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8화
진시辰時(오전 7시~9시)의 절반이 지나자 엽연채는 정신이 완전히 또렷해져 침상에서 일어났다.
여종들은 이미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침상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본 혜연과 청유가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세수하고 단장을 마친 두 부부는 소청에 가서 식탁 앞에 앉았다. 엽연채는 청유를 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또 추길이 생각나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후에 등씨 어멈을 불러 그 아이를 별장으로 보내거라.”
그런데 혜연이 대답을 하려는 찰나, 주운환이 이렇게 말했다.
“부인이 출가할 때 받은 별장을 말하는 겁니까?”
“맞아요.”
“그곳에는 대나무가 가득 심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부인은 그곳의 죽순을 가장 좋아하고 말입니다. 봄여름에는 그곳에 가서 죽순을 뽑아야 하는데, 난 그 녀석을 또 보고 싶지 않군요.”
주운환은 그리 말하며 엽연채를 위해 채 썬 닭고기를 넣은 제비집 죽을 한 그릇 떠 줬다.
엽연채는 어리둥절한 채로 주운환을 바라보았다.
“저한테 맡기십시오.”
주운환의 말에 엽연채는 그가 상으로 받은 별장들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중 일부는 도성에서 무려 천 리나 떨어져 있었다. 그녀도 지금은 더 이상 추길을 신경 쓰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주운환은 흡족함에 붉은 입술을 위로 올렸다.
“내 부인은 말도 참 잘 듣지.”
두 사람이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여한이 갑자기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숨을 헐떡이며 고했다.
“나리, 형부시랑께서 오셨습니다. 지금 대청에 계세요.”
주운환은 젓가락을 들고 있던 손을 멈칫하더니 날카로운 눈썹을 추켜올리며 되물었다.
“형부시랑?”
새해 인사를 하러 온 거라면 여한은 일부러 ‘형부시랑’이라는 정식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대갓집의 누가 방문을 했다고 이야기했을 테니 말이다.
“예.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나리께 좀 부탁드릴 게 있다고 하십니다.”
“알겠다.”
주운환은 대답을 하며 몸을 돌려 엽연채를 쳐다봤다.
“갔다 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십시오. 저녁에는 뱃놀이를 하러 천수하에 갑시다.”
엽연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식탁 위를 가득 채운 음식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두 입만 먹고 가요.”
주운환은 조그만 얼굴을 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새하얀 얼굴에는 옅은 분홍빛이 돌았고 커다랗고 요염한 두 눈은 깜빡거리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그녀를 어떻게 놔두고 갈 수 있겠는가?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밥 안 먹고 간다곤 안 했지 않습니까.”
엽연채는 얼른 그에게 반찬을 집어 줬다.
“무슨 일로 그러는 것 같아요?”
“지금 형부에서 비적 떼를 가둬 놓고 있으니 아마 그쪽 일 때문인 것 같습니다.”
주운환도 그다지 급한 건 아니라 느긋하게 식사를 했고 엽연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식사를 마쳤다. 주운환은 돌아서서 문밖으로 나가고 엽연채는 손을 씻은 후 응접실로 돌아갔다.
청유가 안으로 걸어 들어와 엽연채에게 알렸다.
“하인들이 말하기를 노비 매매꾼이 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엽연채의 조그만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래.”
“그리고… 방금 전에 나리께서 추길이 일을 본인에게 맡기라고 하셨잖아요. 제가 땔나무를 쌓아 두는 곳간에 가 봤더니 추길이가 보이지 않았어요. 그곳 문을 지키는 마마가 말하길, 여양이 이미 추길을 내보냈다고 했어요. 일 처리가 참 빠르네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 있던 혜연이 얼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리께서 알맞게 처리하실 겁니다. 그러니 마님은 태교에만 전념하세요.”
혜연은 더는 이 일을 언급하지 말라는 의미로 청유를 쳐다봤다. 그러자 청유는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청유도 가능한 한 길게 보고하고 싶지 않았다.
“마님.”
그때, 소월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그게… 왕 마마와 노주가 마님께 새해 인사를 드리러 도성에 왔습니다.”
엽연채가 시선을 주자 소월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수화문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청유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무슨 새해 인사를 또 하러 왔다는 거야? 작년 연말에 소작료를 내러 도성에 왔을 때 이미 인사드리지 않았어?”
사람이 많은 집안에서는 매년 두 번 소작료를 받았는데 연말에 각 별장의 집사들이 찾아와 그를 보고하면 주인이 그들에게 잔칫상을 차려 줬다. 소작인의 대표들과 명절 음식을 먹으며 미리 새해 인사를 나누고 그들에게 세뱃돈을 주는 자리였다.
그래서 보통 소작인의 대표는 새해를 보낼 때 도성에 오지 않고 별장을 지켰고, 주인과 특별히 사이가 좋거나 도성에서 아주 가까이 사는 사람들만이 도성으로 와서 새해 인사를 드렸다.
왕 마마와 노주가 온 별장도 도성에서 가까웠는데 그들은 재작년에는 도성에 오지 않았다.
혜연과 청유는 이 생각을 하자 표정이 어두워졌으나 엽연채는 도리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들어오라고 해라!”
소월은 엽연채를 보더니 공손히 대답하고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마님…….”
청유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으나 엽연채는 입꼬리를 위로 당길 따름이었다.
“난 주인이다. 왕 마마와 노주가 새해 인사를 하겠다고 하니 그럼 그리하라고 하면 된다. 또 무슨 일이 있거든 면전에서 이야기하면 그만이다.”
혜연과 청유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마님 말씀이 맞습니다.”
잠시 후,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밖에 걸린 영락瓔珞 주렴이 걷히더니 모녀가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왕 마마는 푸른 덩굴무늬가 들어간 어두운 회색 배자를 입고 머리에는 옥을 상감한 검은색 말액을 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보다는 그녀 옆에 있는 열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한 소녀가 훨씬 더 시선을 끌었다.
소녀는 단순한 무늬가 들어간 연청색 솜 적삼에 꽃문양이 들어간 연녹색 얇은 비단으로 만든 긴 치마를 입었다.
얌전하고 곱게 생긴 그녀는 외모가 귀엽고 아리따웠는데, 머리에는 성글게 짠 천으로 만든 연청색 꽃 장신구 한 개와 은 편잠扁簪 한 개만 오른편에 꽂고 있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청초하고 순수하게 보였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예전의 노주는 이렇게 치장하지 않았다.
노주는 진홍색과 짙은 자주색을 좋아했고 산뜻하고 화려한 색깔을 좋아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걸 보니 조심스럽게 비위를 맞추려는 마음이 역력해 보였다.
노주는 엽연채의 눈빛과 마주치자 몸을 살짝 떨더니 얼른 왕 마마와 함께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아가씨께… 아니, 마님께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노주와 추길은 전에 마음이 좀 맞지 않았는데, 엽연채가 후 부인이 됐는데도 첩실을 들이는 걸 차일피일 미루자 노주와 추길은 순식간에 공동의 적에 대해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둘은 자주 서신을 주고받았고 그렇게 접촉이 늘어나자 서로를 아끼고 동정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그리고 최근에 추길이 노주에게 두 번째 서신을 보냈었다. 첫 번째 서신은 음력 섣달에 보냈는데, 엽연채가 마침내 명절을 쇤 후에 도성으로 그녀를 불러오는 데 동의했다는 내용이었다.
노주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런데 제대로 준비를 하기도 전에 어제 엽연채가 첩실을 들이지 않기로 했다는 내용이 담긴 두 번째 서신을 받은 것이다.
노주는 초조해 죽을 것 같아 추길의 답장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어머니를 끌고 함께 도성에 들어왔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직접 살펴보러 온 것이었다.
“일어나거라.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다.”
엽연채는 손에 들고 있던 청화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작년 연말에는 오지 않았었지. 그전에도 명절에 도성에 온 적 없는데, 올해는 어째서 일부러 찾아온 것이냐?”
노주는 얼굴이 굳어졌고 왕 마마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엽연채는 계속해서 이들과 어울리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 무덤덤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이었다.
“노주가 나와 동갑이고 두 달 먼저 태어났으니 올해로 열일곱 살이겠군! 짝을 맺어 줘야 할 때가 됐네. 내 기억으로는 별장에 사동들이 몇 명 있었는데 왕 마마가 보기에는 누가 적당한가? 대답해 보게.”
그러자 노주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입술을 살짝 떨며 말했다.
“마님… 저, 전… 전에 마님께서 출가하실 때 자당께서 저희를 방으로 불러 말씀하시길…….”
“사정이 바뀌어 첩실을 들이지 않기로 했다.”
엽연채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노주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엽연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왕 마마가 제 딸을 노려보며 크게 나무랐다.
“마님께서 네게 보증서라도 써 주셨니? 마님은 우리 주인이시다. 마님께서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첩실을 들이지 않겠다고 하시면 안 들이시는 것이다!
그리고 네가 정말로 첩실로 들어간다고 해도 그건 마님을 도와 걱정을 덜어 드리기 위해서다. 지금 마님께서는 널 첩실로 들이는 게 현재 상황에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시고 다른 계획이 있으실 텐데 감히 네가 왈가왈부하려는 것이냐?”
노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엽연채는 왕 마마를 쳐다보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사리에 밝은 사람이었다.
“마마, 돌아가서 잘 골라 보게. 별장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와서 내게 알리게. 후부에는 별장과 땅이 많은데 그곳을 관리하는 집사들 중에 젊고 유망한 사람들이 꽤 있네. 내가 사람을 시켜 몇 명 고르게 한 다음 마마에게 보여 줄 것이네.”
“마님, 감사합니다.”
왕 마마는 얼른 머리를 숙인 다음 고개를 돌려 노주를 재차 쏘아봤다.
노주는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그런데 엽연채 옆을 쳐다보니 혜연과 청유만 보였다. 방금 전 바깥방에서도 소월과 백수 두 사람만 보였었다.
노주가 물었다.
“왜 추길이는 보이지 않습니까?”
엽연채는 비웃음을 내비치며 짧게 대꾸했다.
“추길이는 시집갔다.”
노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시집갔다고? 추길이마저 시집을 갔다면, 그럼 나는…….’
이런 생각을 하자 그녀는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마마, 오느라 고생했네. 청유야, 넌 가서 주방 사람들에게 마마와 노주를 위해 따뜻한 탕과 밥을 준비하라고 하거라.”
“예.”
엽연채가 청유를 부르자 청유는 고개를 돌려 두 모녀를 쳐다봤다.
“마님께서 식사를 준비해 주셨으니 노주와 마마는 이리로 오세요.”
모녀는 청유를 따라 문을 나섰고, 식사를 마친 후 작은 마차를 타고 도성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