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614화 (614/858)

제614화

“황제 폐하께서 삼사가 함께 조사하라고 명하셨소.”

요양성은 그리 말하며 냉소를 지었다.

“이미 그리되었으니 우리는 앞으로 관여하지 맙시다. 안 그러면 우리가 진서후를 겨냥했다고 여길 것이고, 그럼 그 일이 드러날 것이오. 지금 진서후도 분명 의심이 들었겠지만, 그래 봤자 뭐 어쩌겠소? 유일한 증거는 홍광수의 그 주둥이인데!”

요 노부인은 버들잎 모양의 고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마 지부와 그 쓸모없는 비적 놈들을 탓해야죠! 제대로만 했다면 그 서자 놈은 이미 동우산에서 죽었을 거예요. 차라리 계획이 실패했을 때 다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 살아남아서는.”

요양성의 얼굴이 살짝 경직됐다.

요 노부인의 말대로 홍광수와 욱휘는 살아남아 추포됐다. 그들이 죽었다면 그를 조사할 수 없을 텐데 하필 목숨을 부지하였고 감옥 안에 갇혔다.

그러나 지금 홍광수는 감히 요양성의 일을 자백할 수 없었다. 자백을 하게 되면 생환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요양성은 형부상서이고 홍광수는 형부에 갇혀 있으니, 원래라면 그를 빼돌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 주운환이 금위군의 방어진을 치면서 일이 복잡해졌다.

요양성은 가까스로 금위군 한 명을 매수했고, 방어진을 손에 넣은 그는 계략을 써서 비적 떼의 잔당들을 궁 안으로 들여 나머지를 구출했다. 구출해 낼 수 있다면 자신은 위험에서 벗어나는 거고 구출하지 못하면 주운환을 모해하게 되니, 손해는 조금도 보지 않는 일이었다.

“앞으로의 일은 준비를 해 뒀습니다.”

“알겠소.”

요 노부인의 말에 요양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묘책 덕분이오.”

요 노부인은 매서운 눈빛을 번득였다.

“전 연이를 해치는 자는 그 누구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 * *

정선제는 삼사가 함께 조사하라고 했지만 주운환의 자유를 제한하지는 않았다. 하여 주운환은 여전히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엽연채는 주운환의 일을 생각하니 아무래도 조금 불안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자 주운환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조정에 나갔고,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에 가까워지자 소월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님, 셋째 아가씨가 오셨습니다.”

‘미채가?’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더니 이어 미소를 지었다.

“어서 안으로 들이거라.”

청유는 까르르 웃더니 이렇게 제안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제민 소저와 남옥 소저 두 분 다 집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으시고 마님께서도 다른 사람들을 맞이하는 건 귀찮아하셔서 아주 적적해하셨잖아요. 그런데 모처럼 셋째 아가씨가 오셨으니 이곳에서 며칠 머무르게 하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 차를 준비했다. 문 입구로 걸어가자 엽미채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청유는 얼른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셋째 아가씨. 자주 오세요. 집안에 사람이 적어 너무 조용하거든요.”

“하하, 알겠어. 앞으로 자주 큰언니를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구나.”

엽미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엽연채는 동생을 보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왔구나.”

엽미채는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 옆에 앉더니 그녀의 배를 쳐다보며 말했다.

“큰언니, 이제 4개월이죠?”

“그래.”

“명절도 벌써 절반 이상 지났잖아요. 그런데도 저희는 아직 사찰에 가서 선향線香을 꽂고 등불 기름을 채우지 못했으니, 어때요? 서운사에 가서 향불을 피우고 싶은데 큰언니도 가실래요?”

엽미채는 기대로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서운사?”

엽연채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이렇게 말했다.

“언제 가고 싶은데?”

“정월 대보름에요.”

‘서운사에 가서 향불을 피운다? 정월 대보름에?’

엽연채는 입꼬리를 삐죽거리더니 이어 표정이 싹 굳었다.

‘이때였었지!’

서운사에 관한 기억은 좋은 게 없었다. 그녀에게 서운사는 그야말로 악연이 가득한 사찰이었다.

장박원과 엽이채가 서운사에서 눈이 맞았을 뿐만 아니라 전생에서 엽미채도 남은 인생을 이곳에서 망쳐 버리고 말았다.

전생에서 이맘때쯤 엽연채는 이미 별채로 보내진 상태였지만 추길이 그녀의 시름을 달래 주기 위해 도성에서 벌어진 잡다한 일들을 그녀에게 이야기해 줬다. 당연히 근심거리는 보통 그녀에게 전해 주지 않았다.

더 많은 일들, 특히 안 좋은 일들은 모두 나중에 엽균이 은정랑 모자에게 당한 뒤 달려와 한바탕 쏟아 내면서 알게 되었다. 엽균이 그따위 이야기들로 그녀를 열받게 하지 않았다면 며칠 뒤에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 엽균은 엽미채 이야기도 했었다.

“우리 남매야 그렇다 쳐도 미채 그 계집애도 참 변변치 못해. 아무도 그 애를 건드리지 않았잖아.

그런데 정월 대보름에 서운사로 향불을 피우러 갔다가 하산 도중에 마차가 고장 나 어떤 몰락한 가문의 둘째 공자와 마주치게 됐단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둘이 눈이 맞은 거야. 불이 확 붙은 게지!

걔가 뭐라고 했는지 아니? 네가 무슨 대갓집의 적자이자 3품 고관의 적장손에게 시집을 가려다가 그 꼴이 났으니 자기는 감히 부귀한 집안이나 후부 같은 집안은 고를 수 없을 거라고 하더라. 이런 가난한 집안이라면 자신을 감히 업신여기지는 못할 거라고 좋다 하더구나.”

하지만 한 사내가 시시한지 아닌지는 집안 배경이나 빈부와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엽미채가 시집을 가자 시댁에서는 그녀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입만 열면 엽씨 가문 여인들은 천하다고 욕했다. 한 명은 사내 하나도 붙들어 놓지 못하고 다른 한 명은 형부를 유혹했으니 엽미채도 좋은 여인은 아닐 거라고 말이다.

이렇듯 그녀의 시어머니는 온종일 욕을 퍼부어 댔다. 자신의 아들은 이렇게 훌륭한 용모와 인품을 가졌으니 부귀한 집안의 여식을 아내로 맞이해야 했는데 고작 서녀인 엽미채를 아내로 맞이했으니 정말이지 재수가 옴 붙었다고 하면서 말이다.

엽미채가 자신의 아들을 유혹했으며 자신의 아들에게는 어울리는 짝이 아니라는 둥 온갖 험담을 다 해댔다.

당시 엽승덕은 막 소원을 이룬 상태였다. 은정랑을 아내로 맞이했으니 엽미채 일에 신경 쓸 리가 없었다.

그리고 엽학문의 마음은 온통 허서에게 향해 있었다. 그는 허서가 과거 시험에 붙어 벼락출세하기를 바랐고, 서출인 손녀는 상대하기 귀찮았다.

결국 엽미채의 혼인 생활은 그야말로 도탄에 빠진 것과 다름없어졌다. 매일 시어머니에게 구박을 당했고, 남편은 감히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모친 앞에서 설설 기었다.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는 엽연채도 모른다. 그녀는 그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엽연채는 그 생각을 하며 살짝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서운사에 가자고? 거기가 가 볼 게 뭐가 있니. 차라리 법화사에 가는 건 어때?”

“왜요? 서운사가 더 가까워요. 그리고 전에는 저희 모두 그곳에 가는 걸 좋아했잖아요.”

“거긴 문제 있는 남녀들이 만남을 갖는 장소란다.”

엽연채는 대놓고 이렇게 말하며 서운사에 대해 깊은 혐오감을 드러냈다.

“엽이채와 장박원도 그곳에서 밀회를 가졌었지.”

엽미채는 표정이 굳어졌다.

“그럼… 서운사에 가지 않을래요. 어째 들을수록 불길한 느낌이 드네요.”

엽연채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월 대보름에 가는 것도 별로인 것 같아. 너무 붐비잖아!”

“아, 그럴까요?”

엽미채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금세 수긍했다.

“그럼 큰언니가 다른 날짜를 골라 보세요. 그런데 열나흘은 듣기에 별로이고 열사흘은 외출하기에 적당치 않아요.”

“그럼 내일과 모레 중에는 어떤 날이 괜찮니?”

“제가 책력을 뒤져 보니 내일이 길일이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보름을 제외하고는 제일 좋은 날이에요.”

엽미채의 대답에 엽연채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과 장소를 단번에 모두 틀어 버렸다. 좋은 사람이 아닌 이상 안 만나는 게 상책일 것이다.

“그럼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 셋째 숙모랑 고모도 부르자.”

“고모는 달수가 꽤 차서 외출하지 못하실 거예요. 그리고 할머니와 셋째 숙모는 고모할머니 댁을 방문하려고 도성 밖으로 나가셨어요. 또 어머니는 오라버니를 데리고 능주의 그 나이 든 의원을 보러 가시지 않았어요?”

엽연채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온씨와 엽균 생각이 떠올랐다. 엽균의 다리는 전에는 아주 심하게 삐뚤어져 있었는데 능주에서 노의원에게 치료를 받더니 상태가 많이 호전됐다.

지금도 완벽하게 회복된 건 아니고 앞으로도 그건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아주 안정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유심히 쳐다보지 않으면 다리를 저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좋아진 것이다.

온씨는 그 나이 든 의원에게 크게 고마워했고 그래서 며칠 전에 엽균을 데리고 외출해 직접 그 의원을 보러 갔다.

“큰언니, 그래도 저랑 함께 갈 거죠?”

엽미채가 밝은 표정으로 물었지만 엽연채는 얼굴을 굳혔다.

“글쎄. 시간이 안 날 것 같네.”

엽미채 일도 일이고 요즘 주운환이 조사를 받고 있으니 그녀는 외출을 삼가는 편이 좋았다. 속사정을 모르는 엽미채는 실망해 울상을 지었다.

“나리.”

이때 밖에서 소월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는 어리둥절했다.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셨지?”

금세 주운환이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고 그는 엽미채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형부.”

엽미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렸다.

“내일 향불을 피우러 가고 싶다고 했는데 큰언니가 시간이 없다고 하네요.”

그녀는 상심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에 주운환은 엽연채를 쳐다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가도 좋습니다.”

엽연채는 눈을 들어 그를 보더니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요즘…….”

“괜찮습니다.”

주운환은 그녀 옆에 앉더니 이렇게 다독였다.

“아무 데나 막 돌아다니지만 않으면 됩니다. 사찰에 가는 건 별일 아니니, 부인도 밖에 나가서 바람도 좀 쐬어야 좋지 않겠습니까?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안 됩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입으로는 두렵지 않고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도리어 생각이 더 날 것이다. 우울한 감정은 임산부에게 좋지 못하니 차라리 밖에 나가서 바람을 쐬는 편이 나았다.

“알겠어요.”

그가 분명히 말을 해 주자 엽연채는 눈웃음을 쳤다. 하기야 자신이 하루 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다고 그를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사찰을 다녀오는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닐 성싶었다.

엽미채는 기뻐하며 말했다.

“그럼 민이 언니도 부를게요.”

“그래, 그렇게 하자.”

기분이 확 좋아진 엽연채도 따라서 까르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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