싸늘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허, 이 파렴치한 것들이 이곳에서 사람을 해칠 음모를 꾸미고 있었구나!”
석씨 식구들은 기겁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누구냐!”
다섯 식구가 소리 난 곳으로 몸을 돌려 보니 객줏집의 심부름꾼이 떡하니 서 있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