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7화
어멈은 당황했지만 냉큼 열쇠로 문을 열어 줄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문을 여는 소리와 방금 전 주운환이 했던 말을 들은 추길은 모든 슬픔과 고통이 까무러칠 듯한 기쁨으로 바뀌었다. 그의 마음속에 어쩌면 줄곧 자신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곱게 단장하고 그의 여인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나를 구하러 오신 거야…….’
추길은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쏟아 냈다.
‘끼익’ 하고 낡은 나무문이 열리더니 은백색 달빛이 등롱의 불빛과 함께 안으로 들이비쳤다.
추길은 단정한 자세로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비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사이로 키 크고 건장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수려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얼굴은 달빛을 받아 더욱 화려하고 아름다웠고 온몸은 존귀한 분위기가 흐르며 맹렬한 기세를 보였다.
‘그래, 이런 사내… 이런 사내만이 비로소…….’
추길은 곱상한 얼굴을 위로 들더니 결국 눈물을 흘리며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나리! 마침내 오셨군요……! 나리께서 오지 않으셨다면… 전 마님 때문에 별장으로 보내져 사동에게 시집을 가야 했을 겁니다. 나리… 흑흑……. 나리, 전 사실 나리의 첩실이었습니다!”
추길은 목도 쉬고 힘도 다 빠진 듯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염치마저 모두 버리더니 결국 마음속에 묻어 놨던 말을 큰 소리로 외쳤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한 그녀는 가슴에서 뭔가가 솟구쳐 올라 조금 횡설수설했다.
“전 원래부터 나리의 여인이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엽연채가… 부덕과 염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에요.
오늘만 해도 주인마님과 측비께서 오셔서 엽연채를 설득했는데 엽연채는 외려 불효를 저지르며 두 분을 쫓아냈어요… 흑흑. 그리고 이젠 저까지 해치려고 합니다. 나리 곁에 있는 모든 여인들을 하나하나 죽일 거예요. 흑흑…….”
감정이 격양된 그녀는 처량하고 비참하게 눈물을 쏟으며 나오는 대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녀는 지금 너무 춥고 배고프고 괴로워 그가 엽연채를 안듯이 자신을 품 안에 안아 주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사정을 다 들려 줬는데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추길은 고통스럽고 두려워 흑흑 흐느끼며 그의 발치로 기어갔다.
“나리… 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붕 날아가 곳간의 벽에 부딪쳤다.
‘어떤 무례한 놈이 감히 나를 발로 차?’
그녀는 깜짝 놀라 이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는데, 주운환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여양과 여한도 뒤에 서 있었다.
“원래는… 깔끔하게 처리할 생각이었다. 네게 남은 부인의 마지막 정을 생각해 빨리 끝내 주려고 했지.”
주운환의 목소리는 마치 지옥에서 온 아수라처럼 음산했다. 그는 살기 가득한 눈을 가늘게 뜨며 명했다.
“여양, 저년의 수근手筋을 자르고 벙어리로 만드는 약을 가져와 저년의 입에 쏟아붓거라. 그리고 내일 당장 팔아 버리고! 그렇게 첩실이 되고 싶다니 소원대로 첩실이 되거라!”
추길은 머릿속에서 쾅 소리가 나며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부정했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건 말도 안 돼! 나리의 마음속에 정말로 저의 자리는 눈곱만큼도 없는 겁니까?”
주운환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냉소를 지었다.
“내 마음속에 왜 네가 있어야 한단 말이냐?”
추길은 또다시 머리가 어지러웠고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나리 마음에 제가 없을지라도… 정말로 첩실을 들이고 싶지 않으셨다면 엽연채가 저희를 불러 첩실을 들이지 않겠다고 했을 때 왜 나리께서 직접 말씀하지 않은 겁니까!”
‘만약 그가 직접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면… 난…….’
“왜냐하면 난 네가 더 날뛰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주운환은 그렇게 말하며 살기 어린 눈빛을 번득였다.
엽연채가 첩실을 들이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그가 어떻게 몰랐겠는가? 그가 직접 와서 이야기했다면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테고 어쩌면 추길도 마음을 접었을지도 모른다.
엽연채는 옛정을 생각해 추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려고 했지만, 그런다고 추길이 과연 마음을 영영 접을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추길은 또 첩실이 될 생각을 품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첩실이 되는 길을 엽연채가 끊어 놨으니 추길은 더욱 꾹 참았다가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 엽연채에게 치명타를 날렸을지도 모른다.
이런 위험이 부인 곁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주운환은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추길이 실낱같은 희망을 품도록 놔둔 것이다. 그녀가 최후의 발악을 하며 못된 짓을 벌이고 말썽을 피우면 엽연채도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추길을 정리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엽연채는 추길에게 아직도 일말의 정을 가지고 있었다. 늘 냉정하고 결단력 있던 엽연채가 추길에게만은 이렇게 자비를 베풀고 모질게 행동하지 못할 줄은 몰랐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추길을 사동에게 시집보내고 별장에 가둬 놓으려고 할 뿐이었다.
하지만 추길의 속은 이미 썩어 문드러진 상태였다. 그러니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한밤중에 그녀를 끝장내려고 온 것이다.
그런데 추길이 여전히 허튼 생각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런 주운환을 가장 분노하게 만든 건 추길이 회개하지 않았음이 아니라 그녀가 엽연채의 마지막 배려마저 저버렸다는 것이었다.
이런 인간을 왜 곱게 살려서 시집보내야 하는가? 그냥 죽이는 것도 너무 과분한 처사이거늘.
그렇게 첩실이 되고 싶다고 하니 그럼 첩실로 살게 하면 될 것이다.
추길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두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나리는, 나리는 절 죽이기 위해……. 어떻게…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분명 나리야말로 피해자시잖아요. 엽연채가 나리께 첩실을 들이지 말라고 강요한 거잖아요. 강요…….”
“부인은 내게 강요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주운환은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을 싸늘히 굳히며 반박했다.
“첩실을 들이지 않겠다고 말한 건 나다. 내게는 부인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어 스르릉 하고 예리한 칼이 칼집에서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예리한 칼은 칼집 밖으로 나와 한 걸음씩 추길을 향해 다가갔다.
문을 지키던 어멈도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녀는 냅다 달려가 추길을 꽉 눌렀다.
그러자 추길은 질겁하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리, 나리……! 흑흑……!”
여한은 싸늘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나리를 부를 낯짝이 남아 있나 보지? 방금 전에는 귀가 먹었던 거야? 나리께서는 단 한 번도 네가 마음에 든 적이 없다고 하셨다. 네가 전에 나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어 그는 날렵한 칼솜씨로 추길의 수근手筋을 끊어버렸다. 그러자 바닥에 온통 피가 흥건했다.
추길은 머릿속에서 쾅 하는 굉음이 났고 여한의 말에 놀라 온몸이 경직됐다. 이어 형용 못 할 고통을 느낀 그녀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아악!”
그런데 소리를 내기 무섭게 여한이 그녀의 양 볼을 꽉 움켜쥐고 그녀의 몸을 반쯤 들어 올렸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여양이 뭔가가 들어 있는 사발을 들고 달려왔다.
추길은 그 모습을 보더니 순간 두 눈을 번쩍 떴다. 여양은 두 눈에 차가운 빛을 품은 채 그녀를 한 차례 바라보더니, 그녀의 입으로 사발 안에 든 내용물을 들이부었다.
“우웁……!”
쓰고 떫은 맛이 추길의 머릿속과 목구멍으로 돌진했다. 화끈거리는 느낌이 목구멍을 타고 흐르자 그녀는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컥컥……!”
추길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주운환을 끈질기게 쳐다보았다.
주운환은 냉담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변함없이 수려한 그의 얼굴에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싸늘한 기운이 어려 있었고 수묵으로 그린 것 같은 부드러운 두 눈에는 이 순간 어둡고 오만한 빛만이 일렁였다. 추길은 절로 오한이 나서 온몸을 뒤떨었다.
지금 이 순간, 추길의 마음속은 온통 후회뿐이었다. 그녀는 절대로, 죽어도 이 사내를 건드려서는 안 됐다.
“웁! 악. 컥컥! 아악! 흑흑…….”
추길은 목이 너무 화끈거려 구멍이 뚫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약 한 사발을 다 들이붓자 여한은 추길을 내던졌다. 그러자 추길은 땅바닥에 엎어졌고 피 묻은 손으로 필사적으로 자신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큰 소리로 부르짖으려 했지만 아무리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고통스럽게 우는 수밖에 없었다.
주운환은 문을 지키는 어멈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분부했다.
“죽게 놔두지 말고 상처를 잘 동여매 주게. 여양이 넌 잠시 후에 이자를 인신매매꾼에게 보내거라.”
“예.”
여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볼일을 마친 주운환은 검은색 소매 없는 외투를 펄럭이며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났다.
운연거로 돌아오니 방 안은 따뜻하고 포근했고, 얇고 가벼운 연두색 고급 천으로 만든 휘장 아래 엽연채는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다.
주운환이 외투를 벗고 보니 아리따운 그녀의 얼굴은 촛불의 불빛을 받아 더욱 아름다워 보였고 기다란 속눈썹이 아래 눈꺼풀 언저리에서 조금씩 움직였다. 방 안의 온기 때문에 색색 숨을 쉬는 조그만 얼굴은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자 얼음처럼 차가웠던 주운환의 마음 역시 자연히 따뜻해졌고 서릿발 같은 기운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살며시 입맞춤을 했고 둘둘 말린 이불 속으로 들어가 그녀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화사한 햇살이 창사窗紗를 통해 안으로 들이비쳐 침실 안은 더욱 넓고 세련돼 보였다.
엽연채는 기지개를 켜더니 조그만 몸을 돌려 주운환의 품에서 굴러 나왔다. 그러자 주운환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 더 주무시지요.”
엽연채는 눈을 비비더니 그의 목덜미에 조그만 머리를 기대었다.
“네.”
그렇게 부부는 다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