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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622화 (622/858)

제622화

잠시 후,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포졸들을 데리고 직접 이곳에 당도한 정 부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엽연채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알은체를 했다.

“부인!”

“부윤께서 오셨군요.”

엽연채는 몸을 돌려 그를 보고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엽이채와 포기를 가리키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 두 사람이 폐하께서 내 부군을 거짓으로 대한다며 폐하를 모함했습니다. 폐하께서 지금 우리를 처벌하지 않는 건 우리를 미혹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하하, 부윤 대인, 감히 폐하께서 그런 가식적인 분이라고 말했답니다.”

정 부윤은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낯빛이 점점 더 하얗게 변했고 가슴이 조마조마하며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속으로는 분명히 알고 있지만 말로 꺼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는 법이었다.

지금 진서후의 일처럼 말이다. 정 부윤도 여러 정황이 의심스럽다고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는 진서후를 아주 신뢰하고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예측하기 어렵고 천심은 더더욱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이럴 땐 입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가장 좋았다. 쓸데없는 일은 벌이지 말아야 한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이 두 사람은…….’

이런 일이 생기면 입방정을 떨어 대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 마련이지만, 이 둘이 엽연채 앞에서 입방정을 떨 거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엽연채도 참 의연한 사람이었다. 지금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흔들리지 않고 심지어 엽이채까지 손보려고 하니 역시 수완 좋은 사람이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정 부윤은 엽이채와 포기를 노려보며 성난 목소리로 호통쳤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꼬! 감히 황제 폐하를 비방하다니. 끌고 가거라.”

그러자 엽이채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소리쳤다.

“제 시할아버님이 장찬이세요! 대리시경 장찬 말이에요!”

그러자 포기도 서둘러 자신의 신분을 드러냈다.

“전 장국후부 소저입니다.”

“하, 그래서 뭐! 두 분 다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다. 감히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설마 장 대인과 장국후庄國侯도 뒤에서 그렇게 황제 폐하를 비방했나 보지?”

엽연채는 헛웃음을 치더니 재미와 조롱기가 섞인 눈빛을 번득였다. 이에 정 부윤은 표정이 굳어졌고 더욱 난감해졌다.

‘관리들까지 언급됐으니 뭐 어쩔 수가 없군.’

마음을 정한 그는 엽이채와 포기를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입을 틀어막고 끌고 가거라!”

그러자 포졸 두 명이 얼른 앞으로 나와 두 사람을 질질 끌고 갔다.

엽이채와 포기는 현기증이 났고 쉼 없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이거 놔라……! 난 대리시경의 손자며느리다! 우웁……!”

고래고래 소리치던 엽이채의 입은 뭔가로 틀어막혔고 이어 그녀는 포졸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러자 주변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혜연과 청유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속이 다 후련했다.

간담이 서늘해진 여주인이 고개를 돌려 보니 엽연채는 너무나도 태연하고 침착했다. 다시 진열장 곁으로 걸어가 아까 보던 작은 호랑이 문양이 들어간 은장신구를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이거 예쁘지 않니?”

“네, 예뻐요.”

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세자께 분명 잘 어울릴 겁니다.”

여주인은 미소를 띠고있는 엽연채를 쳐다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은 분명 금세 지나갈 것이다.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의 밝은 미소를 봐서라도 말이다.

“부인, 마음에 드시면 포장하겠습니다.”

여주인은 앞으로 나와 손짓을 하며 사람을 불렀다.

“그리하게.”

* * *

그날 장찬과 요양성 등이 비적들을 심문한 일을 정선제에게 보고한 후 정선제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하다못해 그들에게 더 조사하라는 명도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그들은 능주의 석소전 집에서 증거를 찾아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함께 능주에 갔던 대리시 사람이 장찬에게 서신을 보냈다.

서신에 따르면 석소전의 집에서 석소전이 옥에 갇힌 비적들을 빼낼 수 있게 잔당들을 돕고 그들에게 방어진이 그려진 그림을 준 사람이라는 증거를 찾아냈고, 석소전의 가족들도 이를 증명해 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장찬은 낯빛이 조금 하얗게 변했고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주운환에게 조심하라고 이 소식을 전해야 할까? 아니면 전하지 말아야 할까?’

이때, 그의 사동이 쿵쿵쿵 발소리를 내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나리, 큰일 났습니다. 큰마님께서 부윤 대인께 체포되어 관아로 끌려가셨습니다. 지금 부윤 대인께서 저희에게 조용히 큰마님을 데려가라고 하셨습니다.”

장찬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손주며느리가 체포됐단 게냐? 무슨 일로 체포됐다는 말이냐?”

사동은 얼른 엽이채가 벌인 대단한 일을 이야기해 줬고, 자초지종을 들은 장찬은 화가 나 눈 흰자위를 번득였다.

분노로 낯빛이 새파랗게 변한 그는 옷소매를 홱 뿌리치며 말했다.

“그 고얀 것! 그냥 갇혀 있으라고 해라! 풀어 주지 말라고 하면 그만이다.”

사동은 장찬이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을 눈치챘지만, 그런 그를 만류했다.

“나리, 하지만 데려오시지 않으면 사람들이 알게 될 겁니다. 그럼 이유를 물을 텐데… 황제 폐하를 비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진서후라는 민감한 사건에 연루된다면, 저희 가문이 화를 입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격노한 장찬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옥진자玉鎭子를 집어 던졌다. 하지만 결국 특유의 인내심을 발휘해 싸늘한 목소리로 이렇게 호통쳤다.

“맹씨와 장박원에게 가서 그 녀석을 데려오라고 하거라.”

사동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리도 참 모진 분이셔! 두 분께 데려오라고 하시다니. 그럼 주인마님은 큰마님을 더욱 미워하실 거 아니야. 잠잠해진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온갖 괴롭힘을 당하게 생겼네.’

어쨌든 사동은 명받은 대로 맹씨의 처소에 가서 엽이채 일을 보고했다.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맹씨를 뒤로하고 사동은 또 장박원을 찾아갔다. 장박원의 서재로 들어가 보니 그는 두 명의 첩실과 눈 뜨고 보기 민망할 정도의 음탕한 짓을 하고 있었다.

‘박원 나리는 정말 날이 갈수록 타락하시는구나. 이젠 국자감에도 가지 않으시고 집으로 스승을 모셔 와도 수업 시간에는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시고. 수업이 끝난 후야 더 말할 것도 없지. 서책은 펴 보지도 않고 첩실들과 놀아나기나 하니 원.’

“나리, 큰마님께서 관아로 붙잡혀 가셨는데 주인나리께서 나리께 어머님과 함께 큰마님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사동은 그리 말하며 엽이채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이야기해 줬다.

장박원은 혐오감이 가득한 얼굴로 옷을 걸치더니 수화문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며 가는 내내 욕을 했다.

“그 빌어먹을 여편네. 온종일 못된 짓거리나 하고 다니지! 내가 이런 꼴이 된 것도 다 그 여편네 때문이다.”

그는 수화문에서 맹씨와 만났고 모자는 마차에서 엽이채를 욕했다. 그런데 욕을 하면서도 두 사람은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사실 이보다 더 통쾌할 수가 없었다.

주운환이 재수 없는 상황에 놓였으니 어찌 안 기꺼워하겠는가.

관아에 도착한 두 사람은 엽이채를 빼냈다. 그러자마자 맹씨는 냅다 그녀의 뺨을 후려갈기고는 욕을 한바탕 퍼부었다. 장박원은 냉담한 모습으로 엽이채를 쳐다볼 뿐이었다.

고부가 마차에 오르자 장박원은 따로 그곳을 떠났다. 그가 간 곳은 근처에 있는 주루였다.

주운환에게 일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된 후로 장박원은 집에 처박혀 있는 대신 점점 더 거리에 나가는 걸 즐기게 되었다. 거리에 나가기만 하면 백성들이 진서후에 대해 떠들어 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들을 때마다 그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었다.

장박원은 아무 주루나 들어가 구석에 자리하더니 기분 좋게 차를 따르고 있었다.

주루에서는 사람들이 이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개중 오십 대로 보이는 건장한 중년 사내가 걸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며칠 전에 내가 사찰 쪽에 갔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쏜살같이 길을 지나가는 모습을 봤소. 그때 관리들이 입은 옷이 세 가지 색깔이라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겠구먼. 진서후가 삼사의 조사를 받아서 그런 거였어.”

“맞아요, 맞아. 저도 그 모습을 봤어요.”

사십 대로 보이는 화려한 의복을 입은 한 중년 여인이 맞장구를 쳤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죠! 들어 보니 비적 떼와 결탁했다고 하던데. 얼마 전에 비적 떼를 잡아왔는데 이젠 또 그들을 풀어 주려고 했단 거잖아요.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네요. 그 말에 탄 사람들은 어디에 가던 길이었을까요?”

“제가 알고 있습니다.”

이때, 이십 대로 보이는 회색 옷을 입은 넓적한 얼굴의 한 청년이 끼어들었다.

“전 그 사람들이 도성 밖으로 나가는 모습은 못 봤지만, 그 사람들이 간 곳은 잘 압니다. 제가 사는 마을에 왔으니까요.”

“그래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잇달아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자네는 어느 마을 사람인가?”

“전 능주 사람입니다. 집은 간두촌汗頭村에 있고요.”

그 청년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 사람들이 찾는 사람이 어떻게 또 바로 제 이웃이었지 뭡니까.”

주위에 있던 손님들은 모두 그 청년에게 집중했다. 그가 다음 이야기를 꺼내기만을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이 청년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 이웃이 말이죠,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원래 3대째 농사를 지었고 저희 모두 그 집 부부를 석씨와 석씨 아줌마라고 불렀어요. 그 노부부에게는 아들이 두 명 있었는데 큰아들은 부부와 함께 집에서 농사를 지었고 아내도 얻어 노부부에게 손자도 안겨 줬죠. 올해 일곱 살이 되었어요.

작은아들은 나이가 많지 않아요. 이제 겨우 스무 살이죠. 사실 이 작은아들 때문에 그 집 사람들이 대단하단 겁니다. 고작 열 몇 살 때 징집되어 군에 들어갔거든요. 하지만 풍씨 가문 군대에 있었을 땐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작년에 진서후가 서쪽 정벌에 나섰는데 다들 알고 계시죠?”

“물론이지.”

주위에 있던 백성들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진서후가 단번에 이름을 날리고 옥안관과 응성을 탈환했죠. 정말 대단했어요.”

주운환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또 자신도 모르게 입이 마르도록 그를 칭찬했다. 그러자 구석에 앉아 있던 장박원의 눈빛이 차갑게 변하더니 곧장 헤살을 놓았다.

“이봐요, 공자. 어서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 봐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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