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2화
“전하!”
요양성은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장찬과 진서후는 친척입니다. 의심받을 행동은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양성은 그리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고 애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태자는 끝까지 훼방을 놓으려 하는 요양성 때문에 화가 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무엄하다! 난 장찬이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할 것이라고 믿는다.”
“전하…….”
요양성은 눈물을 흘렸다.
여지와 유 재상 등은 요양성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고 고개를 가로젓더니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종병과 상관수 등은 저도 모르게 요양성에게 조금 동정심을 느끼며 태자를 쳐다봤다.
요양성은 원래 태자가 가장 신임했던 신하로, 당시 태자부 역시 그녀의 딸인 태자비가 장악하고 있었으니 한때 대단한 권세를 누렸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운환이 부상하자 태자는 주묘서를 측비로 들였고 태자비는 폐위된 것과 마찬가지의 처지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 태자는 요씨 가문을 내쳐 버리고 주운환을 총애하고 신임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새 사람이 생기면 옛 사람을 잊는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태자비든 주묘서든, 요양성이든 주운환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하.”
가장자리에 있는 주운환은 이 상황을 지켜보며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어째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자신은 부당한 방법으로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죄가 있는데도 태자를 기만하고 역성을 들게 만든 악당이 자신이란 말인가?
“전하,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시면 아니 되옵니다.”
요양성이 무릎을 꿇고 절절히 말했다.
“전하,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시면 아니 되옵니다!”
왕성촌도 무릎을 꿇었다.
“이 일을 처리하는 데 의심받을 행동은 반드시 피하셔야 하옵니다.”
병부상서 오봉은 요양성의 말에 감동을 받은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어 유 재상, 상관수 등 조정 신하들 모두 태자를 향해 공수했다.
“이, 이런……!”
태자는 대로해 표정이 굳어지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는 경당목을 힘껏 두드리며 분통을 터트렸다.
“무엄하다!”
“전하…….”
그래도 요양성은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팽팽한 대치가 이어지니 대전의 분위기는 아주 살벌했다.
뒤에 서 있는 4품, 5품의 소관들은 감히 찍소리도 내지 못했지만 요양성의 충성심에 감동을 받았다.
대전 안은 태자가 간신의 꾐에 넘어가고 충신은 탄압받고 있다는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요양성은 태자의 나이 든 장인이었다. 지금 태자비는 이미 폐위된 것이나 매한가지였고 주묘서는 오만방자하게 그 자리에 올라 소인배의 행동을 한껏 보여 주고 있었다.
태자의 안방이든 조정이든 전부 간사한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새롭게 등장한 자는 웃음 짓고 기존 세력은 울상을 짓는 비참한 국면이었다.
“이런 고얀 것들!”
태자는 큰 소리로 그들을 꾸짖었다.
‘이 늙은 것들이 감히 날 핍박하다니!’
그가 노여워하며 큰소리를 치자 대전 안이 웅웅 울렸고, 요양성은 정말 슬프고도 서러워 얼굴에 쓴웃음을 띠었다.
이대로 가면 요양성은 태자에게 처벌을 받을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이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하, 채 공공이 왔습니다.”
태자는 어리둥절했고 대전 안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깜짝 놀랐다.
‘채결이 왔다니!’
그는 정선제를 곁에서 모시는, 가장 신임받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정선제 곁에서 그의 시중을 들고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갑자기 이곳에 왔다? 지금 이 일이 정선제의 귀로 전해진 게 분명했다.
정선제는 병이 위중하기는 하나 이따금씩 정신을 차리곤 했다.
태자는 깜짝 놀라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안으로 들이거라.”
잠시 후, 채결이 안으로 걸어 들어와 태자를 향해 공수했다.
“전하, 황제 폐하께서 진서후와 비적 떼의 일을 이미 들으셨습니다.”
그러자 태자의 준수한 얼굴이 살짝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아바마마께 심려를 끼쳐 드렸군.”
채결은 돌아서서 주운환을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폐하께서는 당연히 진서후를 믿고 계십니다. 어떻게 비적들이 하는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하나 어쨌든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응당 진서후의 결백을 밝혀야 합니다. 안 그러면 진서후에게 오점이 남을 겁니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말씀이 맞소.”
“진서후는 결백하시니 모든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시죠. 요 대인도 이런 뜻이시겠죠!”
“물론이오.”
채결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고, 요양성은 눈물을 닦으며 끼어들었다.
“이 노신은… 일편단심 전하와 폐하를 위해 생각합니다…….”
태자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대리시경은 성격이 강직하여 타인에게 아첨하지 않는 분이라 전하께서 이 점을 고려하셨던 것이니 의심받을 행동은 피해야 한다는 말은 당치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결코 누군가를 두둔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폐하께서 이런 큰 소란이 벌어졌고 진서후의 결백과 명예에 관한 일이니 제대로, 분명하게 조사하여 처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여 대리시와 형부, 어사대가 함께 이 사건을 조사하여 처리하라고 결정하셨습니다. 전하, 이리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채결이 정선제의 뜻을 전하자 태자는 재차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 말은 그의 체면 역시 제대로 살려 줬다.
아래에 있는 대신들도 깜짝 놀랐다.
‘삼사三司가 함께 조사한다니!’
사람들은 삼사가 함께 조사한다는 말에 하나같이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수년 동안 이런 경우가 없었으니 말이다. 대단히 중대한 사건을 다룰 때에만 이런 식으로 삼사가 머리를 맞대는 법이었다.
지금 비적 떼와 주운환의 일 사이에 연결 고리가 없다곤 할 수 없으나 비적의 말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그저 단서가 나온 것뿐이니 이치대로라면 형부나 대리시에 넘겨 처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형부는 주운환의 적수인 요양성이 맡고 있고, 대리시경은 주운환의 친척이 맡고 있었다.
하여 공정성을 보이기 위해 아예 어사대를 더해 삼사가 조사하게 한 것이었다.
고작 단서 하나만으로 삼사가 조사를 하게 했으니 다른 사람이 이 상황에 놓였다면 모욕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운환에게는 달랐다. 오히려 그가 공정한 조사를 받게 해 주기 위해 이러한 방식이 적용된 것이다.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채 공공 말이 아주 일리가 있군.”
채결은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다시 주운환을 쳐다보고 말했다.
“진서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항상 제일 공평하고 공정한 분이셨소.”
주운환은 차분한 목소리로 수긍하겠노라 뜻을 밝혔다.
“아주 적절한 방법이니, 저는 더 이상 이의가 없습니다.”
요양성도 공수를 하며 한껏 불쌍한 표정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요 대인의 충성심은 황제 폐하께서도 당연히 알고 계십니다.”
채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태자에게 말했다.
“전하, 그럼 계속하시지요.”
“공공이 수고가 많네.”
이렇게 이 일은 해결됐지만 태자는 속으로 화를 잔뜩 참고 있었다. 자신의 뜻대로 일을 해결할 수 없고 제약을 받아야 한다는 데서 불쾌감을 느낀 것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오늘 시일을 당겨 개인했던 건 전부 주운환과 비적 떼의 사건 때문이었다. 이제 사건은 이미 삼사에 넘겨진 셈이었고 따로 남아 있는 일도 없으니 태자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몇 마디 하고는 사람들을 전부 퇴청시켰다.
* * *
태화전을 나온 태자는 곧장 정선제의 궁침으로 향했다.
정선제는 요즘 들어 병세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춘절을 쇠기 전까지만 해도 날마다 깨어나곤 했는데 춘절을 쇠는 며칠 동안은 어떤 때는 하루에 몇 시간도 채 깨어 있지 못했다. 그를 진단한 태의들은 전부 정선제가 올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태자는 상심하면서도 은근히 기대가 됐다.
하지만 상심이 더 크기는 했다. 어쨌든 정선제는 어릴 때부터 그를 애지중지하고 한 걸음씩 그를 지금의 자리로 인도해 준 연로한 아버지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태자는 지금 정선제가 깨어났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정교하게 꾸며진 밝은 황색 빛깔의 궁침으로 걸어 들어가자 짙은 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태자가 미간을 살짝 구긴 채 침실로 들어가 보니 저 멀리 정 황후가 침상에 앉아 정선제에게 약을 먹이고 있었다.
“아바마마!”
태자는 그 모습을 보자 눈시울이 붉어져서는 얼른 걸어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아바마마,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소자, 이제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선제는 힘겹게 시선을 옮겼다. 지치고 무력한 눈빛을 태자의 얼굴로 향한 후에 한참 동안 안간힘을 쓰고 나서야 마침내 입을 열 수 있었다.
그가 쉰 목소리를 냈다.
“태자… 캑, 캑캑……!”
“아바마마!”
태자는 그가 심하게 기침을 하자 깜짝 놀라더니 무릎을 꿇은 채로 얼른 앞으로 다가가 정선제를 부축했다.
“아바마마, 몸이 편치 않으시니 푹 쉬셔야 합니다. 더는 말씀하지 마세요.”
“쿨럭쿨럭……!”
그러나 정선제는 그의 손을 꽉 잡고 거절했다.
“지금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마 앞으로는 말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바마마. 그런 말씀 마세요. 올해만 넘기시면 분명 좋아지실 겁니다.”
곁의 정 황후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는 하늘이 보우하실 겁니다…….”
“캑캑… 됐소……. 짐의 몸이 어떠한지는 짐이 잘 아오.”
정선제는 그리 말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태자는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짐은 황후와 태자를 떠나기 아쉽다오……. 아직 네게 가르쳐 주지 못한 게 많은데 말이다.”
정선제는 그리 말하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 일은 너무 경솔했다… 쿨럭……! 아무리 진서후를 믿는다 해도 덮어 놓고 그를 두둔해서는 안 된다.”
“아바마마, 이 일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요양성이 일을 크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진서후를 겨냥한 게 틀림없습니다.
“쿨럭쿨럭……!”
정선제는 고개를 저었고 태자는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아바마마…….”
정선제가 이어서 말했다.
“짐은… 네가 진서후를 중용하기를 바란다. 그자는 보기 드문 귀한 장수다! 나라의 큰일을 떠맡은 자고,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우리 대제의 안위는 그자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런 자를… 쓰려면 존중도 필요… 하지만 너무 과하게 추켜세우고 의지해서는 안 된다. 자칫 품어서는 안 되는 생각을 갖게 될 테니까. 그러니 공평하고 공정하게 처리하라는 것이다. 오늘 일은… 캑캑… 네가 그를 편애한 것이고 요양성도 너무 억누르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