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7화
“방금 전 그 공자는 좋은 짝이 아니다. 그러니 앞으로 만나게 되면 피해 가거라.”
엽연채가 대놓고 이렇게 경고하자 엽미채는 깜짝 놀랐고 이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큰언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전 그 사람을 몰라요……. 그저 길에서 마주친 것뿐이에요.”
그러나 제민은 풉 웃음을 터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아까 너 그 사람을 보고는 얼굴이 붉어지던데.”
그러자 엽미채는 표정이 굳어졌다.
“전 그저… 부끄러웠던 것뿐이에요.”
그리 따뜻하고 상냥하게 말을 걸어 주었고, 또 부드럽게 잘생긴 외모에 다정다감하고 섬세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부끄럽다고? 쯧쯧…….”
제민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참나, 부끄러울 게 뭐가 있니!”
제민이 본격적으로 엽미채를 놀리려고 하는데 엽연채가 그런 자신을 쏘아보는 게 아닌가. 그녀는 얼른 말투를 바꿨다.
엽연채는 화가 나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알다시피 대부분의 감정이 이런 부끄러움에서 시작되지 않는가.
화본에도 얼마나 많이 쓰여 있는지 모른다. 소년은 따뜻하고 상냥하고 소녀는 수줍어하며 부끄럼을 타고, 그렇게 차츰 만남이 거듭되면 정말로 전생처럼 제 눈에 안경이라고 서로 눈이 맞게 되는 것이다.
“네가 부끄러워하는 건… 정상적인 반응이다. 넌 그 나이대 사내와 많이 접촉해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엽연채는 최대한 이 상황을 평범한 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방금 전 그 공자는 음… 내가 친척집을 방문할 때 본 적이 있는데 엉망진창인 집안이더구나. 그자는 결코 좋은 짝이 아니다.”
그 말에 엽미채는 냉수를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러니 앞으로 만나게 되면 피해 가야 된다.”
“네.”
엽연채가 재차 신신당부하자 엽미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엽연채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사월이면 엽미채도 열다섯 살이 되니 돌아가서 찬찬히 엽미채의 짝을 찾아 줄 것이다.
* * *
엽연채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시간은 이미 미시未時(오후 1시~3시)쯤이 되어 있었다.
엽연채가 마차에서 내리자 경인은 다시 문을 나섰고 엽미채와 제민을 집으로 데려다줬다.
소월과 백수는 진작부터 엽연채를 기다리고 있다가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더니 얼른 그녀를 맞이하러 갔다. 둘은 작은 손난로를 든 엽연채를 둘러싸고 안으로 걸어갔다.
혜연이 뒤를 따르며 궁금증을 꺼내 놓았다.
“오늘 마님께서 셋째 아가씨 일을 말씀하셨는데, 셋째 아가씨를 위해 혼인 상대를 찾아보시려는 겁니까?”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모께도 알려 드리거라. 고모도 미채를 도와 신경을 써 달라고 하렴. 적당한 사람이 있으면 할머니와 상의해 보시라 하고.”
온씨는 이미 이혼을 했으니 엽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 엽미채는 십여 년 동안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렀고 두 사람 사이에는 정이 남아 있지만, 온씨는 이미 명분을 잃었기 때문에 엽미채의 혼사는 묘씨에게 맡으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엽연채는 수화문을 넘으며 오늘 법화사를 지나치던 관병들을 떠올렸고 괜스레 걱정이 들었다.
“참, 부군은 돌아오셨니?”
“아니요. 나리께서는 오늘 아침에 조정에 나가셨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소월의 대답에 혜연과 청유는 서로 시선을 맞췄고 둘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엽연채 역시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지만 티 내지 않고 이렇게만 말했다.
“아마 궁에 계실 거다. 소월이 넌 이곳에서 나리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라. 그리고 나리가 돌아오시면 바로 내게 와서 알리거라.”
“예.”
소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 *
그 시각, 주운환은 정말로 궁 안에 있었다.
오늘 이른 아침 조정에 나간 그는 퇴청할 때 정선제의 부름을 받고 그의 궁침으로 향했다.
도성에는 가랑눈이 내려 궁전 전체가 은빛 소복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아주 맑고 투명하게 빛나 아름답기 이를 데 없었다. 물론 밖에서 문을 지키는 궁녀와 환관은 추워서 숨을 쉴 때마다 하얀 김이 나왔지만, 감히 쓸데없는 동작을 취할 수는 없었다.
그에 반해 정선제의 궁침은 화장火牆 덕분에 훈훈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또 짐승의 머리 모양이 달린 화로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어 약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오늘은 모처럼 정 황후와 태자가 궁침에 없었다. 방 안은 다소 조용했지만 느긋하게 책을 읽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문을 지키는 환관과 궁녀는 그 목소리를 듣더니 저도 모르게 안쪽을 쳐다봤고 진서후는 과연 장원 출신답다고 속으로 감탄했다. 정말 듣기 좋은 미성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맑고 상쾌하며 고상한 분위기가 담겨 있어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다.
정선제는 침상 위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괴롭게 기침을 두 번 했다.
그러자 곁에 앉아 있던 주운환이 손에 들고 있는 『효경』을 내려놓고는 얼른 정선제의 등을 살며시 두드려 줬다.
“폐하, 누워서 쉬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선제는 기침을 두 번 더 하더니 힘없이 손사래를 쳤다.
“짐은 괜찮다. 오늘은… 이 정도면 기운이 있는 편이다.”
그러나 정선제의 목소리는 심하게 잠겨 있었다. 주운환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한쪽에 놓인 구룡九龍을 새긴 조칠彫漆 원탁으로 걸어갔고, 찻물을 따라 가지고 돌아와 정선제에게 조금 먹였다.
정선제는 찻물을 마시더니 그제야 조금 편안한 느낌이 들어 훅 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기쁘고 안심이 되는 듯한 눈빛으로 주운환을 쳐다봤다.
“네가 비적 떼를 체포해 또 큰 공을 세웠으니 원래는… 캑캑! 짐이 네 공로를 치하했어야 하는데……. 짐이 시름시름 앓고 있어 네가 돌아온 후로 명절이 다 끝나가는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늘은 이리 정신이 들어 널 볼 수 있게 되었구나. 지금 네가 비적 떼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써서 욕보고 있다지.”
“소신은 괜찮습니다. 폐하께서 건강하시고 만복萬福을 누리시기만 하면 신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축하이옵니다.”
“좋은 아이구나.”
정선제는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고 주운환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주운환과 함께 있으니 정선제는 따뜻함과 편안함이 느껴졌다. 특히 운하를 빼다 박은 주운환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가 꼭 운하의 환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아니, 환생이 분명했다.
운하가 이렇게 자신의 곁에 있어 준다는 생각만 하면 정선제는 기껍고 마음이 놓였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몸이 점점 더 허약해지고 있다는 걸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그의 삶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머지않아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소 황후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소 황후…….’
그녀를 생각하자 정선제는 마음이 뒤엉키며 괴로웠다.
그러다 문득 양왕이 떠올랐다.
‘그 불효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양왕이 도성을 떠났으니 소 황후는 화가 났을까? 하지만 이게 다 그 불효자가 먼저 불효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자신은 대제의 황제이자 천하의 주인인데 양왕이 대제에 환란을 가져오는 걸 어찌 그냥 놔둘 수 있겠는가?
소 황후는 천하를 마음에 품고 있었으니 분명 천하에 화란이 일어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걸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이해하지 않을까?’
정선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주운환을 쳐다봤다.
‘이 아이는 분명 운하의 환생일 것이다.’
운하는 세상을 떠난 후 분명 소 황후를 만났을 것이고, 어쩌면 소 황후의 부탁을 받고 다시 대제 사람으로 환생해 그의 곁으로 돌아와 그에게 충정을 바치고 효도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운환은 운하와 소 황후를 대신해 자신을 용서하고 앞으로 태자를 보필해 함께 대제의 휘황찬란한 미래를 건설할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정선제는 눈시울이 조금 붉어지더니 또다시 기침을 심하게 두 번 했다.
주운환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정선제를 똑바로 앉힌 다음 부드러운 베개를 몸 뒤에 받쳐 주며 그가 침상에 기댈 수 있게 해 줬다.
“폐하, 이러면 좀 편하십니까?”
“그래, 괜찮구나.”
정선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주운환을 물렸다.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 보고 다음에 또 오거라.”
“예.”
주운환은 대답을 하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그가 몸을 돌려 두 발짝을 내딛는데 뒤에서 정선제의 그 갈라지고 힘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운환아……. 짐은… 널 아들처럼 생각한다.”
깜짝 놀란 주운환이 정선제를 돌아보니 병이 위중해 여위어 보이는 그의 얼굴에 고단하고 슬픈 기색이 역력했다. 주운환은 어째서인지 가슴이 조금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정선제를 향해 공수하며 말했다.
“폐하도 제게 있어서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십니다.”
정선제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주운환의 이 말은 황제에 대한 존경심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아챘으면서도 그는 어째서인지 가슴 가득 감동이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콜록콜록, 이만 나가 보거라. 그리고 내일 또 오거라. 짐이 요 며칠… 기운을 좀 차렸는데 그 누구도 보고 싶지 않구나……. 짐은 너만 보고 싶단다.”
“예.”
주운환이 말을 마치자 정선제는 손을 저었고 그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정선제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으니 눈이 시큰거렸다.
“폐하.”
이때, 채결이 안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정선제를 부축하여 침상에 눕혔다.
“폐하. 요 며칠 몸 상태가 아주 좋으십니다. 그러니 밖에 나가서 햇빛을 많이 쬐셔야 합니다. 올해는 명절을 쇠면서 연회를 열지 않았으니 폐하의 상태가 좋아지면 그때 떠들썩하게 연회를 여시지요.”
그러자 정선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짐은 짐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사람은 임종 전에 얼마간은 정신이 아주 또렷하다고 하지 않더냐?”
그러더니 낙천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채결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밖에 서 있던 태자도 정선제의 이 말을 들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태자는 가슴이 미어졌다. 보아하니 부황父皇에게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시간이 말이다.
“아. 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채결이 고개를 돌렸다.
정선제가 눈을 들어 보니 태자는 잘생기고 기품 있는 얼굴에 수심을 가득 담은 채 눈시울은 붉히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태자, 넌 황태자이니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드러내서는 안 된다.”
태자는 흠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소자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슬픈 기색이 비쳤다.
정선제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태자가 자신의 병과 죽음 때문에 상심하고 고통스러워하니 한편으로는 아주 기쁘고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자신이 후계자는 제대로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선제가 마른기침을 거듭하자 태자가 얼른 그에게 다가와 등을 두드려 줬다.
이윽고 기침을 멈춘 정선제가 정사에 대해 물었다.
“비적 떼 일은 제대로 조사하고 있느냐?”
그러자 채결이 몸을 살짝 굽히고는 이렇게 말했다.
“소인, 그 일을 보고 드리려는 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