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5화
이어서 채결이 총채를 들고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뒤로 어린 환관 둘이 들것을 들고 나왔고, 그 위에는 정선제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런데 정선제는 그동안 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살이 밭기는커녕 오히려 찐 것처럼 보였다. 즉, 그 정도로 심하게 부었으니 병세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중병이 든 그의 얼굴은 수척해 보였고 축 처져 기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무칙칙한 낯빛은 꼭 송장의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조정 신하들은 모두 저도 모르게 숨을 헉 하고 들이켰고 이어 태자를 쳐다봤다. 분명 며칠 지나지 않아 태자를 따라야 할 날이 올 것이다. 앞으로 이 천하는 태자의 것이 될 터였다.
그러니 예부에서는 장례와 즉위식을 어떻게 치를 것인지 티 안 나게 계획하고 있을 것이다.
대신들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두 어린 환관은 옥좌로 향해 정선제를 들것에서 내렸다. 정선제는 이렇게 이동을 하자니 머리가 어지러워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더더욱 속이 메스껍고 괴로운 느낌이 들어 자리에 앉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의 의자였다. 오랫동안 앉아 보지 못한 그의 의자 말이다. 이 의자를 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어찌 앉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선제가 반듯한 자세로 어좌에 앉으니 시간은 이미 일각이 흐른 후였다.
태자는 이렇게 힘겨워하는 정선제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너무도 아팠다. 아버지가 천자의 자리에 앉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정선제가 자리에 앉자 대신들은 일제히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두 팔을 땅에 대고 머리도 땅에 닿게 해 큰절을 올리며 커다란 종소리 못지않게 큰 목소리로 송축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신하들은 손발이 척척 맞아 연달아 만세 삼창을 했고 꾀를 부리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의 만세 삼창에는 영원한 이별에 대한 감정이 담겨 있었고, 감수성이 풍부한 일부 노신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아, 황제 폐하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쿨럭… 일어나거라…….”
정선제는 힘겹게 이 말을 뱉으며 손을 들었다.
“그자들을… 캑캑… 그자들을 전부 안으로 들이거라…….”
“진서후 주운환.”
채결이 목소리를 높이자 주운환이 몇 발짝 앞으로 나왔다.
“소신, 여기 있사옵니다!”
그는 그리 말하고는 앞자락을 걷어 올리며 무릎을 꿇었다. 지금 그는 용의자이니 먼저 무릎을 꿇어야 했다.
채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 큰 소리로 외쳤다.
“홍광수, 욱휘, 하동!”
그들은 이미 밖에 준비되어 있었다. 잠시 후 금위군 둘이 죄수복을 입은 초라한 행색의 세 사람을 제압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쿨럭쿨럭……!”
정선제는 계속해서 기침을 하면서 축 처진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보니 세 사람은 온몸이 피범벅에 머리 역시 산발이었다. 모두 포승에 결박되어 있었고 걸을 때 다리를 절뚝거렸다.
그중 육십 대로 보이는, 수염과 머리칼이 모두 희끗희끗한 노인은 기력이 다 빠진 상태였고, 사십 대로 보이는 중년 사내와 이십 대로 보이는 청년도 노인 못지않게 허약해 보였다.
정선제는 이 세 사람이 각각 홍광수, 욱휘, 하동임을 알아챘다.
그는 어두운 눈으로 홍광수의 얼굴을 쳐다봤다. 홍광수는 나이가 들긴 했지만 준수한 얼굴에 영민해 보였고, 그 모습이 아무리 봐도 주운환과 조금 닮았다 싶었다. 그러자 그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몹시 비통한 기분이 들었다.
“무릎을 꿇어라!”
세 사람이 태화전 중앙에 이르자 금위군이 그들을 냅다 걷어찼다. 홍광수는 깔끔하게 무릎을 꿇은 데 반해 욱휘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위에 있는 정선제를 쓱 쳐다보더니 결국 발에 재차 걷어차이고 나서야 무릎을 꿇었다.
홍광수는 주운환을 보더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꾹 참고 있는 듯한 그의 두 눈에 괴로운 심경이 담긴 걱정스러운 눈빛이 어리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정선제의 눈에 포착됐다. 그러자 그는 또 속이 답답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채결은 소장訴狀을 들고 홍광수의 죄상을 하나하나 열거했는데, 그의 죄목은 무려 30여 가지나 됐다.
채결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쓱 훑어보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며칠 전에 비적 떼의 잔당이 형부로 잠입해 비적들을 구출하려고 했는데 하동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하동은 진서후인 주운환이 석소전을 사주해 비적 떼의 잔당에게 방어진이 그려진 그림을 건넸다고 했고 결국 진서후는 석소전을 살해해 입막음을 했다고 하는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원래는 정선제가 직접 심문을 해야 하는데 지금 정선제는 병이 깊어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워하기에 채결이 그를 대신해 질문하는 것이었다.
“없소.”
주운환은 바로 부인했다.
“거짓말입니다. 바로 저 사람입니다! 저 사람이라고요!”
하동은 목청껏 소리쳤다. 그동안 형부에서 계속해서 고문을 당했으니 그는 지금 그저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여 진서후와 자신들이 하루빨리 단죄되어 어서 속 시원히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 고얀 놈!”
홍광수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며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고, 욱휘는 움츠러든 모습으로 허허 냉소를 짓더니 무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전 그저 편히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진서후가 이 일을 벌였습니다.”
“너, 너희들…….”
홍광수는 여전히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속마음과는 반대되는 말을 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하하하. 좋다. 너희들 말이 다 맞다.”
하지만 속으로는 빈정거리고 있었다.
원래 자신들의 대업은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조정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자신을 감당해 내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진서후가 툭 튀어나와 모든 것을 삽시간에 무너뜨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후, 도성 사람이 그에게 마 지부와 힘을 합쳐 주운환을 처리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고 그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런데 결국 성공하기는커녕 주운환에게 체포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홍광수는 주운환의 힘줄을 뽑아 버리고 가죽을 벗겨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감옥에 있을 때 요양성이 제 배후라고 불지 않았다. 실토하면 이후에는 그저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으면 요양성은 자신이 벌인 일이 들통날까 봐 분명 사람을 시켜 자신을 구할 것이었다.
과연 요양성은 자신을 구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너는 내가 죽기를 바라느냐? 아니면 진서후가 죽기를 바라느냐?”
홍광수와 욱휘는 깜짝 놀랐으나 이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진서후 그 잡놈이 죽는 걸 선택했다. 요양성을 도와 주운환을 모함하기로 한 것이다.
이후 둘은 온갖 그럴듯한 말과 행동을 보였고, 요양성 이 간신도 참 대단한 자라 연로한 혼군昏君이 주운환을 이렇게까지 오해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여 지금 이 혼군은 이미 그들의 자백을 믿고 있었고 주운환이 그의 외손자라고 확신했다.
‘이제 증거만 확보되면 이 잡놈의 목숨을 끊어 버릴 수 있다.’
복수를 목전에 둔 홍광수가 이리 생각하는 동안, 욱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칼자국이 남아 있는 눈으로 정선제를 쳐다봤다.
“허허…….”
이 혼군은 예전과 다름없이 파렴치한이었다.
소씨 가문을 망가뜨렸고 황후를 죽음으로 내몰더니 결국 공주마저도 참혹한 죽음을 맞게 했다. 그에 자신은 홍광수를 부추겨 봉기하게 만들었고 일거에 이 조정을 전복하려고 했는데, 끝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못난 황제의 나라가 되살아날 운명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진서후라는 소년 영웅이 나타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진서후가 처형되고 나면, 그때도 대제의 천자가 편안히 잠을 청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자신은 그날을 볼 수 있는 운을 타고나지 못했다. 게다가 눈병이 있어 대략 5척 밖으로는 사람의 형체만 어렴풋이 알아보았다.
그 탓에 이 혼군이 얼마나 초췌한지, 얼마나 곧 죽을 것 같은 모습인지 알지 못했고, 이 혼군이 어떻게 자신의 오른팔을 잘라 내는지도 볼 수 없었다.
비적들의 증언에 조정 신하들은 소스라치며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이내 웅성거리는 소리가 너른 대전에 울려 펴졌다.
비적들이 정말로 주운환을 지목했다. 설마 정녕 그가 이런 짓을 벌인 흉수凶手였던 걸까?
여지와 반지명은 서로 시선을 맞췄고, 이어 주운환을 쳐다보는 그들의 눈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바로 그때, 전지신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진서후. 황제 폐하께서는 그대를 무척이나 아끼셨소! 그대를 발탁하고 그대를 믿으셨는데 가, 감히 이런 짓을 벌이다니!”
진무는 주운환이 모함을 당하자 낯빛이 살짝 변하더니 공수하고 말했다.
“이 무슨……? 비적들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콜록, 캑캑…….”
정선제는 숨이 끊어질 듯 기침을 해댔고 축 처진 두 눈으로 아래를 훑어봤다. 보니 홍광수는 눈을 내리깐 채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주운환을 걱정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정선제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목적이 무엇이냐?”
이미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하동은 그저 한시라도 빨리 판결이 내려져 속 시원히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는 입을 열더니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대업을 위해서였습니다……. 진서후는 원래부터 저희 사람이었습니다. 동우산에서 저희를 일망타진한 건 사실 공을 세우기 위한 눈가림에 불과했습니다. 저희 폐… 홍 노인이 진서후의 친외조부입니다!”
그 말에 정선제는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이마에 굵은 핏줄이 부풀어 올랐다.
주운환이 홍광수의 외손자라는 사실은 비적들이 자백해서 알게 된 사실이 아니었다. 또 요양성과 반지명 등이 보고한 것도 아니었다. 요양성 쪽은 아직 조사해 내지도 못했고, 단지 자신과 채결이 추측한 것이었다.
하지만 속으로 생각했던 일이 비적들의 입에서 그대로 나올 줄은 몰랐다. 과연 자신의 추측과 한 치의 틀림도 없지 않은가.
정선제는 이미 주운환이 홍광수의 외손자라고, 또한 그가 비적 떼와 한패라고 완전히 믿고 있었다.
반면, 주운환은 하도 어이가 없어 그저 검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참 나, 없던 외조부까지 만들어 내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