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9화
주운환은 깜짝 놀랐다.
“움직이기도 합니까?”
엽연채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그를 쏘아보며 핀잔하듯 말했다.
“당연히 움직이죠. 앞으로는 매일 배 속에서 왔다 갔다 할 거예요.”
주운환은 이 이야기를 듣더니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으니 이런 사실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그저 아이는 태어난 후에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배 속에서도 움직이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어디 좀 봅시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지금은 안 움직여요. 내일 봐요.”
“또 움직일지 누가 압니까. 어디 좀 봅시다. 참, 내가 전부터 아이에게 책을 자주 읽어 줬지 않습니까. 움직이는 걸 보니 정말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자, 우리 또 읽어 줍시다.”
엽연채는 입을 빼쭉거리며 내키지 않아 했다.
“자꾸만 아이에게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면 아이가 싫어할지도 몰라요.”
“전 아이에게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면서 기분전환을 하려는 거지요.”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 * *
이튿날 이른 아침, 정선제는 일찍 잠에서 깼다.
눈을 뜬 그는 자신에게 물을 따라 주는 어린 환관을 쳐다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봐라. 짐이 정신이 아주 또렷하단다.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순간인가 보구나.”
어린 환관은 눈시울을 붉혔다.
“폐하는 분명 장수하실 겁니다.”
“허허.”
정선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채결을 찾았다.
“채결은?”
“채 공공은…….”
어린 환관이 말하려는 찰나,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채결이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이른 아침부터 어디에 갔던 것이냐?”
정선제는 또 기침을 했고 채결은 깜짝 놀라며 사죄했다.
“소인이 죽을죄를 졌습니다. 폐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리 말하며 앞으로 다가가 정선제의 등을 두드려 주더니 옆에 있는 어린 환관에게 말했다.
“넌 이만 나가 보거라.”
어린 환관은 예를 올린 후 자리에서 물러났고 채결은 그제야 이렇게 말했다.
“폐하, 소인이 아침 일찍 밖에 나갔던 건 홍광수 일에 진전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어찌 되었느냐? 홍광수와 진서후가 무슨 관련이 있더냐?”
석소전의 집은 능주에 있어서 왕복하려면 사흘 정도 걸렸다. 정선제도 정말 주운환을 믿고 싶었지만 그래도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야만 했다.
지금 정선제는 비적들이 정말로 주운환을 보호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증거들만 손에 넣게 된다면 죄를 결정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비적들과 자백 내용, 게다가 곧 드러날 다른 증거들까지 더해지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주운환에게 범행 동기가 있어야만 했다.
주운환에게 홍광수를 풀어 줄 이유가 무에 있겠는가? 그는 전도유망한 사람이니, 머리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 이상 본인이 잡아온 사람을 제 손으로 풀어 줄 리 없었다.
그러니 동기를 찾지 못하면 증거들 역시 충분한 효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 모든 증거들이 주운환을 가리키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설마 어떤 합의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아직 밝혀 내지 못했사옵니다. 홍광수는 그 후에도 아무리 때려도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채결이 이리 고하자 정선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진서후를 제대로 보호하는구나! 아무리 손을 잡은 사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보호하지는 않을 것이다. 홍광수의 대업은 이미 어그러졌는데 어째서 아직도 진서후를 비호하려는 걸까?”
“그러게 말입니다. 자기 자식도 아닌데 말이죠.”
채결의 말에 정선제는 소스라치며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채결은 쭈뼛거리며 그를 쳐다봤다.
“소인의 생각에는 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비호한다면 혈육의 정 말고는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그 말에 정선제의 마음은 확 뒤집혔다. 거칠고 사나운 파도가 덮쳐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 그도 내심 이런 추측을 하고 있었다.
‘만약 주운환이 정말로 홍광수의 아들이라면, 아마……. 아니다, 홍광수는 나이가 그렇게 많으니 그의 손자일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어쨌든 만약 두 사람이 정말로 그런 관계라면…….’
“폐하. 홍광수를 조사하러 갔던 사람이 돌아왔는데 단서를 조금 찾아냈습니다. 홍광수는 원래 농부였는데 몇 년 동안 글공부도 했다고 합니다. 또 여식이 두 명 있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둘 다 팔게 됐다고 하옵니다. 그리고 딸을 판 돈으로 장사를 해서 집안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 후, 서북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아 장사를 할 수 없게 됐는데, 우연한 기회에 욱휘를 알게 되었고 서서히 유랑민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옵니다. 그리고 반역을 일으킬 때 또 한 여인과 혼인을 해서 아들 둘을 낳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낳은 두 아들과 손자 모두 오일의와의 교전에서 사망했다고 하옵니다.”
“아들과 손자는 모두 죽었다. 그럼…….”
정선제는 인상을 쓰며 뒷말을 줄였다.
“만약 홍광수에게 혈육이 더 있다면, 분명 예전에 팔았던 두 딸의 자식일 것이옵니다. 하지만 홍광수는 집안을 일으킨 후 팔았던 딸들을 찾지 않았습니다. 두 딸이 어디에 팔렸는지도 모를 것이옵니다.”
정선제는 더욱 오만상을 썼다.
“하지만… 만약… 우연히 딸이나 외손자를 찾은 거라면? 진서후의 생모인 그 이낭은 원래부터 내력이 좀 불분명한 사람이라고 들었다.”
“소인도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채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보탰다.
“홍광수는 혈육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러니 혈육이 생겼다면 분명 아주 소중히 여길 것이옵니다. 그건 인지상정이지요.”
정선제는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진서후가 정말로 그자와 관계가 있다면… 만약 진서후가 그자가 팔았던 딸의 자식이라면 외손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능력도 출중하지. 짐은… 진서후를 매우 신임했고 경위영을 전부 맡기고 싶었다.”
정선제는 생각을 이으며 연신 고개를 주억였다.
“아, 알고 보면……! 그 비적과 진서후가 정녕 조손 관계라면, 비적들을 잡아들인 것 역시 그저 공을 세우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진짜 속내는 비적들의 힘을 이용해 모반을 일으키고 싶은 거인 게다.
그리고 그 비적은 자기 외조부 쪽 사람들이니 당연히 구출해 내야 했겠지. 때가 되어 경위영을 손에 넣게 되면 비적들도 풀어 줬으니 그 비적들은 다시 모여 결국… 함께 모반을 일으킬 거다. 캑캑……!”
정선제는 생각하면 할수록 낯빛이 점점 더 하얘졌다.
“폐하. 좀 쉬십시오.”
깜짝 놀란 채결은 얼른 그를 부축해 자리에 눕혔다.
정선제는 잠시 누워 있었으나 그의 낯빛은 여전히 창백했다.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짐이 공연한 걱정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맞습니다.”
채결이 고갯짓을 하며 그를 진정시켰다.
“증거를 잡게 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참, 잠시 후에 진서후를 부를까요?”
정선제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고 하거라.”
“예.”
정선제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최대한 긴장을 풀려고 했고, 또 의정을 불러와 진맥하고 침을 놓게 했다. 그리하니 혈색이 조금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퇴청 시간이 되자 주운환은 약속대로 정선제를 찾아왔다.
주운환이 궁침으로 들어가니 시름시름 앓는 모습으로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정선제의 모습이 보였다.
“폐하를 뵈옵니다.”
“왔구나.”
정선제는 허허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앉거라.”
“예.”
주운환은 대답을 한 뒤 『효경』을 꺼냈다.
주운환은 정선제에게 『효경』을 읽어 주다가 멍한 모습의 정선제를 보더니 낭독을 멈추었다.
“폐하, 듣기에 답답하십니까?”
그러자 멍해 있던 정선제는 정신이 들었다.
“아니다. 답답하지 않다. 그저 예전 일이 떠오른 것뿐이다. 젊었을 때 네 아비를 자주 봤던 기억이 나는구나. 지금 네 아비는 그런 상태가 되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참으로 그립구나.”
“폐하, 그리우시면 저희 아버지를 불러 문안 인사를 받으시옵소서. 아버지도 폐하를 걱정하고 있어 몇 번이나 찾아와 폐하의 용태가 어떤지 물어보셨습니다. 하지만 의정이 말하길, 황제 폐하는 조용히 안정을 취해야 하시니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황족분들도 올 수 없으시다고 했습니다. 하여 첩자를 보내 궁 안의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아, 첩자를 보내 내 안부를 물었다는 말이냐?”
“예.”
정선제는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나 궁침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에 대신들과 귀족들은 제 충정을 표현하기 위해 대신 첩자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이 첩자들은 전부 채결이 받았는데, 하나같이 안부를 묻는 별 시답잖은 내용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정선제에게 가져다주지 않았다.
“정말 그립구나…….”
정선제는 캑캑 기침을 했다.
“채결아……. 가서 정국백定國伯을 궁으로 부르거라. 짐이 그와 만나고 싶구나.”
채결은 안으로 들어오더니 그리하겠다고 했다.
“예. 소인이 지금 묵림이를 그곳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런데… 진서후 대인, 어사대 쪽에서 물어볼 일이 있다고 하니 그쪽으로 가 보시지요.”
“알겠소.”
진서후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정선제에게 예를 올린 후 그곳을 떠나갔다.
주운환이 떠난 지 삼각쯤 지나자 주 백야가 입궁했다.
주 백야는 과거 전쟁에서 부상을 입어 지금 다리를 조금 절고 있었다. 그는 침상 앞으로 걸어오더니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폐하 만복을 누리시옵소서!”
그는 그리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주 백야는 정선제에게 정말 감사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이 장원 급제를 하고 출정을 한 건 전부 천자인 정선제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오늘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건 정선제가 주운환을 아끼고 중요하게 생각한 덕분이었다. 황제에게 중용되는 건 그야말로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캑캑.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다. 일어나거라.”
정선제는 기침을 하며 인사를 받았다.
“채결아, 자리를 내주거라.”
“예.”
채결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의자 하나를 가져와 정선제의 침상 옆에 놓았다.
“정국백, 자리에 앉으시지요.”
“황제 폐하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주 백야는 과분한 대우에 놀랍고도 기뻐하며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