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3화
엽연채의 시선이 갑자기 주묘서의 배로 향했다.
“아가씨는 곧 있으면 본인이 황후가 될 거라고 생각하나 봐요? 아이를 낳고 나면 지위가 공고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태자 전하께서 아가씨가 아니면 안 될 거라고 생각하고, 아들 덕분에 높은 자리에 앉은 귀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하나 보죠?
하하. 태자 전하는 지금 한창나이세요. 아가씨가 회임을 했다는 건 다른 여인들도 회임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린 아가씨를 상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나중에 누가 미래의 황태자를 낳게 될지는 아직 모르는 거죠!”
주묘서와 진씨는 잇달아 쏟아 내는 그녀의 말에 놀라서 멍한 표정을 지었고 그날의 손찌검과 태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랬다. 주묘서는 주운환 덕분에 측비가 될 수 있었다.
주묘서는 문득 온몸에서 오한이 느껴졌다.
황후의 자리, 황태자의 자리! 이건 대사 중에서도 대사였다. 대단히 중요한 일이니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어떠한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작, 작은새언니… 전…….”
주묘서는 새파란 얼굴로 하염없이 몸을 떨었다.
“전… 그저 새언니를 일깨워 주려고 했던 것뿐이에요……. 새언니에 대한 제 나름의 관심이란 말이에요. 어쨌든 새언니는 제 올케언니인데…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매몰찬 말을 할 수 있어요.”
“내 말이 그 말이다!”
진씨가 이때다 하고 얼른 동조했다.
“우리는 널 생각해서 그런 거다. 어쨌든 네 행동은 확실히… 적절하지 않으니 말이다. 우린 네가 벌을 받을까 봐 걱정이 되어 그런 거다! 또 네 평판을 생각해서 그런 게지. 됐다. 네가 원치 않는다니 우리도 상관 안 하마! 이만 가겠다!”
진씨는 도저히 이곳에 더 머물러 있을 면목이 없어 주묘서를 일으켜 세워 급히 떠나려고 했다.
“거기 서세요!”
그러나 엽연채가 입술을 위로 올리며 그들을 붙잡았다.
“혹여나 이 일이 밖으로 퍼지게 된다면, 어머님과 아가씨가 퍼뜨린 걸로 알겠습니다! 태자 측비 자리에 편히 앉아 있고 싶으면 허튼수작은 부리지 말아요! 안 그러면 저도 봐주지 않을 겁니다.”
진씨와 주묘서는 낯빛이 새파랗게 변하더니 풀 죽은 모습으로 방에서 뛰쳐나갔다.
모녀는 곧장 수화문으로 걸어갔고 마차에 오르자마자 주묘서는 욕을 퍼부어댔다.
“저 빌어먹을 년. 내가 황후가 되고 황태자를 낳게 되면 어디 두고 보자!”
한편, 진씨 모녀가 떠나자 방 안은 삽시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청유는 바닥에 떨어진 찻잔 파편을 정리하며 진씨와 주묘서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바깥방에 있는 추길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또다시 머릿속에서 윙윙 소리가 울리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추길은 핏발이 설 정도로 눈을 치켜뜨더니 입술을 깨물고는 문밖으로 냅다 뛰쳐나갔다.
그녀는 눈물을 쏟으며 달리고 또 달렸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진씨와 주묘서조차 엽연채를 당해 내지 못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추길은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미쳐 버릴 것만 같았고 온 세상이 혼란으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쏜살같이 수화문 밖으로 나온 추길은 곧장 큰길로 뛰어나갔다. 그녀의 마음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자신은 첩실이 될 것이다. 주운환의 이낭이, 반드시 되고 말 것이다.
‘분명 상전이 되어야 하는 내가 왜 이렇게 계속 비천하게 지내야 한단 말이야! 어째서!’
그녀는 말을 빌려주는 상점에 가서 작은 마차 한 대를 빌린 다음 미친 듯이 달렸다. 그리고 시끌벅적하고 번화한 거리에 도착하자 허겁지겁 마차에서 내렸다. 이곳은 바로 그녀가 아까도 들렀던 도성 북쪽이었다.
그녀는 담 모퉁이에서 일고여덟 살쯤 된 어린 거지를 찾아내더니 몸을 돌려 조용한 작은 골목으로 걸어갔다. 어린 거지는 그녀를 보자마자 눈치껏 얼른 그녀의 뒤를 쫓았다.
“언니, 또 무슨 일로 찾아왔어요?”
“날 도와 일 좀 하나 해 주렴.”
추길은 냉담하고 독한 눈빛을 보였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어린 거지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속삭였다.
“네, 알겠어요. 그건 식은 죽 먹기죠!”
어린 거지는 헤헤 하고 웃었다.
추길은 어린 거지의 더러운 얼굴을 쳐다보며 혐오스러운 눈빛을 번뜩였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쇄은 한 조각을 꺼내 어린 거지의 손에 쥐여 주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뜻밖에도 커다란 손이 추길의 가녀린 손목을 확 움켜잡았다. 깜짝 놀란 추길이 고개를 들자 훤하게 생긴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바로 경인이었다.
“추길아. 너 여기서 뭐 하니?”
추길은 낯빛이 확 변했고 갑자기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쫙 끼쳤다. 마치 누군가가 얼음물을 확 끼얹은 것처럼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하늘과 땅이 뱅뱅 도는 듯한 느낌만 들었고 순식간에 온 세상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윙윙 소리가 울려 경인이 뭐라고 말하는지 분명하게 들리지 않았다.
경인은 험상궂은 얼굴로 추길을 향해 소리를 지르더니 그녀를 잡고 골목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러고는 작은 마차 안으로 그녀를 집어 던졌고 어린 거지도 함께 마차 안으로 던졌다.
마차는 미친 듯이 질주했다. 추길은 진서후부로 돌아와 땅을 디디는데도 여전히 허공을 걷는 느낌만 들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혜연이 어두운 얼굴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혜연이 보니 추길은 꼭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혈색이 하나도 없어 낯빛이 창백했고 두 눈은 어둡고 공허했다. 혜연은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자 눈시울이 붉어지나 싶더니 매서운 눈빛을 번뜩이고는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 몹쓸 것!”
그녀에게 뺨을 맞은 추길은 몸을 휘청거리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만 경인이 그녀를 밀쳐 세웠다.
“가자!”
혜연도 그녀를 힘껏 밀쳤다. 그렇게 추길은 몇몇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함께 수화문으로 들어선 후 운연거로 향했다.
추길은 엽연채 앞에 무릎을 꿇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익숙하고도 따뜻한 이 방 안에서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분명 밝게 빛나는 햇살이 등 뒤의 사창紗窓을 뚫고 들어와 방 전체를 호화롭고 부귀하게 비추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 저택의 안주인은 존귀한 모습으로 그녀 앞에 앉아 있었다. 진홍색 소매 없는 외투를 걸친 그녀는 은색 자수 위에 오밀조밀한 해당화 문양이 들어간 적삼과 가는 은사銀絲로 흐릿한 꽃문양을 수놓은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복장 위의 고운 얼굴 속, 살짝 요염해 보이는 두 눈이 지금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데 지금껏 추길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숙한 분위기가 풍겼다.
추길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저도 모르게 비웃듯이 붉은 입술을 위로 당겼다. 예전 일이 떠오른 것이었다. 엽연채가 지금 입고 있는 이 옷도 자신이 옷감과 모양을 골라 준 것이었다.
“혜연이 넌 나가 보거라.”
엽연채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혜연은 어리둥절해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운연거 밖으로 아예 나가지는 않고 주렴을 사이에 둔 바깥방에 섰다. 엽연채가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추길의 마지막 체면을 살려 주려고 이리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 외에도 청유, 소월, 백수, 매화도 바깥방에서 반듯한 자세로 서 있었다. 주렴이 바람에 살짝살짝 흔들려 안에 있는 사람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난 너에게 기회를 줬다.”
엽연채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워 한 줌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추길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주운환이 첩실을 들이지 않을 거라는 점을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추길이 노교아의 이름으로 진씨 등에게 몰래 이 사실을 알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엽연채는 당연히 화가 났지만 진씨 등은 언제든지 상대할 수 있었으니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추길은 한 가지 계략이 실패하자 감히 또 다른 계략을 세웠다. 뭘 하려고 했을지는 경인이 보고를 하지 않았지만 뻔했다.
거지와 건달들에게 돈을 써서 자신에 대한 험담을 퍼뜨리려 한 것이었다. 자신이 투기가 심하고 부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니 1품 부인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이다.
뭐 좋다. 이것도 별문제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사욕을 위해 남편을 구한 생명의 은인을 집 밖으로 쫓아내 버렸다. 그리고 이 죄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 일이 밖에 퍼지면 주운환을 시샘하는 적들이 합심해서 어사와 함께 탄핵을 할 것이고, 백성들도 이 행위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 후에도 자신이 주운환을 위해 첩실을 들이지 않는다면, 배은망덕하고 부덕에 결함이 있다는 걸 증명하게 되는 셈이었다. 그럼 온 도성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자신을 공격할 게 분명했다.
이 사회는 남성이 주도하는 사회이니 사내들은 당연히 자신들에게 유리한 제도를 유지하고 보호하고 싶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귀부인들도 엽연채를 짓밟으려고 할 것이다. 그들은 참고 양보하며 남편을 위해 첩실을 들였는데, 그녀만 남편을 독점하는 꼴을 어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때론 여인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주는 건 오히려 여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리되면 자신은 죽지는 않더라도 적잖이 타격을 입을 것이다.
엽연채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추길을 쳐다보는 눈빛이 더욱 차갑게 변했다.
“내 이미 부군은 나의 것이고 첩실을 들이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네게 분명히, 똑똑히 말했다.”
이 말을 듣자 추길은 마음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았다.
그녀는 그동안 속으로 눌러 왔던 화와 모든 억울함이 전부 터져 나오면서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벌게진 두 눈을 부릅뜨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분명히 말씀하셨다고요? 나리가 마님의 것이라고요? 마님이 그렇게 가볍게 한마디 던지고 나면… 그게 뭐 어떻다고요? 그럼 전에 제게 하셨던 약속은 뭔데요!”
엽연채는 매서운 눈빛을 번뜩이더니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반문했다.
“내가 언제 네게 약속을 했느냐?”
“출가하시기 전에 자당께서 마님과 혜연이, 저와 노주를 함께 방으로 부르셨지요. 그때 혜연이는 집안을 관리하고 저와 노주는 예쁘게 생겼으니 사위가 될 사람의 첩실이 되라고 하셨잖아요!”
추길은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때가 그녀에게는 더없이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녀는 전부터 자신이 아름답다고 믿고 있었고 후에 자신이 어쩌면 통방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환상을 품기도 했었다.
온씨가 정말로 그런 결정을 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앞날에 갑자기 환한 빛이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자신의 미래가 그리되리라고 더욱더 굳게 믿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게 틀어졌다.
“네가 잘못 이해했구나. 그건 계획이지 약속이 아니었다! 그 누구도 네게 약속은 하지 않았다!”
엽연채의 목소리는 더욱더 써늘해졌다.
“지금 부군이 첩실을 들이지 않을 거라고 결정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부군이 정말로 첩실을 들이려고 해도, 내가 부군의 뜻에 동의했다고 해도 절대로 널 첩실로 들이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