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99화 (599/858)

제599화

“전… 전 그저…….”

노교아는 눈물을 머금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치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일말의 자존심을 악물어 지키는 것처럼 말이다.

“아직도 말할 게 있나 보지? 설마 내가 증거까지 찾아내야 하는가? 증거는 없지만 낭자가 명확한 걸 원한다면 그리해야겠지!”

엽연채는 냉소를 지었다.

“추길아, 가서 여한을 불러오너라.”

이야기를 듣고 있던 추길은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고, 엽연채가 그녀를 부르는데도 머릿속이 여전히 백지장처럼 하얘 반응을 미처 하지 못했다.

“추길아.”

헤연이 그런 그녀를 밀며 재촉했다.

“마님께서 네게 여한을 불러오라고 하시잖아.”

추길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고 어리벙벙한 얼굴로 돌아서더니 경직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추길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고 여한과 여양이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나리, 마님.”

형제는 얼른 예를 올렸다.

엽연채는 웃는 듯 마는 듯 오묘한 표정으로 여한을 쓱 쳐다봤다. 그러자 여한은 저도 모르게 몸이 경직됐다.

‘내가 왜 긴장하는 거지?’

그는 이상한 기분을 떨치려고 입을 뗐다.

“마님…….”

“여한아. 너와 부군이 동우산에서 맹호와 맞닥뜨렸을 때, 부군과 너 둘 다 부상을 당했었지?”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맞습니다.”

여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리께서 오른쪽 어깨를 다치셨고 전 왼쪽 가슴 부분의 살갗이 크게 벗겨졌었죠. 피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뱀들이 달려든 겁니다.”

“하.”

엽연채는 가볍게 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때 네 상처를 동여맨 사람이 누구냐? 이 낭자겠지?”

노교아는 낯빛이 확 변했다. 그때 그녀는 소전 등에게 나가서 약초를 찾아오라고, 본인들 일을 보라고 했다. 그런 후에 두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한 사람만 치료하고 한 사람은 놔두면 사람들이 쓸데없는 소리를 할까 봐 걱정이 되어 두 사람을 모두 치료해 준 것이다. 하지만 여한을 치료한 후에는 당연히 곧바로 옷을 도로 입혔다.

여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렇게 말했다.

“맞습니다. 낭자에게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요.”

그는 노교아를 향해 공수하더니 더듬거리며 사의를 표했다.

“저,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리께서 돈을 주시면 저도 거기에 얼마라도 보태려고 합니다.”

“여한아, 넌 어쩜 그리 속물적인 말을 하는 것이냐!”

엽연채의 말이었다. 그녀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방금 전 넌 여기 없었으니 이 낭자가 얼마나 선량하고 정직한지, 또 얼마나 허영심이 없고 성품이 고결하며 높은 절개를 가졌는지 모르겠구나.

이 낭자가 말하기를 부군을 구한 건 의로운 행동이었으니 금전을 바랄 수는 없다고 했다. 은혜를 빌미로 보답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절대 아니라고. 다만 부군을 구해 주면서 순결을 잃게 되었으니 부군이 자기를 책임져야 한다고 하더구나.”

“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우리 교아는…….”

어딘지 흐름이 석연찮단 느낌에 노 영감이 다급히 끼어들었다.

“자네 교아가 뭐? 책임져 주기를 원한다면 시집오면 되지 않는가! 여한은 아직 혼인 전이고 인물도 훤한 훌륭한 인재이네. 능력과 무공이 아주 뛰어나지. 낭자와 아주 잘 어울리는군.”

엽연채의 이어진 말에 여한은 온몸이 뻣뻣하게 경직됐다.

“마님… 좀 봐주세요……. 아, 아닙니다. 아주 기쁩니다! 저와 이 낭자는 천생연분이지요!”

그는 급히 뒷말을 바꾸고는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주운환이 그를 쓱 훑어본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우리 교아가 왜 저자에게 시집을 갑니까! 저자는 하인입니다! 한낱 노비예요!”

노 영감은 화가 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여한의 코를 가리키며 목청을 높였다.

“우리도 당연히 낭자를 억울하게 만들지 않을 거네. 낭자가 진심으로 여한이 책임지길 원한다면 우린 바로 노비 문서를 없애고 여한을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줄 것이네. 양민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겠네.”

여한은 어이가 없어서 그저 하늘만 올려다봤다.

‘마님, 전 싫어요! 전 계속 나리를 따를 거란 말이에요! 나리를 따라다녀야 제가 떵떵거리며 다닐 수 있단 말이에요!’

“이, 이, 이……!”

노 영감은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것처럼 분을 터트렸다.

“분명 둘 중 한 명을 고를 수 있는데 우리가 왜 저자를 골라야 한단 말입니까! 어째서 저자에게 시집을 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저자는 후야도 아닙니다!”

노교아는 낯빛이 확 변했다.

“할아버지!”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추켜세웠다.

“호오? 후야의 첩실은 되더라도 양민의 본처는 되고 싶지 않다는 건가? 부자의 첩실은 기꺼이 되겠지만 양민의 처는 되지 않겠다는 거군!

좋네! 마음속에 아주 큰 꿈을 품었어. 사람을 구했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며, 은혜를 빌미로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며 재물도 거절했으면서, 끝끝내 부군에게 책임은 지라고 하는구나. 아주 고결한 성품과 높은 절개를 지닌 낭자로군!”

노교아는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고 사정없이 따귀를 맞은 것처럼 두 볼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랐고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만하게! 이제 모두들 분명히 알았을 테지.”

엽연채가 말했다.

“은혜라. 은혜를 베풀기는 하였으나 부자에게 들러붙을 마음을 품고 사람을 구하였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도성에 들어온 거고. 여기서 더 교활한 궤변을 늘어놓으려 한다면 철저하게 조사할 것이네.

공교롭게도 누군가가 이야기를 훔쳐 듣는 바람에 뱀을 쫓는 비방이 마을에 퍼졌다고 하였나?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건지 알고 싶군. 그래도 부족하면 자네가 도성에 와서 몸을 의탁하려고 했던 친척이 어디에 있는지도 조사해 보지.”

노교아는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고 맥이 풀린 채로 그 자리에 있었다.

“이이……!”

상황 파악이 덜 된 노 영감은 여전히 억지를 쓰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주운환이 싸늘한 모습으로 앞으로 한 발짝 나왔다. 살기 그득한, 흉흉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에 노 영감은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다시 삼켜 버렸다. 이어 주운환의 싸늘한 목소리가 방에 울렸다.

“낭자, 내 생명을 구해 줘 고맙고 그 은혜는 잊지 않을 것이네. 그런데 낭자의 친척은 내 이미 찾아냈으니 곧장 친척 집으로 거처를 옮겨 그들과 함께 지내게.”

그러자 노교아는 몸이 또 한 번 경직됐다.

‘무슨 친척을 찾아냈다는 거야!? 그건 그저 내가 의탁할 곳을 잃었다는 구실일 뿐이었는데…….’

“낭자, 마지막 체면이나마 챙기게.”

엽연채가 주운환을 거들어 쐐기를 박자 노교아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추길아, 청유를 데리고 함께 벽옥헌으로 가서 낭자와 그 조부의 물건을 정리하거라. 그리고 장방賬房(집안에서 돈이나 물건을 출납을 관리하던 곳)에 가서 은화 천 냥을 가져오너라.”

엽연채가 냉담한 목소리로 분부했다.

추길은 몸을 흠칫 떨더니 여전히 멍멍한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 나와 노교아를 부축했다.

노 영감이 또 큰 소리로 떠들어 대려고 하자 뜻밖에도 여양이 앞으로 한 걸음 나오더니 손수건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직접 그를 제압했다.

“영감님.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노 영감은 화가 나 눈 흰자위를 번뜩였지만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노교아는 하늘과 땅이 뱅뱅 도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문밖으로 걸어 나왔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밖엔 찬란한 햇살이 내리비추고 있었지만 그녀는 도리어 온몸에서 오한이 느껴졌다.

밖에 있던 여종들은 이미 시킨 일을 하고 있었고 두 사람이 나오는 모습을 본 청유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낭자, 영감님. 가시죠.”

소월과 백수는 이 상황을 보더니 두 눈을 살짝 깜빡였고 얼른 문밖으로 뛰어나가 벽옥헌으로 통하는 길을 전부 정리하고 모든 여종들을 앞마당에 배치했다.

사람들은 노교아를 둘러싸고 그녀의 처소로 돌아갔다.

청유는 수주에서의 일을 알게 된 후로 노교아가 당장 진서후부에서 사라져 버리기를 바랐다. 그러니 그녀가 솔선해서 그들을 내보내는 일을 처리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노교아와 노 영감은 짐도 별로 없어서 순식간에 깔끔히 정리가 됐고 이어 두 사람은 수화문에 서 있는 마차로 보내졌다. 끌채에 앉아 있는 여한이 말채찍을 가볍게 내리치자 마차가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마차에 오르자 그제야 노 영감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천이 벗겨졌다.

마차는 이미 후부 밖으로 나와 대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노교아는 점점 더 멀어지는, 사자가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의 웅장한 후부를 쳐다보며 눈시울을 붉히더니 눈물을 흘렸다.

노 영감은 천 냥짜리 은표銀票를 품에 챙기고도 여전히 투덜거렸다.

“맛있는 음식도 큰집도 없어졌구나. 수많은 하인들도 없어졌어! 요 며칠 동안 먹었던 맛있는 요리가 그들 말로는 한 끼에 열 냥도 넘는다고 하던데……. 고작 천 냥을 가지고 몇 끼나 먹을 수 있겠니? 큰집도, 큰 정원도… 전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노 영감은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억울해졌다.

그들 집안은 의원이긴 했지만 그래 봤자 촌에 사는 낭중郎中에 불과했다. 평범한 촌민들보다 좀 더 나은 생활을 하긴 했지만 날마다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후에 노교아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에 노 영감은 날마다 고기 반 근을 먹을 수 있다면, 집이 검은 벽돌과 기와로 만든 커다란 집으로 바뀐다면, 자다가도 웃으며 깰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는 천 냥은 고사하고 수십 냥만 있어도 그는 뛸 듯이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지주 집의 여식보다 더 좋은 옷을 입은 후부의 여종들을 봤고 한 끼에 닭, 오리, 거위 고기뿐만 아니라 상어 지느러미와 제비집 같은 것들이 나오는 밥상도 봤다. 그들이 생명을 살리는 귀중한 약초처럼 여기는 삼을 이들은 차로 끓여 물처럼 마셨다.

그러니 그가 어떻게 이전의 생활을 바라겠는가. 천 냥을 가지고 진서후부에서처럼 그렇게 호의호식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먹는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노교아가 후부로 시집을 갔다면 만사형통이었을 것이다. 노 영감은 신분이 크게 상승하리라고 기대했고, 그럼 시집간 딸과 그의 외손자도 더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외손자를 고관의 자리에 앉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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