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1화
“그저께 저녁에 비적 떼의 잔당이 궁으로 들어와 나머지들을 구출하려고 했소. 쥐도 새도 모르게 형부의 감옥으로 들어왔는데 제때에 발견하지 못했다면 홍광수 등은 이미 구출됐을 것이오.”
“아이고!”
태자의 말에 아래에 있는 조정 신하들은 깜짝 놀라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여지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가장 먼저 입을 뗐다.
“비적들이 황궁으로 들어오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옵니까? 게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말이죠.”
요양성은 주운환을 쳐다보며 냉소를 지었다.
“그건 진서후에게 물어봐야겠군요. 궁 안은 금위군들이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형부의 방어진을 치는 일을 진서후가 책임지고 있으니까요. 형부의 포졸들이 재빨리 눈치채지 못했다면 홍광수는 이미 도망쳤을 겁니다.”
주운환 역시 찬웃음을 띠며 맞받아쳤다.
“제가 책임을 진 건 맞지만 어떻게 방어진을 치는지는 망을 보는 금위군들에게 알려 줬어야 했습니다.”
태자는 주운환을 쓱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난 진서후를 믿소. 어쨌든 금위군은 진서후가 통솔하는 군인들이 아니잖소.”
그러자 옆에 있던 금위군 대장 상관수가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이건 그가 부하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그래서 진서후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통솔할 수 없었다는 뜻이 아닌가.
“시일을 당겨 개인한 것이 이 일 때문입니까?”
유 재상이 묻자 요양성이 싸늘한 눈빛을 번득이더니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히 아니지요. 잔당 몇 명을 체포했는데 어제저녁에 드디어 한 놈이 자백을 했습니다. 하여 그놈들에게 방어진을 쳐 주고 궁 안의 방어선을 뚫는 법을 알려준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 냈습니다.”
그러자 대전 안의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오. 초상화가 있다는 말입니까?”
여지는 허허 웃더니 요양성을 바라보았다.
“그럼 요 대인이 잘 추궁해 보시면 되겠네요.”
요양성은 음침한 표정을 짓더니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이미 해 봤지요. 저희가 감별해 보니 그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봐라, 초상화를 가져오너라.”
그러자 밖에서 어린 환관이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고 태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제 요양성이 주운환이 친 방어진에 실수가 있었다고 고한 참이었다. 태자는 요양성이 괜스레 남의 트집을 잡는다고 화를 냈지만, 나중에는 마음을 바꿔 잔당을 심문해 초상화를 얻어 냈다. 그리고 그 결과, 중대한 사안이 생겼다며 시일을 앞당겨 개인했던 것이다.
태자는 조정에서 비적 떼와 마 지부와 결탁한 사람이 누구일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 사람은 주운환에게 해를 입혔지만 감옥에 갇힌 포로에 의해 언제 제 정체가 들통날지 모르기에 잔당들과 힘을 합쳐 포로들을 구출해 낼지도 몰랐다. 그러니 배후에 있는 사람은 분명 조정 사람일 것이다.
어린 환관은 두 손에 쟁반 하나를 든 채 요양성 곁으로 걸어왔다.
요양성은 초상화를 들어 올렸다. 초상화 속 인물은 얼굴 아래쪽 절반을 가리고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었는데 예쁘고 요염한 두 눈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초상화에는 손도 그려져 있었다.
요양성이 말했다.
“잔당의 말에 따르면, 그자는 오른손에 총 여섯 개의 손가락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 저희가 일일이 조사해 보니 진서후의 부하 중에 요염한 눈매와 여섯 손가락을 가진 이가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들어 보니 이삼일 전에 진서후가 교외에 있는 매화장에서 사람 하나를 죽였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여섯 손가락을 가진 이었고 이름이 석소전이라고 합니다.”
“이런!”
대전 안은 순식간에 야단법석이 됐고 여지는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이,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요 대인, 제대로 조사하신 겁니까?”
주운환은 냉소를 짓더니 조목조목 반박하기 시작했다.
“요 대인은 정말 웃기는 분이시군요. 요 대인의 말씀은 제가 부하를 시켜 잔당들에게 길을 알려 줘 비적들을 구출하게 했다는 뜻입니까? 그런 다음에 그 부하를 죽여 입막음을 했다는 말이고요? 그 비적 떼는 제가 직접 잡아왔다는 걸 요 대인은 깡그리 잊었나 보군요! 제가 그자들을 구출할 거라면 굳이 잡아올 필요가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요양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진서후, 지금 조사 중이지 않습니까? 난 그저 사실대로 말하는 것뿐입니다. 결과가 어떨지는 철저히 조사하여 밝혀야 하는 것이고요. 난 당연히 진서후가 결백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하루속히 개인하자고 제안했던 겁니다. 제대로 조사하여 진서후의 결백을 밝혀 주려고 한 거지요.”
요양성의 말 때문에 대전 안은 이상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태자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싸늘한 눈빛을 요양성에게 보냈다.
“요 상서는 비적들이 함부로 지껄인 것만 믿고 진서후를 의심하고 있소. 이 일은 어린애 장난이 아니잖소?”
그는 그리 말하며 입꼬리를 쓱 올리며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여지는 냅다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서후가 비적 떼를 토벌했으니 당연히 진서후에 대한 원한이 뼛골에 사무칠 겁니다. 그에 분명 두 가지 상황에 대해 준비를 했을 겁니다. 자기 동료들을 구출해 낼 수 있으면 당연히 좋겠죠. 만약 구출해 내지 못해도 진서후를 모해하게 되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인 겁니다.”
그런데 어사 왕성촌이 한 발짝 앞으로 나오더니 얼른 이렇게 말했다.
“그렇긴 한데 요 상서가 말한 부분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째서 증거들이 진서후를 가리키겠습니까?”
왕성촌은 주운환이 아직 장원이었을 때 주운환이 불효를 했다고 탄핵하며 그와 원한을 쌓게 됐고, 그 후 왕 부인이 주씨 가문에서 엽연채에게 체면이 깎여 속으로 주운환을 몹시 증오하고 있었다.
이제 마침내 약점을 잡게 되었고 이치에 맞고 근거도 있으니 주운환을 물어뜯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요양성이 다시 입을 뗐다.
“저 또한 진서후를 의심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방어진과 관련된 정보가 누설됐고 비적들이 지목한 사람이 진서후의 부하인데 그 부하는 사흘 전에 곤장을 맞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조사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그 사람은 술을 먹고 허튼소리를 좀 하고 심한 말을 좀 내뱉은 것뿐인데 그런 결과를 맞았습니다. 이건 사람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왕성촌이 득달같이 말을 이어 받았다.
“진서후는 어째서 석소전을 죽여야 했을까요! 그자는 집안의 노비가 아니었습니다. 설령 집안의 노비라고 해도 이렇게 함부로 잔인하게 죽이지는 않습니다. 석소전은 양민이었습니다! 이건 사람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요양성은 비웃음 섞인 싸늘한 눈빛을 번득였고 주운환을 흥미롭게 쳐다봤다.
“그건…….”
태자는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여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여전히 주운환을 깊이 신임하고 있었고 비적들이 주운환을 모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석소전 일은 그가 보기에 전혀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그저 백성 한 명을 죽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꼭 주운환이 구실을 만들어 입막음을 한 것이 된다. 그리고 사람을 죽여 입막음을 하려 한 게 아니라고 하면 양민을 살해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런 일은 귀족들이 암암리에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공개적인 자리에서 언급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요양성은 음랭한 눈빛으로 주운환을 쓱 보았으나 주운환은 조금도 난처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앞으로 한 발짝 나오더니 태자를 향해 공수하고는 차갑고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석소전은 양민이기 전에 소신의 호위병이었고 소신의 부하였습니다. 소신이 군대를 통솔한 지 얼마 안 됐지만 부하들이 하나같이 능력이 뛰어나 호위병으로 끌어 왔는데 성격 부분에 있어서는 아직 파악이 다 안 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석소전이란 자는 소신의 호위병이면서 소신의 내자를 모욕했고, 또 자리에 있던 병사들을 선동해 자신들이 호감을 가진 이를 내자가 받아들이도록 강요했습니다. 제 내자는 물론 소신 또한 안중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리 말하는 주운환은 잘생긴 얼굴이 한층 더 싸늘하게 변했다.
“저는 평범한 조정 신하가 아닙니다.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는 장군입니다! 변경을 수호하는 장군입니다! 오늘 그들이 제 내자를 안중에 두지 않고 핍박한다면 후에는 저도 안중에 두지 않을 겁니다! 군대에 위계가 서지 않으면 어떻게 부하들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국가를 방위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체계가 흐트러지면 분명 행군하는 도중에 부하들이 제 명령에 불복종할 것이고, 그 결과 전투에서 지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대제의 국토를 잃게 되겠지요!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군법에 따라 처리했는데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어디 한번 요 상서께서 말씀해 보시지요?”
그의 말에 대전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고 다들 저도 모르게 등을 곧추세웠다.
요양성과 왕성촌은 낯빛이 바로 새파랗게 변했고 ‘군법에 따라 처리했다.’라는 말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렇군. 말 한번 잘했소!”
태자는 곧바로 손뼉을 치며 너털웃음을 지었고 아래에 있는 요양성 등을 싸늘한 눈빛으로 쓱 쳐다봤다.
“군법 아래에는 양민도 없소.”
태자가 대놓고 주운환의 편을 들자 요양성은 낯빛이 한층 어두워지더니 희끗희끗한 수염을 미세하게 떨며 말했다.
“진서후의 부하는 경솔하게 행동하면 안 되지만 전하의 부하는 경솔하게 일 처리를 해도 되나 보군요.”
그러자 태자의 품위 있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 늙은이가 지금 감히 내에게 주운환을 너무 신뢰하는 것 아니냐고 비아냥거리다니! 그럼 주운환을 믿지 말고 설마 너 같은 늙은이를 믿으라는 말인가?’
“현재 충분한 증거는 없습니다. 소신 또한 진서후가 결백하다고 믿습니다.”
요양성은 허허 웃더니 이렇게 말을 보탰다.
“진서후 스스로 결백하다고 하니 조사가 두렵지는 않을 터입니다.”
그러자 태자는 미간을 씰룩이더니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조사하게!”
그는 이렇게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장찬을 불렀다.
“이 일은 대리시경에게 맡기겠소.”
장찬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앞으로 한 발짝 나와 공수하고 말했다.
“명 받잡겠사옵니다.”
요양성은 표정이 어두워졌고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일을 장찬에게……? 장찬 이 늙은이는 주운환의 친척 아닌가!’
비록 장박원과 주운환의 사이가 좋지 않고 엽이채와 엽연채의 사이 역시 좋지 않지만, 때론 두 가문 사이의 작은 유대 관계만으로 충분할 때도 있다.
그리고 장찬과 주운환은 둘 다 큰일을 하는 사람들이라 사소한 일로 원한 같은 건 쌓아 두지 않으려 하니 그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있는 셈이었다.
그러니 이 일을 장찬에게 넘긴다는 것은 조사를 하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는 이야기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