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620화 (620/858)

제620화

“자네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 지도 참 오래됐구나.”

정선제는 그리 말하며 옅은 한숨을 쉬더니 예전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주 백야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도 한때는 황제에게 중용됐었고 그 누구보다도 잘나가던 사람이었다. 지금 정선제가 자신과 예전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주 백야는 감개가 무량했다.

“이제 운환이가 네 뒤를 잇고 주씨 가문의 명성을 이어 가게 됐으니 주정 너도 먹구름이 걷히고 태양이 뜨는 듯한 기분이겠구나.”

정선제는 옛일을 회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예, 예. 그 아이는… 저보다 뛰어난 아이입니다. 청출어람이죠!”

“참… 말이 나와서 말인데, 쿨럭쿨럭……. 운환이 같은 아이를 낳은 여인은 대체 어떤 여인이냐?”

정선제가 갑자기 주운환의 생모에 대해 묻자 주 백야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운 이낭을 떠올려 보니 오래전 일이라 그녀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아… 그게 말씀드리면… 폐하께서 언짢아하실까 봐 걱정이 되옵니다. 그게…….”

운 이낭은 기루 출신이었다. 이런 출신은 귀족들 사이에서 당연히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는, 비천한 사람들이었다.

“말해 보거라. 짐이 궁금하구나.”

주 백야는 코를 매만지더니 입을 뗐다.

“그게… 20년 전에 소신이 응성에서 도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주를 경유했는데… 음… 그곳의 ‘녹초루綠蕉樓’에서 형제들과 술을 좀 마시다가 낙운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낙운은 기루에서 유명한 미인이었고 게다가 재주도 아주 뛰어났습니다. 소신은 그녀와 잘 알게 되었고 나중에는 차마 헤어질 수가 없어 그녀를 데리고 함께 도성으로 돌아와 이낭으로 들였습니다.”

“그 여인이 몸을 팔기 전에는 어떻게 지냈는지 자네에게 말한 적이 있느냐?”

“원래 사주 마을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에휴, 소신도 전부 잊어버렸습니다. 낙운이 집으로 들어온 후 운환이를 낳았는데 출산할 때 심한 병이 생겨 겨우 반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됐습니다. 그때 소신은 응성에 있었던지라 그 사람과 함께 지낸 시간은 합쳐 봤자 고작 두 달 정도밖에 안 됩니다.”

주 백야는 그리 말하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정선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보아하니 그에게서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는 없어 보였다.

게다가 주 백야는 당시 정말로 바빴었다. 기껏 도성으로 돌아와도 명절을 쇠고 난 다음에는 바로 응성으로 돌아가야 했고, 집안에는 다른 처첩들도 있었으니 낙운과 제대로 함께 보낸 시간은 정말 얼마 되지 않을 터였다.

주 백야는 정선제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눈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채결은 주 백야가 떠나는 방향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폐하. 어찌할까요?”

“뭘 어쩔 수 있겠느냐?”

정선제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주정은… 하하. 저러니 묵사발이 되고 말았지. 정말로 어리석은 놈이다. 아무것도 모르다니……. 하나 그 운 이낭이라는 자는 들을수록 의심스럽더구나.”

주 백야의 입에서 아주 사소한 거라도 알아낼 수 있었다면 정선제도 이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 백야가 아는 바가 전부 두리뭉실하니 그는 더욱더 주운환이 비적의 외손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운환 일만 생각하면 정선제는 낯빛이 창백해졌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채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얼른 다가가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정선제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괜찮다…….”

그러나 이 말을 꺼내자마자 그의 몸은 맥없이 침상 위로 쓰러졌다. 채결은 아연실색하더니 얼른 밖으로 뛰어나갔다.

“여봐라, 여봐라! 어서 태의를 부르거라.”

어린 환관은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갔고 잠시 후 나 의정을 데리고 왔다.

나 의정은 전에는 태의원에서 지냈는데 정선제의 병이 위중해진 후로는 정선제의 옆방에서 지냈다. 언제든지 부름을 받고 와서 정선제를 돌보기 위함이었다.

나 의정이 정선제에게 약을 먹이고 침을 놔 주자 정선제는 그제야 천천히 정신이 돌아오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채결아, 용효를 불러오거라.”

그러자 채결은 깜짝 놀랐다. 용효는 금인위金鱗衛의 지휘사指揮使였다.

금인위는 줄곧 황제를 위해 일해 왔는데, 순찰과 체포, 정찰 등의 임무를 맡은 기관이며 대제의 예전 왕조부터 있어 왔다. 하지만 정선제는 금인위를 잘 쓰지 않았기 때문에 당조當朝의 금인위는 세력이 약하고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정선제가 갑자기 금인위의 지휘사인 용효를 불렀다. 채결은 정선제가 용효에게 주운환을 낳아 준 이낭의 일생을 조사하게 하려는 것임을 알아챘다.

* * *

언제부터인지 하늘에선 가랑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새하얗고 귀여운 눈송이들이 황궁과 도성을 하얗게 뒤덮었다.

그리고 화려하고 귀해 보이는 마차 한 대가 사람들로 북적이는 큰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주위에 노점상을 편 소상인과 행인들은 달가당거리는 마차 소리를 듣더니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돌렸다.

보니 커다랗고 화려한 마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는데, 마차의 모서리에는 흔들리는 풍등風燈도 걸려 있으며 익숙한 표지가 마차 위에 붙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표지를 보더니 저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바로 명성이 자자한 진서후부의 표지이지 않은가.

마차 안에 앉아 있던 엽연채가 발을 걷어 보니 마차를 본 백성들이 한쪽으로 비켜서고 있었다. 그들은 이상하거나 불만스러운 혹은 놀라서 두려워하는 등 갖가지 눈빛으로 이쪽을 훑어보고 있었다.

청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작은 손난로를 엽연채의 손에 쥐여 주고는 몹시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마님, 저희 그냥… 대충 몇 바퀴 돌다가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건 어떨까요?”

청유는 백성들이 왜 이런 시선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지 알고 있었다. 겨울에 내리는 눈이 아무리 얼음처럼 차갑다고 해도 주운환에 대한 백성들의 뜨거운 관심을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운환이 고발당한 지 이미 여러 날이 지났으니 소문을 들은 백성들은 자연히 온갖 이야기를 나누며 추측을 하고 있었다.

작년에는 열렬한 사랑을 받던 대제의 영웅이자 수호신이었는데 이젠 감금된 죄수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청유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마님, 몸이 더 무거워지셨고 날씨도 너무 춥습니다. 장신구를 사고 싶으신 거면 이곳 주인에게 물건을 후부로 가져오라고 해서 고르시면 됩니다. 그럼 수고도 덜고 편리하죠.”

그러나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거절했다.

“기왕 물건을 사려면 밖을 돌아다니며 여러 상점에 들러 천천히 골라야지. 그런 게 바로 물건 사는 묘미 아니겠니.”

“아…….”

청유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난 신경 쓰지 않는다.”

청유의 속마음을 읽은 엽연채는 그녀를 안심시키며 재차 미소를 지었지만, 얼굴에는 역시 걱정스러운 기색이 살짝 비쳤다.

어쩌면 신경이 안 쓰이는 게 아니라, 너무 신경 쓰이기 때문에 외출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주운환이 수호한 천하와 그가 보호한 백성들이 어떻게 그를 대하는지 알고 싶었다.

청유와 혜연은 서로 시선을 맞추었고 두 사람 모두 어쩔 수 없다는 눈빛을 보였다.

두 사람은 자신의 주인이 분쟁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럴 때 집 안에 가만있으면 끊임없이 바깥의 상황을 추측하느라 오히려 더 마음을 졸이게 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밖에서 돌아다니며 똑똑히 지켜보는 게 더 나았다.

마차는 모퉁이를 돌고 멈추고 움직이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자리에 멈춰 섰다.

혜연은 얼른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작은 걸상을 마차 아래에 내려놨다. 그러자 엽연채는 작은 걸상을 밟고 혜연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이곳은 ‘진보루珍寶樓’에서 마차를 세워 놓는 뜰이었다. 그리고 진보루는 도성에서 가장 번화한 장신구 상점이었다.

그들이 뜰에서 나와 병풍을 도니 대당大堂처럼 보이는 곳이 나왔고 여점원이 바로 그들에게 다가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머, 진서후 부인이 아니십니까? 마침 며칠 전에 새로운 장신구들이 들어왔습니다. 부인, 2층 귀빈실로 가시지요.”

청유와 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이 여점원은 아주 교양 있어 보였고 밖에서 떠도는 소문 때문에 음흉한 태도를 보이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래.”

엽연채와 여종들은 점원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장신구와 보석들이 눈앞에 가득했고 전부 나무 탁자 위에 줄지어 놓여 있었다.

장신구 위에는 천운금으로 만든 얇고 부드러운 붉은색 비단이 덮여 있어 갖가지 장신구들이 더욱 빛나고 화려해 보였다.

2층에 있던 여주인이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부인, 어떤 종류를 좋아하십니까?”

엽연채는 잔잔히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이렇게 대꾸했다.

“갓난아이가 쓸 은 장신구를 보려고 하네.”

이미 엽연채의 배를 눈여겨보고 있던 여주인은 얼른 손짓을 했다.

“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 갓난아기와 어린아이의 장신구는 전부 저쪽에 있습니다.”

오늘 엽연채가 밖에 나온 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은팔찌를 사 주고 싶어서였다.

엽연채가 여주인을 따라 병풍을 돌자 또 아름다운 장신구들이 눈앞에 가득했는데 전부 작고 깜찍했다.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간 엽연채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익숙한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는데 한 사람은 노랑색 바탕에 흰색 작은 꽃무늬가 수놓인 긴 배자를 입었고 다른 한 사람은 분홍색 긴 윗옷에 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발걸음 소리를 듣더니 몸을 돌렸고 엽연채를 보더니 바로 미간을 꿈틀거렸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 연채 언니 아니에요?”

청유와 혜연은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들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 엽이채와 포기였다.

엽이채와 포기는 원래도 사이좋은 친구였는데, 장만만과 포기의 오라비가 정혼을 하고 친척이 된 이후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엽연채는 입술을 씩 올리고는 무덤덤하게 인사를 건넸다.

“하하. 너희들이었구나.”

그녀는 그리 말하고는 진열대 앞으로 걸어왔다. 보니 조그만 은색 팔찌들이 일렬로 놓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귀엽고 깜찍했다. 엽연채는 그 모습에 마음이 녹아내렸고 저도 모르게 작은 방울이 달려 있고 조그만 호랑이 문양이 들어간 팔찌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엽이채는 이런 상황에도 장신구를 볼 마음이 있는 엽연채를 보고는 저도 모르게 냉소를 지었다.

“큰언니, 돈을 아껴 두는 편이 좋을 거예요! 장소를 물색해서 금이나 은 같은 걸 숨겨 두시고요. 그럼 도망칠 때 쓸 돈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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