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604화 (604/858)

제604화

추길은 깜짝 놀랐다.

“마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마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출가하실 때 절 첩실로 삼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이낭으로 삼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제가 마님께… 흑, 흑흑…….”

엽연채는 냉소를 지었다.

“네가 내게 뭘 했는데? 말해 보렴. 왜, 너 스스로도 말하기가 부끄럽나 보구나?”

추길은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험상궂은 얼굴로 입술을 뗐지만,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엽연채는 몸을 살짝 굽히고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에게 내 부군의 이낭이 되라고 했던 건 날 위해 총애를 붙들어 놓게 하기 위함이었다. 내 오른팔이 필요했던 거지,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나와 총애를 다투라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어둡고 차가운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뱉었다. 그러자 추길은 표정이 굳어졌다.

“저… 전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지 않았다고?”

엽연채는 소리 내어 냉소했다.

“하하. 넌 내가 부군과 함께 있는 꼴을 차마 보지 못했다! 부군과 내가 다정하게 지내는 모습을 눈꼴사나워했지! 내가 부군과 함께 있을 때마다 우리 곁에 들이닥치려고 했었어.

부군이 사랑을 담아 내게 선물한 머리장식을 꽂는 것도 넌 원치 않아 했다! 부군이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넌 득달같이 나가서 부군을 맞이하고 시중을 들려고 했다. 난 한쪽으로 제쳐 놓고 말이다!

수주에서 돌아와서 나와 부군의 사이가 벌어졌을 때, 부군이 너보고 밖으로 나가 날 찾으라고 했었지. 그런데 혜연이 네게 왜 밖으로 나왔냐고 물었을 때 넌 얼버무리며 말을 피했어. 부군의 마음속에 내가 있다는 걸 내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은 것이지.”

추길은 가슴이 벌렁거렸고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엽연채는 몸을 바로 펴고는 이렇게 힐난했다.

“다들 모를 거라고 생각했느냐! 상대가 흠잡을 수 없으리라고 믿었느냐? 네가 몰래 품고 있던 그런 얄팍한 계산속을 정말로 눈치채지 못했을 것 같으냐? 대체 누굴 기만할 생각이었느냐? 너 자신을 기만하려고 했느냐?”

그때 엽연채는 모든 걸 눈에 새겨 두고 있었지만 주운환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었고 이혼하기로 결정한 상태라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추길이든 주운환이든 둘 다 그녀에겐 상처였고 건드리게 되면 고통스러울 테니 그냥 내버려 뒀던 것이다.

추길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고 입술을 꽉 물었다.

“아니에요……. 전, 전…….”

추길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주인을 배신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모든 행동은 엽연채가 먼저 자신을 막다른 길로 내몰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추길은 엽연채가 꺼낸 말을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엽연채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울려 퍼졌고 그녀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추길의 마음을 콕콕 찔렀다.

“난 총애를 붙들어 줄 사람을 찾았다. 나와 부군의 사이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 줄 사람을 찾았단 말이다. 그런데 넌 뭘 했느냐?”

추길은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마치 이리하면 일말의 자존심과 의지를 붙들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엽연채는 꼴사나운 추길의 모습을 쳐다보며 전생을 떠올렸다.

그때 자신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지친 상태였어도, 아무리 궁상맞은 처지였어도 추길과 혜연은 늘 곁에 있어 줬다.

엽이채가 매수하려고 했지만 두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엽이채는 장씨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 단번에 장씨 가문의 공신이 되었지만, 그 반면에 자신은 아이를 낳지 못했고 친정에서도 버림받고 병도 위중했다. 앉아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처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때도 추길은 곁을 떠나지 않았고 온갖 고생을 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했다. 그런데 그 어떤 고난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았던 추길의 충심이 사내 하나에 무너지고 말 거라곤 전혀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엽연채는 슬픔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추길에게 여러 번 기회를 주었다. 추길이 스스로 상황을 똑바로 파악하고 스스로 손을 놓기를 바랐다. 하지만 자신이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음에도 추길은 계속해서 집착했다.

엽연채는 이제 추길에게 일말의 정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추길아, 네 마음속에 난 이미 없을 게다.”

엽연채는 냉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추길은 몸이 휘청거렸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도무지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진작부터 제 마음속에 엽연채는 없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그녀 스스로도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어쩌면 주운환과 엽연채가 다정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쓰라렸을 때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주운환과 엽연채의 사이가 벌어졌을 때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을 때일지도 모른다.

“상전을 마음에 두지 않은 자를 내가 왜 이낭으로 삼아야 한단 말이냐? 네가 말해 보거라. 내가 왜 그런 자를 위로 올려야 한단 말이냐? 내 심기가 불편해질 뿐이거늘!”

엽연채의 냉랭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추길의 정수리 부근에서 울려 퍼졌다.

“자신의 여종을 첩실로 삼는 건 부군이 다른 여우같은 계집의 처소로 가지 않게 하고 총애를 붙들어 놓기 위함이다. 그 여종이 부군이 날 더 총애하도록 돕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넌 이미 그 자격을 잃었다!”

추길은 머릿속에서 쾅 소리가 났고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몸이 비틀거렸다. 그녀는 몸에서 힘이 쭉 빠졌고 맥이 풀린 채로 그 자리에 있었다.

“여봐라!”

엽연채는 밖에 대고 차갑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는 혜연을 부른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름을 불렀을 테니 말이다.

잠시 후, 막일을 하는 어멈 둘이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좌우 양쪽에서 추길을 제압했다. 추길은 두 어멈에게 몸이 짓눌리자 너무 아파 통곡하며 연신 빌었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흑… 아, 앞으로… 제 할 일을 잘하겠습니다…….”

“네가 뭘 잘하겠다는 게냐? 내 수족 노릇과 통방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게냐? 미안하지만 난 필요 없다! 게다가 넌 지금 첩실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상전인 내게 함정을 팠는데, 정말로 널 첩실로 삼으면 네 욕심은 점점 더 커지지 않겠느냐? 아마 내 목숨마저 요구할지도 모흐지!”

정곡을 짚는 엽연채는 순간 구슬픈 눈빛을 보였다. 핵심을 찔린 추길은 사지가 휘늘어졌고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이 녀석을 제압해 놓거라! 그리고 내일 아침이 밝으면 경인이를 시켜 이 녀석을 별장으로 보내 전씨 어멈의 큰아들과 혼인시켜라.”

추길은 깜짝 놀라 순간 두 눈을 번쩍 떴다.

‘내가 노비에게 시집을 가야 한단 말인가?’

주운환의 잘생긴 얼굴과 우아하고 고상한 풍모를 떠올리고, 다시 비천한 노비들을 떠올리더니 하늘과 땅이 뱅글뱅글 도는 듯한 느낌만 들었다. 그녀는 이를 결코 원치 않았기에 마음이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옆의 어멈이 천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그녀를 제압하여 문밖으로 끌고 나갔다.

추길은 발버둥을 치며 밖으로 끌려나갔다. 혜연과 청유 등은 그녀가 끌려가며 자신들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보더니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백수 등은 몸을 조금 떨었고, 혜연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추길과 함께 엽연채 곁에서 함께 성장하던 그 시절을, 어린 시절을 떠올려 봤다.

이어 처음 주씨 가문에 온 뒤로 막막한 앞날과 맞닥뜨렸던 때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추길은 이따금 심통을 부리기는 했지만 무슨 일이든 엽연채를 위해 생각했었고 단 한 번도 겁먹고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혜연은 진작부터 추길의 잘못된 마음을 눈치챘다. 자신이 눈치챌 수 있는 걸 어찌 엽연채가 눈치채지 못했겠는가? 그저 엽연채가 움직이지 않으니 자신도 못 본 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너희들은 안으로 들어오거라.”

안에서 엽연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연과 청유 등은 영문을 몰라 잠시 멍해졌다가 잇달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엽연채 앞에 한 줄로 가지런히 섰다. 그들은 평소의 장난스러운 모습을 싹 거둔 채 하나같이 얌전한 표정과 단정한 자태로 서 있었다.

엽연채는 이들을 쓱 쳐다보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일렀다.

“너희들도 추길의 말로를 봤을 게다. 누구든 감히 또 이런 짓을 벌이면 추길이보다 더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될 것이다! 그땐 사동에게 시집보내는 것처럼 간단하게 끝나지는 않을 게다.”

백수 등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예.”

여종들은 모두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보니 엽연채는 청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홀짝이고는 탁 소리를 내며 항탁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맑고 깨끗한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이 소리는 꼭 듣는 이의 마음을 세차게 두드리듯 얼음처럼 싸늘했다.

“매화야.”

엽연채가 갑자기 가벼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매화는 움찔하더니 앞으로 한 발 나왔다.

“마, 마님……. 무슨 분부하실 거라도 있으세요?”

“너와 추길이는 한패가 아니더냐?”

엽연채의 차디찬 눈빛이 그녀에게 향했다. 혜연과 청유 등은 깜짝 놀랐고 약속이나 한 듯 매화를 쳐다봤다. 매화는 머릿속이 새하얘졌고 이내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마님, 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추길 언니가 무슨 허튼소리라도 한 겁니까? 추길 언니는 주인을 배신했으니 저희가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게 배 아픈 겁니다……! 언니가 절 모함하고 있는 거예요.”

엽연채는 입꼬리를 쓱 당기며 말했다.

“방금 전에 너희들 모두 밖에 서 있었는데 추길이가 널 언급했는지 아닌지 네가 모른다는 말이냐?”

매화는 낯빛이 더욱 하얘졌고 입술을 맞물린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님… 어째서…….”

“내가 수주에서 돌아와 의원에게 회임을 했다는 진단을 받은 후 너와 추길이가 함께 우리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기쁜 소식을 내 어머니께 알리려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추길이의 진짜 목적은 첩실을 들이도록 어머니가 날 설득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싸늘한 눈빛을 번득였고 매화는 몸을 떨더니 얼른 도리질했다.

“전 전혀 몰랐습니다…….”

“몰랐다?”

엽연채는 비웃음을 지었다.

“설마 그때의 상황을 전부 잊어버린 것이냐? 그때 우리 어머니는 나와 사적인 이야기를 하시려고 청유 등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하셨다. 혜연과 추길은 지위가 높은 내 여종들이니 당연히 자리에 남겨 두셨지. 그때 청유와 백수, 소월이는 전부 밖으로 나갔는데 너만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매화는 소스라치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때 너는 추길이와 함께 내 어머니를 찾아가 소식을 알리면서 어머니께 마치 네가 추길, 혜연이와 동급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네가 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어머니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신 게지!”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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