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9화
노주는 마차 안에서 눈물을 흘렸고 왕 마마는 그런 그녀를 쏘아보며 훈계했다.
“내가 오지 말자고 했는데도 네가 오겠다고 했지. 마님께서 생각이 있으셨으면 진작에 널 부르셨을 게다. 굳이 미룰 필요가 있었겠니.”
하지만 노주는 여전히 불만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분명히 이야기를 마쳤던 일이에요. 비록 보증서 같은 건 작성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뭐?”
왕 마마도 그리 말하며 옅은 한숨을 지었다.
“사실 나도 네게 그런 기회가 생기길 바랐었다. 하지만 주인이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다. 우리는 노비이니 마땅히 노비의 소임을 다해야 한다. 부부 사이에 정말로 필연적인 상황이 어디 있겠니?
나는 마님의 자당께서 온씨 집안에서 데려온 사람이었다. 그때 함께 온 여종들도 몇 명 있었는데 소접과 향옥이가 원래 첩실이 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 당시 엽승덕이 두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마님께서 그 둘을 다른 이에게 시집보내셨고 지금의 화 이낭을 첩실로 들이게 됐지.
이런 일에 절대적인 게 어디 있겠니. 그저 넌 그런 팔자가 아닌 게지.”
노주는 달갑지가 않았지만 추길도 이미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갔다고 하니 얌전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모녀가 집으로 돌아온 뒤 왕 마마는 노주가 여전히 단념하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되어 얼른 그녀의 짝을 찾아 줬다.
이낭은 될 수 없게 됐다지만 그래도 노주는 그녀의 친딸이니 당연히 사윗감을 제대로 찾아봐야 했다.
또 엽연채가 말했던 주운환의 별장에 있는 집사 같은 사람들도 생각해 봤지만 결국 그녀는 딸을 먼 곳으로 시집보내기 아쉬워 자신이 지내는 별장에서 준수한 외모에 성격도 좋은 사동 하나를 골라 엽연채에게 회답했다.
엽연채는 무려 은화 80냥을 상으로 내려 혼수에 보태 주며 노주를 시집보냈다.
그에 반해 추길은 그날 여양에게 끌려가 마차에 실려 매매꾼에게 넘어갔고, 여양은 매매꾼에게 추길을 첩실로 팔라고, 어떤 상대이든 상관없다고 말했다.
매매꾼은 손을 못 쓰고 벙어리가 된 추길을 보며 혀를 찼다. 이런 상태인데 무슨 사람을 가리겠는가? 그저 가난뱅이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추길은 서남 지역의 궁벽한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팔리게 됐다.
비록 가난한 마을이긴 했지만 그래도 부호는 있었다. 그 집 가장은 육십 대 초반인 못생긴 영감이었는데 외모가 추하긴 해도 동생童生(생원 자격 획득을 위한 과거를 동생시童生試라고 하며 급제자를 동생이라 부름)이었고 집안에는 몇 십 묘畝의 비옥한 전답이 있었다.
그는 예쁘고 몸매 좋은 첩실을 사고 싶었지만 그런 여인들은 보통 몸값이 비싸 십여 냥 정도는 써야 했다. 일부는 심지어 수십 냥을 부르기도 했다. 영감은 그러기에는 돈이 아까워서 매일 군침만 흘릴 뿐이었다.
그러다 추길을 보게 된 그는 당연히 두 눈을 반짝였다. 비록 벙어리이고 잔손이 많이 가는 일은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얼굴이 예뻤고 몸매도 괜찮았다. 어차피 사람을 사려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두 냥을 들여 추길을 사서 집으로 데려왔다.
영감의 아내는 화가 나 미쳐 버릴 지경이었고 날마다 추길을 괴롭혔다.
물론 엽연채는 추길의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전생에서 추길은 죽을 때까지 그녀 곁에 있어 줬기 때문에 엽연채는 끝까지 그 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원래는 왕 마마가 지내는 별장의 시동과 짝을 지어 주려고 했는데, 주운환이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나서니 엽연채는 그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추길을 아주 먼 곳에 시집보내려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추길을 아예 폐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주운환은 엽연채가 마음 아파하는 게 싫어서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엽연채도 속이 편치 않으니 그에게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다.
* * *
노주 모녀가 떠난 후, 엽연채는 주운환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점심 식사를 할 때가 되어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저녁 식사를 할 때가 되었는데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엽연채는 걱정이 되어 창틀 앞에 앉아서 그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급히 정원 문으로 뛰어 들어왔다. 엽연채는 주운환인 줄 알고 기뻐했는데 자세히 보니 소월이어서 조금 실망했다.
안으로 뛰어 들어온 소월은 엽연채 곁으로 걸어왔다. 그런데 그녀는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은 데다 막상 앞에 서자 꽤나 우물쭈물했다.
“마님…….”
“왜 그러느냐?”
엽연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소월은 입을 살짝 오므렸다.
“어찌 된 일인지… 나리께서 형부에 억류되어 계신 것 같습니다.”
엽연채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는 진서후인데 누가 감히 그를 억류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왜 억류한단 말인가?
‘설마… 부군과 양왕의 모반 행위가 발각된 것일까?’
엽연채는 이런 생각을 하자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고얀 것. 너 때문에 마님께서 놀라셨잖아!”
청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나리는 진서후이신데 어떻게 문제가 생기겠어. 전란을 평정하고 비적 떼를 잡으신 우리 대제의 큰 영웅이셔. 마님, 걱정 마세요. 소월이가 어딘가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듣고 온 겁니다.”
하지만 엽연채는 조그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몸을 떨었다.
아니다. 그와 양왕이 모반을 꾀한 일이 발각된다면, 아무리 큰 공을 많이 세웠다고 해도 반역이라는 대죄를 상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엽연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에 혜연과 청유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소월만 노려봤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보다 못한 혜연이 결국 화제를 돌렸다.
“마님, 우선 음식부터 좀 드세요.”
엽연채는 너무 걱정이 되어 음식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녀는 소청에 가서 억지로 죽 반 그릇과 간식거리를 좀 먹은 뒤 응접실로 돌아왔고 혜연은 청유 등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다.
“내일 진씨 가문 대공자께 나리께서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시죠.”
주운환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혜연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래.”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주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나리!”
엽연채와 혜연은 깜짝 놀랐고 엽연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과연 지친 모습으로 정원을 가로지르는 주운환의 모습이 보였다.
“부군!”
엽연채는 기뻐하며 급히 계단을 내달렸다.
주운환은 은색 바탕에 오밀조밀한 해당화 문양이 들어간 긴 적삼만 입고 뛰어나오는 엽연채를 보더니 깜짝 놀라 얼른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자신의 외투로 그녀를 꽁꽁 감쌌다.
“왜 나왔습니까?”
그는 그리 말하며 뒤에 있는 청유와 혜연을 쏘아봤다.
“부인에게 겉옷도 걸쳐 주지 않은 것이냐?”
청유와 혜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얼른 몸을 숙이며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며 사죄했다. 두 사람도 그들 나름의 고충이 있었으나 노기 띤 바깥주인 앞에서는 말하기가 퍽 어려웠다.
그의 검은색 소매 없는 외투에 꽁꽁 감싸져 있는 엽연채는 외투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부군.”
“네.”
주운환은 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미소를 짓더니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우리 어서 들어가요.”
그리 말하며 그녀를 확 안아 올리더니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무거워졌네요.”
이 말에 엽연채도 미소를 지었다.
“네, 아이가 좀 커졌어요.”
두 사람은 정원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갔고 청유 등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역시나 소월이 허튼소리를 들어 괜히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이다.
혜연은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청유 등을 데리고 밖에 섰다.
단둘이서 방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주운환은 엽연채를 놓아주었고 그녀는 얼른 그를 도와 외투를 벗겨 줬다. 그러고는 갖가지 아름다운 꽃이 그려진 병풍 위에 외투를 걸쳐 놓았다.
“정말로 형부에 들어갔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주운환은 어리둥절했다.
“그렇게 빨리 소식을 들은 겁니까?”
“네. 대체 무슨 일이었어요?”
“그 비적 떼 일입니다.”
주운환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비적들의 잔당이 명절이라 형부의 관리가 느슨해진 틈을 타 동료들을 구하러 왔었습니다.”
“그랬군요. 맞아요, 전에 마 지부와 비적들이 손을 잡고 부군을 모해하려고 했잖아요. 누가 그들 배후에서 계획한 건지 알아냈어요?”
엽연채의 물음에 주운환은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아직입니다. 마 지부와 비적들 모두 입이 아주 무거워서 아무리 때려도 한마디도 실토하지 않으려고 하는군요.”
“그럼 왜 부군을 억류한 거예요?”
“하.”
주운환은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제가 형부에 방어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비적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잠입하는 바람에 형부에서 절 부른 겁니다.”
뜻밖의 말에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해했다.
“형부의 감옥은 궁 안에 있지 않아요? 금위군이 관리해야 할 텐데 어째서 부군이 방어진을 친 거예요?”
“비적들의 두목은 몹시 교활한 자입니다. 그들을 잡으려다가 관군이 적잖이 죽었고, 나만 비적들을 잡아왔지요. 그래서 태자가 비적들이 탈출하거나 구출될까 봐 걱정이 되어 내게 그곳의 금위군들을 배치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금위군은 부군의 병사가 아니잖아요. 설령 문제가 생겼대도 왜 부군에게 따져요?”
“따진 게 아닙니다. 그저 내가 좀 더 머물러 있었던 것뿐입니다. 비적들이 어떻게 들어온 건지 살펴보려는 것이었지요. 그러다가 귀가가 늦어진 겁니다. 억류라니, 웬 이상한 말이 나돌았군요.”
주운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를 안심시켰고 엽연채는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양왕 전하 쪽은 어떻게 됐어요?”
그녀가 이렇게 말머리를 틀자 주운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북쪽에 전하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우리 쪽에서 전하를 도와 정씨 가문 사람들을 떼어 놨고요. 전하는 서쪽으로 가신 듯합니다. 이후로 전하를 찾지 못했으니 전하 쪽에 일이 생겼다고 볼 수밖에 없고, 당분간은 우리와 만나려고 하지 않으실 겁니다. 내가 경위영을 손에 넣으면 그때 다시 이야기합시다.”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조앵기가 생각났다.
그녀는 양왕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저 조앵기가 걱정될 뿐이었다.
‘그 가냘프고 여린 조앵기가 지금 밖에서 풍찬노숙하고 있을 텐데, 대체 어찌 지내고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