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3화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자, 아바마마의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말과 달리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황제의 치세나 견제와 균형의 기술은 그도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아는 것과 실행에 옮기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오늘도 주운환을 편애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요양성이 너무도 혐오스러워 그리 행동했던 것이다.
“그래.”
정선제는 아직도 서투른 태자의 모습을 보며 황제 노릇을 어떻게 할까 하는 염려에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금 우쭐한 마음도 들었다. 아들이 자신만큼 총명하고 원대한 식견을 갖추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콜록, 이 일은 건성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기억하거라……. 이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수없이 많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다. 혐의가 있는 이상 제대로 조사해 진상을 밝혀내야 한다…….
네 손에 쥔 검을 그자에게 넘겨야 한다는 걸 항상 기억하거라! 그러니 더욱 조사해 봐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사실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예! 소자, 아바마마의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태자도 속으로 뜨끔했다.
‘만약 주운환이 정말로 비적 떼와 결탁한 것이라면…….’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그가 무슨 이유로 비적 떼와 결탁하겠는가?
아무튼 지금은 일단 조사하는 게 맞았다. 주운환을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
정선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더니 힘없이 침상 위로 쓰러졌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태자는 아연실색했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여봐라. 태의를 부르거라!”
정 황후는 얼른 밖을 향해 소리쳤고 어린 궁녀는 이미 밖으로 뛰어나간 뒤였다.
잠시 후, 나 의정이 태의 몇 명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고 태의들은 침을 놓고 약을 먹이며 한참을 분주히 움직였다.
태자와 정 황후는 발을 동동 굴렀고 나 의정 등이 처치를 끝내자 태자는 그제야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 됐는가?”
“너무 무리해서 혼절하셨습니다.”
나 의정은 그리 말하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이런 상태가 얼마간 지속될 것 같은가?”
태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의정, 내게 솔직히 말하게나.”
그에 나 의정은 작은 목소리로 고했다.
“전하, 용서해 주시옵소서. 황제 폐하는… 아무래도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이번 달을 넘기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태자는 화들짝 놀랐고 마음속에서 온갖 감정이 교차했다. 마음이 아프면서도 조금은 기대가 됐지만 이 작은 기대감은 금세 사그라졌다.
“의정이 이미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고 있네. 내 어찌 그대를 책망할 수 있겠는가? 의정은 돌아가서 치료할 방도가 있는지 더 연구해 보게.”
나 의정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태자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 의정은 상심한 태자의 모습을 보고는 감히 별다른 말은 더 하지 못했고 직접 정선제를 위해 탕약을 끓이겠다는 말을 하고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 * *
하늘에서는 또 가랑눈이 내렸다. 주운환은 말에 올라 고개를 들어 보더니 큰 눈이 내리는 건 아니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황궁을 떠났다.
진서후부의 수화문에 도착하자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소월이 기뻐하며 달려 나왔다.
“나리, 돌아오셨군요.”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은 뭘 하고 계시냐?”
소월은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답했다.
“마님께서는 지금 어린 세자를 위해 옷을 만들고 계십니다. 오늘 아침에 어떤 형태로 만들 건지 저희와 상의를 하셨거든요.”
주운환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 엽연채와 곧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자 그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주운환은 몸을 돌려 말에서 내린 후 말채찍을 여한에게 던지더니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운연거 안, 혜연과 청유는 얇은 나선형 무늬가 들어간 기다란 배나무 탁자 앞에 몸을 숙인 채 수본을 그리고 있었고 엽연채는 탑상에 앉아 두 사람이 수본을 그리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님, 이번에는 작은 호랑이 무늬를 수놓을게요.”
혜연의 말에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이리 당부했다.
“기왕이면 좀 귀엽게 놓거라. 여자아이여도 입을 수 있게 말이다.”
“어, 나리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이때 청유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엽연채가 밖을 쳐다보니 키 크고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성큼성큼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밖에서 묻어 온 한기가 방 안의 따스한 기운을 조금씩 옅어지게 했다.
엽연채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하러 갔고 그가 입고 있는 소매 없는 외투를 벗겨 주며 말했다.
“왜 또 말을 타고 온 거예요? 이런 날씨에는 가마나 마차를 타야죠.”
한겨울이라 밖에는 살을 에는 듯한 찬 바람이 불지 않는가. 그가 바람과 눈을 맞으며 오느라 이렇게 꽁꽁 얼어 있는 모습을 보니 엽연채는 마음이 아팠다.
“전 말 타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주운환은 대수롭잖게 대꾸했고 엽연채는 그런 그를 타박하듯 재차 말했다.
“그래도 그렇죠. 이거 봐요. 방 안에 들어왔는데도 한기가 남아 있잖아요.”
주운환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를 안심시키려 했다.
“마차를 타고 돌아온다 해도 수화문에서 방으로 걸어오는 길에 한기가 스밀 것이니, 마찬가지입니다.”
엽연채는 조그만 입을 삐죽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다르죠. 부군이 오는 내내 말을 타면 한기가 부군의 내의 속으로 스며들지만, 마차를 타면 수화문에서 여기까지만 걸어오니 한기가… 겉에 입은 외투에만 스며들었을 거예요! 봐요. 여기…….”
그녀는 주운환이 입고 있는 소매 없는 담비 털 외투를 마저 벗겼고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쳐다보며 웃었다. 복숭아꽃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말이다.
“밖에서 다 막아지니 한기가 내의 속으로 스며들 수가 없죠.”
주운환은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부인은 어쩜 이리 똑똑합니까?”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품으로 끌어안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그녀의 희고 보드라운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함께 탑상으로 걸어갔다.
“그럼 앞으로는 외출할 때 마차나 가마를 타겠습니다.”
“그러기로 한 거예요!”
엽연채는 기뻐서 흥얼거렸다.
혜연과 청유는 어린 부부가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혜연은 엽연채가 손에 들고 있는 소매 없는 외투를 건네받은 후 눈치 있게 청유와 함께 자리에서 물러났다.
부부 두 사람이 나란히 탑상에 앉았다.
“오늘은 무슨 일로 바빴던 거예요? 왜 시일을 당겨 개인한 거죠?”
주운환은 멈칫하더니 조정에서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알려 줬다.
이런 일을 숨긴다면 오히려 그녀는 더욱 걱정을 할 것이고, 결국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하게 될지도 몰랐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 빠졌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많은 편이 나았다. 사정을 몰라서 아군에게 불리한 일을 하게 된다면 득보다 실이 많을 테니 말이다.
“비적 떼와 마 지부와 결탁한 사람이 바로 요양성이죠!”
조정에서의 일을 전해 들은 엽연채는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
요씨 가문은 아마 주씨 가문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칠 것이다.
전에 요양성은 주운환과 첨예하게 대립했고 주운환이 출정할 때 요양성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정치적 견해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 대수롭지 않은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주운환은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고 대제의 영웅이 되었다. 변경을 수호하고 비적 떼를 토벌해 평판이 한층 더 좋아졌고 그야말로 황제와 태자에게 가장 총애를 받는 중신 중의 중신이 되었다.
그런데 태자는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보면 의리도 저버리는 소인배라 주운환이 더 유능해 보이자 바로 주묘서를 측비로 들였다. 그리고 그 후, 주묘서는 온갖 방법으로 태자비를 억눌렀다.
그것까지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는데, 나중에 춘화도 사건이 터지자 태자비는 아예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직접적인 까닭은 태자비가 주묘서와 싸우려다가 그리된 것이 아니라 엽연채가 반격을 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태자비는 묵사발이 되어 버렸다. 애처롭게도 앞으로 영원히 황후의 자리와는 인연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요씨 가문은 태자에게 버림받은 말이 되었다.
이러니 요양성이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태자비와 마찬가지로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냈다. 바로 주묘서의 뿌리인 주운환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비적 떼, 그리고 마 지부와 결탁해 동우산에서 주운환을 독살하려고 했다.
“전에는 추측만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거의 확신할 수 있게 됐어요.”
엽연채의 말에 주운환은 하 하고 냉소를 지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건 이런 수단뿐이니까 그렇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내가 있지 않습니까.”
“네, 알겠어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주운환 부부가 상의를 하고 있는 사이, 요씨 가문 서재에서도 요양성과 요 노부인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요양성이 퇴청하자마자 요 노부인은 서재로 뛰어 들어왔다.
“나리, 태자 전하께서 조사하겠다고 하셨어요?”
요양성은 탁자 앞에 앉아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잘난 사위 눈에 어디 우리가 들어 있기나 하겠소?”
요 노부인은 대번에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성난 목소리를 냈다.
“그 고얀 것! 연이에게 장가를 올 땐 굳게 맹세를 하며 그리 사탕발림을 해대더니……! 인정이 야박한 놈에 불과했군요!”
“됐소.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오.”
요양성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공적인 일은 원래 요 노부인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일은 공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태자비의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 친어머니인 요 노부인이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온종일 주운환을 타도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요양성은 이전의 동우산 일이 실패로 끝나자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 노부인이 와서 계책을 내놓았고 마침 그가 앞으로 취할 행동과 맞아떨어지자 요양성은 동우산에서의 일을 그녀에게 알려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