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4화
주묘서는 꽃문양을 수놓은 부채를 쥔 채 탑상에 삐뚤게 앉아 진홍색 비단 이불로 몸의 절반을 덮고 있었다. 녹지는 그녀의 다리를 두드려 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춘산이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태자 전하께서 백 측비의 처소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주묘서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들고 있던 부채를 홱 집어 던졌다.
“백여언 이 빌어먹을 년!”
“마마, 참으세요. 지금 셋째 나리의 상황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함께 태자 전하께 말씀을 올렸고 셋째 나리는 진서후부에 연금되셨답니다.”
춘산이 그녀를 달래며 바깥 동정을 전했다.
“그 빌어먹을 것들. 왜 분수에 걸맞게 자중하지 않느냔 말이다. 매번 못된 짓을 벌여 소란을 일으키고.”
주묘서는 입술을 꽉 깨물었고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측비 마마, 걱정 마세요. 나리는 분명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계신 거예요.”
춘산이 얼른 듣기 좋은 말로 제 주인을 위로했다.
“며칠 뒤면 진상이 밝혀질 테니 마마께서는 다시 예전의 영광을 되찾으실 겁니다.”
주묘서는 주운환과 엽연채가 모두 죽어 버리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아직 황후가 되지 못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들이 이런 죄명을 쓰고 죽게 되면 그녀의 평판 또한 영향을 받게 된다.
그 두 사람은 그녀가 황후가 되고 주비양이 주운환의 자리를 대신한 뒤에, 즉 철저히 버림받은 후에 수치심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자진해야 그 비천한 신분에 딱 맞는 결말을 맞이했다 할 수 있었다.
그런 줄 잘 알지만, 그래도 주묘서는 지금 마음이 너무나도 초조해 당장이라도 진서후부에 달려가 엽연채와 주운환에게 욕을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두 사람이 역병처럼 느껴져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다.
‘만에 하나라도… 만에 하나 정말 주운환이 단죄를 받는대도, 적어도 나에게는 아이가 있다. 그러니 절대로 깊게 엮여서는 안 돼.’
* * *
그 시각 엽씨 가문.
엽씨 가문은 정문과 수화문이 모두 굳게 잠겨 있었다.
안녕당에는 엽학문과 묘씨, 둘째 내외와 셋째 내외, 심지어 엽미채까지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표정은 다 제각각이었다.
묘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운환에게 일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로 엽학문은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라는 명령을 내렸다. 밖에 나가 물건을 구입하는 어멈 한 명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집 밖으로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상석의 엽학문이 어두운 얼굴로 했던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
“당분간 그 누구도 집 밖으로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 말하며 묘씨를 쳐다봤다. 묘씨가 오늘 엽연채를 보러 외출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에 가족들 앞에서 다시금 엄포를 놓는 것이었다.
“하지만…….”
말을 꺼낸 사람은 엽승강이었다.
“억울한 누명을 쓴 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둘은 우리 엽씨 가문의 딸과 사위입니다. 지금 그 둘에게 일이 생겼는데 찾아가 보지 않는다면… 너무 박정해 보일 겁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 거라고?”
엽학문은 싸늘한 눈빛으로 엽승강을 쓱 쳐다보더니 이내 마른기침을 하고는 저 스스로를 변호했다. 자신이 박정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걱정된 것이었다.
“다른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쪽에 일이 생겼으니 행동을 삼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길 찾아가면 사람들은 우리가 그 아이들과 결탁했다는 소리를 해댈 테니 오히려 그 아이들에게 폐만 끼칠 게다. 아무튼 단 한 사람도 집 밖으로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
엽승신은 냉소를 짓더니 엽승강을 쳐다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아직 결정을 내리시지 않았는데 넌 어째서 그 둘이 누명을 쓴 거라고 생각하는 게냐?”
그러자 엽승강은 코를 매만지더니 이렇게 대꾸했다.
“연채는 아주 좋은 팔자를 타고난 아이니까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멍해졌다. 찰나가 흐르고 엽승신 부부는 몹시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저게 무슨 뜻이야? 연채가 좋은 팔자를 타고났다고? 그럼 우리 이채는 사나운 팔자를 타고났다는 거야 뭐야?’
반면, 묘씨는 엽승강의 말을 듣더니 순간 기분이 좋아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휴. 걱정하고 있었는데 셋째 네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구나. 네 아버지 말씀이 옳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지 않는 편이 좋겠어. 그 아이들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니.”
그러자 손씨는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좋은 팔자인지 아닌지는 며칠 더 지나면 알게 되겠죠!”
‘지금이 바로 기회야. 여기서 조금만 더 건드려도 엽연채는 목숨까지 잃게 될 거다!’
손씨는 이런 생각을 하며 허허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 제 생각에는… 이러는 건 너무 냉정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찾아가 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요!”
“방금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단 한 사람도 집 밖으로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고.”
“아… 그게 아니라.”
엽학문이 싸늘한 목소리를 내자 손씨는 손을 비비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손녀잖아요? 그렇죠? 정말로 억울한 누명을 쓴 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상부에서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어요. 혹시나 잘못되면 재산을 몰수당할지도 몰라요.
그러니 집안 물건들을 가져오라고 해서 저희가 숨기는 걸 도와주면 어떨까요? 나중에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면 다시 돌려주면 되니까요.”
그러자 묘씨는 두 눈을 부릅떴고 엽학문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탈탈 털려 빈껍데기만 남은 집안이 떠오르자 엽학문은 순간 마음이 조금 동했다. 하지만 묘씨가 눈알을 부라리더니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쳤다.
“허허, 그런 물건을 감히 숨기겠다는 것이냐? 연채의 재산이 몰수될지도 모른다고 했지. 그럼 재산을 몰수하다가 수량이 맞지 않게 되면 너도 조사를 받게 될 거다. 어디 그럴 배짱이 있으면 한번 해 보거라!”
그러자 손씨는 표정이 굳어졌고 팔랑귀인 엽학문은 손씨를 노려보더니 욕을 퍼부었다.
“이 집안 말아먹을 물건 같으니! 너도 이채와 마찬가지로 재수 없는 물건이다. 한 번만 더 허튼소리를 했다가는 그길로 쫓겨날 줄 알아라!”
손씨는 화가 났지만 괜스레 겁이 나기도 해서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 * *
주운환이 집으로 돌아오자 그를 따라온 금위군들이 진서후부 전체를 에워쌌다.
당연히 진서후부 사람들은 순식간에 불안한 마음이 들며 두려워졌고,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금위군들이 후부를 둘러싸는 모습을 보더니 다들 깜짝 놀라 서로의 귀에 입을 대고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주운환은 수화문에 멈춰선 마차에서 내리더니 곧장 운연거로 향했다.
집안 여종들은 냉담한 기색으로 걸어오는 그를 보더니 다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짧게 인사할 따름이었다.
“나리.”
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운환은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를 지었고 온몸에서 범접하기 어려운 싸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 운연거에 들어섰을 때, 엽연채는 어제 사 온 은팔찌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몇몇 장신구는 주운환의 손가락 한 마디에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작았다.
주운환은 옆에 앉더니 그녀 손 위의 은팔찌를 들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정말 작군요!”
엽연채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입술을 위로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귀엽죠? 전 이 조그만 게 제일 마음에 들어요.”
주운환은 그녀의 미소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그는 몸에 묻어 있는 찬 기운을 털어 내더니 그녀를 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부인도 작습니다. 난 부인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
그러자 엽연채는 까르르 웃으며 그의 품에 기대더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주운환은 고개를 숙이고는 그녀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
* * *
정월 스무날, 능주에서 도성으로 통하는 길은 하루 전에 이미 눈이 다 녹은 상태였다. 다그닥다그닥, 급히 달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30여 명의 병사들이 준마를 타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병사들이 성문을 통과했다. 포졸로 보이는 병사들은 세 가지 색깔과 형태의, 각기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병사들 사이로 마차 한 대가 따라오고 있었다. 속도가 빨라서 마차는 이리저리 흔들렸다.
성문을 지나려 하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금위군들은 얼른 길을 내주며 그들이 곧장 그곳을 지나갈 수 있게 해 줬다.
병사들은 대명가를 따라 곧장 궁 안으로 향했다.
길가에 있던 백성들은 얼른 옆으로 피해 서더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머, 타지에 가서 진서후에 대해 조사했던 관병들 아냐?”
“들어 보니 증거를 잡았다고 하던데.”
“그럴 리가. 진서후가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 없어.”
이날, 장박원은 한 주루의 2층 대당 안에 있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백성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이때, 밖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박원이 몸을 살짝 밖으로 기울여 보니 병사들이 휙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고 그들 사이로 마차 한 대가 보였다.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그 석씨 집안 식솔들일 게 분명했다.
장박원은 이 순간 크나큰 기쁨을 누리며 기대감에 빠져들었는데, 그가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푼 가슴을 안고선 이 상황을 구경하고 있는 자가 또 있다는 것을 말이다. 다름 아닌 요 노부인이 그 바로 옆의 귀빈실에서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 * *
태화전 안.
조정 대신들이 모두 자리한 이곳에 주운환도 나와 있었다. 그는 이무기 문양을 수놓은 검붉은 포복을 입었고, 머리는 자금관紫金冠으로 정리해 구슬이 박힌 폭이 넓은 띠를 머리카락을 따라 아래로 드리운 차림새였다.
이렇게 치장하니 타고난 위엄과 귀티가 드러나며 그의 존귀한 분위기가 더욱 부각되어 보였다. 이렇듯 지극히 우아하고 품위 있는 풍채를 뽐내고 있는 그에게서는, 특히 그 예리한 눈빛에 넘쳐흐르는 재능을 엿볼 수 있었다.
요양성이 힐끗 쳐다보니 이 순간에 이르렀음에도 주운환은 여전히 차분하고 느긋해 보였고 찬란하게 발광하는 야광주처럼 화려하고 고귀해 보였다. 그러자 그는 화가 치밀었지만, 바로 다음 순간 주운환의 말로가 떠오르자 눈빛에 음험하고 악독한 웃음기가 어렸다.
한편, 장찬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였다. 여지, 반지명 등은 옅은 한숨을 쉬더니 애석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특히 진무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그는 주운환을 만나 의논을 하고 싶었지만 주운환이 계속해서 만남을 거절했다.
전지신은 코를 매만지더니 고개를 숙여 자신의 신발 끝만 내려다보았다.
‘주운환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말았어야 했어. 역시 이 새파랗게 어린 놈은 기반이 너무 약해.’
다행히도 그는 위쪽에 기대려고 했던 것뿐이라 아직 관계가 그리 깊은 편은 아니었다. 전지신이 그런대로 안도하던 찰나.
“황제 폐하 납시오!”
날카로운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