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2화
“이…….”
주묘서는 자신의 허영심이 충족되지 않자 분해하고 답답해했다. 그 모습에 엽연채는 피식 웃더니 또 이렇게 말했다.
“전 아직 허리를 짚어야 할 개월 수에 접어들지는 않았지만, 곧 있으면 7개월이 되는 저희 고모의 배를 봤거든요. 배가 남산만 해서 자주 이렇게 허리를 짚고 다니더라고요.”
진씨와 주묘서는 화가 나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엽연채가 지금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주묘서가 회임을 해서 우쭐거리고 거드름을 피우며 과시한다는 말 아닌가?
주묘서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이렇게 변명했다.
“배가 아직 부르지는 않았지만 허리 뒤쪽이 시큰거리고 아파요. 그래서 받치고 있는 거예요.”
“아, 그럼 어서 자리에 앉아요. 혜연아, 어서 부축해 드리거라.”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혜연은 얼른 대답하고 주묘서에게 다가갔고 주묘서는 할 수 없이 혜연의 힘에 의지하는 척 자리에 앉았다.
주묘서는 잔뜩 뿔이 나 있었다. 옆에 있던 춘산은 이 어색한 분위기를 보더니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먼저 말을 꺼냈다.
“셋째 마님께서는 정말 많은 걸 알고 계시네요. 저희도 이곳에 자주 와서 마님께 배워야겠어요.”
그러자 주묘서가 싸늘한 눈빛으로 춘산을 쓱 흘겨봤다.
‘말투가 저게 뭐람?’
트집을 잡으러 왔는데 도리어 트집을 잡히는 것 같지 않은가. 게다가 괜한 말까지 덧붙인 탓에 기세마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춘산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이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혜연은 두 사람에게 가져다줄 차를 준비하기 위해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방에서 나오자마자 누군가와 정면으로 부딪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혜연은 놀라 히익 하고 작게 소리를 냈고 고개를 들어 보니 그 사람은 바로 추길이었다.
혜연은 낯빛이 어두워졌다.
“추길아, 너 한참 동안 어디 갔었던 거야?”
추길은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초췌한 모습에 안색도 창백했는데 혜연의 말을 듣고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이상한 말투로 이렇게 대꾸했다.
“내가 가긴 어딜 가.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온 것뿐이야. 이런 것도 안 되니?”
이때, 매화가 걸어오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혜연 언니, 갑자기 이런 변고가 생겼으니 추길 언니 마음이 지금 어떤지 저희도 알잖아요. 그러니 저희가 이해 좀 해 줘요.”
혜연은 추길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괴로우면 방으로 돌아가 쉬면서 마음을 달래든가!”
그런데 추길은 도리어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띠어 보였다.
“지금은 아주 괜찮아졌어. 일하러 돌아온 거야.”
“너……?”
혜연은 이맛살을 찡그리며 추길을 쳐다봤으나 추길은 아랑곳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물론 추길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방 안으로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마음이 괴롭고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가슴을 손으로 꽉 쥐어짜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추길은 꿋꿋이 바깥방으로 걸어갔다. 주렴을 사이에 두고 진씨와 주묘서가 그곳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보이자 추길은 그곳에 서서 안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하하. 셋째 마님은 참 아는 게 많으세요. 마님께 여쭤보는 게 맞죠.”
춘산은 주묘서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억지웃음과 함께 한마디를 더 했다.
“으흠.”
공격할 기회를 엿보던 주묘서는 이때다 싶어 마른기침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참, 우리가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어요. 얼마 전에 새언니 집에 노 낭자라는 사람이 왔다고 하는 것 같던데요? 그 낭자가 셋째 오라버니의 생명의 은인이라면서요.”
“맞아, 그랬지.”
이 일이 언급되자 진씨는 바로 기세등등하게 턱을 치켜들더니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은인이 왔는데 어째서 집으로 데려와 우리에게 보이지 않은 것이냐? 그 사람은 은인이다! 온 가족이 그 낭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연회를 열어 주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 그런데 넌 그 사실을 숨겼을 뿐만 아니라 그 낭자를 며칠도 머무르지 않게 하고 이렇게 보내 버렸구나. 그건 너무 정 없는 처사가 아니더냐!”
엽연채는 싸늘한 눈으로 진씨를 쓱 쳐다보더니 침착하게 대꾸했다.
“노 낭자가 도성에 올라온 건 친척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친척을 찾게 됐으니 자연히 그 친척 집에 가서 머무르게 된 거죠. 그 낭자는 조신한 사람이라 일이 복잡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하!”
진씨가 옆에 놓인 찻상을 쾅 하고 세게 내리치더니 이렇게 쏘아붙였다.
“감히 허튼소리를 지껄이는구나! 내가 그 낭자를 데려와 면전에서 대질해 볼까? 분명 네가 그 낭자를 쫓아낸 거겠지! 그 낭자는 셋째와 살을 맞댔으니 셋째가 책임져 주기를 바라며 이곳을 찾아왔을 게다. 그런데 넌 그 낭자를 쫓아냈구나!
너처럼 투기가 심하고 기센 여인은 처음 보는구나! 넌 지금 회임을 한 상태니 셋째에게 첩실들을 붙여 줘야 한다. 그런데 넌 한 사람도 붙여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땅히 책임졌어야 할 사람마저도 내쫓아 버렸구나!”
“그러게 말이에요!”
주묘서는 냉소를 지으며 고소해했다. 그런 한편, 엽연채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엔 질투심도 어려 있었다.
첩실을 붙여 주는 일은 여인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주묘서도 당연히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태자는 여인만 보면 눈독을 들이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총애하기는 하나 백여언의 처소에도 자주 들렀기 때문에 주묘서는 집에서 데려온 어여쁜 여종 두 명을 태자에게 붙여 줬고 태자는 그제야 백여언의 처소를 전처럼 자주 찾지 않았다.
주묘서는 그렇게 해 총애를 붙들어 놨지만 속에서는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런데 지금 엽연채가 주운환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질투심이 타올랐고 몹시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태자를 좌지우지할 수 없는데 왜 엽연채는 주운환을 좌지우지할 수 있단 말인가!
주묘서는 차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작은새언니는 후부의 적장녀이니 예의나 규칙 같은 걸 무시하면 안 되죠! 『부덕婦德』, 『부규婦規』, 『여계女戒』 같은 걸 어릴 때부터 배우지 않았나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투기가 심할 줄은 몰랐네요. 이러고도 정실부인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후 부인이 될 자격이 있는 거냐고요? 일품 부인이 될 자격이 있는 거예요?
작은새언니는 말할 것도 없고, 공주 마마께서도 어질고 현명한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부마에게 첩실을 들이셨어요!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우리 주씨 가문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질 거예요! 심하면 그 봉호마저 빼앗길지도 모른다고요!”
밖에서 이야기를 훔쳐 듣고 있던 추길은 속이 다 후련했다.
소전도 같은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 결과 그는 처형을 당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태자 측비와 손윗사람인 시어머니 진씨의 입에서 이 이야기가 나온 것이었다. 그러니 말의 무게와 영향력이 달라도 아주 달랐다. 여기서 엽연채가 뭘 어쩔 수 있겠는가.
진씨 모녀는 마음대로 쫓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정말로 소란이 일어나게 된다면 어사마저 엽연채가 부덕에 반하는 짓을 했다며 탄핵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봉호는 정말로 사라지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 이 일은 원래부터 크게 번졌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은 건 노교아가 수완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자신은 충성심이 너무 깊어 끝까지 엽연채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엽연채는 자신을 조금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십여 년간 쌓아 온 정이 있는데 이렇게 자신을 이리 홀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도 네 행복을 짓밟고 인생을 망쳐 줄 거야!’
그리고 지금 엽연채는 마침내 인과응보를 받으려 하고 있다. 이건 엽연채가 이 세상의 규칙을 따르지 않은 데 따른 벌이며 신의를 저버리고 이랬다저랬다 한 데 따른 업보였다.
추길은 진씨 모녀의 대화를 들으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주묘서가 한껏 격양된 어조로 이야기하던 바로 그때, 갑자기 쨍그랑 하고 큰 소리가 났다. 청화 찻잔이 휘익 날아와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난 것이었다.
“꺅!”
찻물이 몸까지 튄 주묘서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엽연채에게 삿대질을 하며 마구 고함을 질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이!”
하지만 그녀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엽연채가 아리따운 두 눈으로 그녀를 쓱 쳐다보더니 냉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가씨, 지난번 꽃놀이 연회에서 태자 전하께 손찌검을 당했던 일을 벌써 까먹은 건 아니죠? 아가씨가 이곳 진서후부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했던 말을 잊은 건 아니겠죠?”
주묘서는 자신이 손찌검을 당했던 일이 언급되자 안색이 확 변했다. 그 일은 그녀에겐 치욕이고 역린이었다. 그런데 엽연채가 이 일을 언급한 것이다. 주묘서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이, 이……!”
“됐으니 그만하거라!”
진씨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더니 하하 냉소를 짓고는 엽연채를 쳐다보며 말했다.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린 그저 네게 규율과 도리를 말하고 셋째를 도우려는 것뿐이다! 네가 부덕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시어머니인 내가 말도 못 한다는 것이냐? 셋째가…….”
“부군이 제 편에 서지, 어머님 편에 서겠어요?”
엽연채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주묘서와 진씨는 낯빛이 확 변했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조금의 망설임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이 이렇듯 후부에서 소란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행동이 주운환을 돕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운환이 노교아가 떠나는 것에 동의했다고 해도 엽연채가 그를 위해 첩실을 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 전혀 불만이 없다고 볼 수만은 없었다. 아니, 분명 불만이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이곳에 와서 법석을 떨어도 주운환은 따지지 않을 거고, 그렇기에 자신들은 엽연채의 속을 뒤집어 놓을 수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주운환이 싫어도 당장 그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주운환과 엽연채 둘 다 싫기는 매한가지이니 모녀는 그중 한 사람의 속을 뒤집어 놓을 금쪽같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어머님과 아가씨가 이곳에 와서 소란을 피우시는 건, 부군 편에 서서 제 속을 뒤집어 놓을 작정이신 거죠? 한데 말이죠, 부군이 과연 어머님과 아가씨를 도울까요?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하세요?”
엽연채는 코웃음을 쳤다.
진씨와 주묘서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모녀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엽연채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순식간에 자신감이 사라졌다.
노교아가 정말로 쫓겨났다는 건 주운환이 여전히 엽연채의 미색에 빠져 있다는 방증이었다. 게다가 엽연채는 회임도 한 상태였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보니 주운환은 자신들의 편에 서지 않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