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626화 (626/858)

제626화

“그 입 닥치지 못할까!”

바로 그때, 홍광수가 싸늘한 목소리로 버럭 고함을 치더니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손자를 보호하려는 좋은 외조부 역할을 계속해서 연기했다.

그러자 요양성의 눈빛에는 짙은 조롱기가 스쳤다.

‘쯧쯧. 추측은 누군들 못 할까!’

증인과 물증이 있다고 해도 주운환에게 범행 동기가 없으면 죄는 성립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운환에게 범행 동기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마침 홍광수는 예전에 여식들을 팔았고, 그녀들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게다가 주운환을 낳아 준 이낭은 내력이 불분명했다.

그런 정황을 이용해 그럴싸한 증인과 물증을 갖추니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조정 사람들은 하나같이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진서후가 홍광수의 외손자라고? 그럴 리가?”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말꼬리를 흐린 여지는 상석의 정선제를 쳐다봤다. 지금 자신들이 이 일에 대해 가타부타 따질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연로한 황제는 그리 믿고 있는 눈치였으니 말이다.

“계속 고하거라!”

정선제는 단어 하나하나를 이 사이에서 짜내듯 힘을 줘서 말했다.

하동이 이어서 말했다.

“진서후는 저희가 제 구실을 못한다고 생각했고, 그에 홍 노인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진서후는 일단 저희를 잡아 공을 세우는 척하면서 뒤로는 친외조부인 홍 노인을 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진서후는 석소전을 사주해 저희에게 방어진이 그려진 종이를 보냈고 종국에는 석소전을 살해해 입막음을 했습니다. 그런데 구출해 내지 못할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전 이제 전부 자백했습니다! 자백했어요!”

완전히 무너져 내린 하동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대로한 정선제는 심원한 눈빛을 보이며 온몸을 부들거렸다.

태자도 살짝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주운환을 쓱 쳐다봤다.

‘주운환이 비적 떼의 일원이었다니. 그럼 죽여 버려야겠군!’

사실 태자는 진작부터 주운환이 너무 잘생겼고 능력 또한 너무 출중하며 사람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죽으면 죽는 거지 뭐!’

그는 이렇게 생각하니 좀 편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주운환은 유능한 인재이자 대제 최고의 맹장이니 그가 죽으면 분명 서노가 분주히 움직일 테지만, 서노 또한 금도 대장군이 죽었으니 대제와 마찬가지로 쓸 만한 장수가 없었다. 즉, 양국 모두 회복기를 가지며 재정비를 해야 했다.

더군다나 태자는 정말로 응성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주운환뿐일 거라고는, 그 외의 인물을 하나도 찾아낼 수 없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진서후… 캑캑… 할 말이 있느냐?”

정선제가 힘겹게 한 마디 한 마디를 꺼내자, 조정 신하들의 시선이 모두 주운환에게 향했다.

대전 중앙에는 귀해 보이는 검붉은 의복을 입은 한 사내가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온몸에서 싸늘한 기운을 풍기며 그 화려한 얼굴에 차갑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채 두 눈을 깜빡이는 모습조차 그는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보였다.

찰나가 흐르고, 주운환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비적들의 말을 믿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말은 별 설득력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물론, 그의 결백을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진무와 장찬 그리고 상관수 등이 그의 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감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믿든 안 믿든 간에 상석에 있는 사람이 믿지 않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으니, 아무도 누군가의 마음이 어떠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제는 제시될 증거를 볼 차례였다.

“알겠다… 캑캑……!”

정선제는 심하게 기침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짐은 네가 완전히 승복하게 만들 것이다! 서, 석소전 일가를 들이… 캑캑……!”

“폐하.”

채결은 얼른 그의 등을 살살 두드려 줬다.

“아바마마, 잠깐 쉬었다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태의를 불러올까요?”

태자는 병마로 괴로워하는 정선제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너무도 아프고 몹시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정선제는 단박에 손사래를 쳤다.

“됐다… 어서 석소전 일가를 들이거라.”

이 일은 직접 심문해서 정확히 밝혀야만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신이 매우 신임했던 주운환의 일이니 말이다.

주운환이 출정할 때 전지신 등이 얼마나 그를 난처하게 했는가. 그러나 자신은 그를 믿고 병사들을 내주었다. 심지어 경위영 등의 요직도 그에게 주려고 했고 향후 태자가 제위에 오르면 주묘서를 황후로 삼겠다는 결정도 내렸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한가.

정선제는 그에게 너무도 실망해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다.

‘게다가… 운하를 닮은 저 얼굴로…….’

‘아니다! 주운환이 결코 운하의 환생일 리가 없다! 운하는 이런 불효막심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저 얼굴이 좀 닮은 것뿐이다!’

그리고 지금 자세히 보니 그리 닮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20년이 흘렀으니 기억이 흐릿해진 것 같았다. 오히려 보면 볼수록 주운환이 홍광수와 닮은 듯했다.

“석씨 일가를 들이라!”

채결이 큰 소리로 외치자 정선제는 정신이 돌아왔고 이어 백성 다섯이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섯 명은 모두 평범한 농민의 차림이었다. 맨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환갑이 다 되어 보이는 영감이었는데, 키가 작고 왜소하며 회색 베옷을 입고 있었다. 여윈 얼굴 속 작은 두 눈은 축 처져 있으며 허리와 등도 조금 굽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파란색 무명옷을 입은 나이 든 아내가 있었고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농가의 젊은 부부가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또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사내아이도 함께 걸어 들어왔다.

이 사람들이 바로 석소전의 가족들로, 석씨와 석씨의 아내, 그들의 큰아들인 석대전과 그의 아내, 또 그 사이에서 본 아이 석구자였다.

그들은 잔뜩 겁먹은 모습으로 대전 안으로 들어왔고, 금빛과 푸른빛이 어우러진 휘황찬란한 대전과 두 줄로 나눠 서 있는 대신들을 보더니 놀라서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백성들은 모두 관리들을 무서워했다. 포졸조차 감히 여러 번 쳐다보지 못할 정도인데, 지금 이렇듯 수많은 관리들 앞에 나서려니 두 다리에 힘이 풀리려 했다.

관리들은 무척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었고, 특히나 상석의 탁자 앞에 앉은 사람은 발이 다섯 개 달린 황금색 용이 수놓인 밝은 황색 옷 차림이었다. 비록 나이가 들긴 했지만 그에게는 존귀한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석씨 일가는 말도 못 하게 긴장하긴 했어도 오늘 자신들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고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는 까먹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이 대제에서 제일 존귀한 사내인 정선제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석씨네 다섯 식구와 함께 들어온 사람이 더 있었는데 그는 바로 형부시랑 등우안이었다. 석씨네와 등우안은 정선제를 보더니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캑캑… 일어나거라…….”

정선제는 힘겹게 손을 저었고 그의 시선은 이내 등우안에게 향했다.

“어찌 되었느냐? 뭔가 발견해 냈느냐?”

사실 무엇을 발견해 냈는지는 이미 아랫사람을 통해 보고를 받은 후였지만 많은 대신들 앞에서 다시 한번 물어봐야만 했다. 그리해서 모두가 똑똑히, 분명하게 듣도록 해야 했다.

“폐하, 소신 등이 능주에 가서 석소전 일가를 찾아냈사옵니다. 그리고 이들의 입을 통해 석소전을 사주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자는 바로 진서후였사옵니다. 이뿐만 아니라 석씨의 집에서 궁 안의 방어진이 그려진 그림도 찾아냈사옵니다!”

“그게 사실이더냐?”

정선제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또다시 기침을 해댔다.

“캑, 캐액……!”

장찬은 말없이 미간만 찌푸렸고 진무는 주운환을 힐끗 보더니 용기를 내어 입을 뗐다.

“황제 폐하, 이 일은 너무 수상쩍습니다. 방어진은… 진서후가 방어진을 그리고 그걸 석소전에게 건넨 다음 석소전이 비적들에게 전달하게 하여 그걸로 홍광수를 구출하려고 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참 이상하옵니다. 방어진은 이미 비적들에게 건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또 석소전의 집에서 방어진을 찾아낸 걸까요?”

정선제는 힘겹게 숨을 쉬며 싸늘한 눈으로 진무를 쓱 흘겼다.

진무는 전에 봤을 땐 괜찮은 사람으로 보였는데, 지금 보니 큰일을 맡길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는 전에 주운환에게 보상을 해 주려고 승진시켜 준 사람에 불과했다.

진무는 정선제가 자신을 쳐다보자 얼굴이 조금 하얗게 변하더니 입을 살짝 오므리며 감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해 보거라. 어찌 된 것이냐?”

정선제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석씨가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당신이 진서후 주운환이요? 내 아들을 죽인 인간 말이오!”

그는 주운환을 쏘아보더니 이내 그에게 달려들었다.

“아아……! 내 아들을 살려 내……! 흑흑흑… 이 인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짐승 같은 놈아!”

석씨의 아내 역시 눈물을 흘리며 주운환에게 달려가 그를 때리려고 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금위군이 앞으로 나와 그들을 제압하며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무례하기 이를 데 없구나! 황제 폐하 앞에서 감히 경거망동하다니. 자중하거라!”

“폐하… 소인도 소인의 아내도 그저 너무 흥분한 것뿐이옵니다, 흑흑.”

석씨는 눈물을 닦고는 이렇게 말을 이어 갔다.

“소전, 그 아이는 저희의 아들입니다. 그 애가 전에 마을로 돌아왔을 때 진서후를 따르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고 했었습니다. 크나큰 영광이라고 했죠.

비단 소인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 전부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이 그 애가 그토록 숭배하던 대단한 영웅이 그런 일을 하라고 사주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고는 결국 그 아이를 죽여 입막음까지 했습니다!”

석씨의 아내는 얼굴을 가린 채 통곡하고 있었다.

“그 아이도 참 어리석었습니다…….”

“조용히 하거라!”

채결이 위에서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또 소란을 피워 대면 끌고 나가 곤장을 칠 것이다.”

석씨 부부는 그제야 몸을 떨며 얌전히 있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사실대로 모두 고하거라!”

채결이 총채로 아래에 있는 석씨 부부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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