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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598화 (598/858)

제598화

노교아도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엽연채를 바라보았다. 엽연채는 금줄 세공을 한, 봉황 문양과 야광주로 장식된 작은 순금 화관을 머리에 쓰고 진홍색 소매 없는 외투를 입었는데 외투의 가장자리가 새하얀 여우 털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화려하고 귀한 외투 한 벌만 해도 천금의 가치가 있어 자신들이 평생 먹고 살기에 충분할 성싶었다.

엽연채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고귀한 귀부인의 기품이 온몸에서 흘러넘쳤다. 그런 그녀가 아리땁고 요염한 눈으로 내려다보니 노교아는 그 눈빛만으로도 마구 짓밟히는 것만 같았다.

기세에서 크게 밀린 노교아는 몸을 들들거렸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눈물을 머금은 입술로 무어라 말하려 하는데, 엽연채가 옅은 미소를 짓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낭자, 우리 뒷공론하지 말고 여기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세!”

뜻밖의 말에 노교아는 가슴이 철렁했다.

“저… 전 부인께서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척 말게.”

엽연채가 코웃음을 치자 노교아는 여전히 눈물을 머금은 채로도 항의를 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제 할아버지는 어수룩한 분이라 아까는 흥분하여 그런 염치없는 소리를 하신 겁니다. 하지만 저는… 저희는 사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부인은 저희에게 계속 악의를 품고 계셨죠! 제 할아버지가 한 말이 듣기에는 거북하지만, 부인께서 저희를 미워하고 냉대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맞는 말일세. 그리고 그건 자네도 내게 악의를 품고 있기 때문이네!”

엽연채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빤히 보았고, 노교아는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이냐고? 하, 이러는 게 피곤하지도 않나?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자네가 내 부군을 구한 건 우리도 정말 고맙게 생각하네. 하지만 자네가 뱀을 물리치는 약을 준 건 뭘 알고 한 일도 아니니 따지자면 사소한 일이지. 그래도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 우린 자네에게 감사를 표했지.

그런데 이상한 건 그다음일세. 자네는 나중에 산에 비적 떼가 있다는 걸 알고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산에 올랐는데, 그건 어떤 목적을 품고 그리한 것 아닌가?”

“이……!”

노교아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런 소리 마십시오! 전 정말로 걱정이 돼서……! 부인은 제 호의를 목적을 품고 한 행동으로 곡해하시는 겁니까?”

“그게 아니면?”

엽연채는 눈썹을 추켜세우면서 반문했다.

“난 처음엔 의원들은 과연 생명을 중히 여겨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네. 그런데 자네들이 계속 순결을 들먹이는 걸 보니 이런 것들을 남들처럼 신경 쓰는 모양이야! 보아하니 전에도 부상자가 사내인지 여인인지를 매우 중요시했을 것 같네!”

“맞습니다! 남녀가 유별하니까요!”

노 영감이 끼어들어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우리 교아는 한 번도 이렇게 사람을 구한 적이 없습니다! 후야의 가슴에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후야의 옷을 벗겼던 겁니다. 살이 맞닿게 된 일을 밖에 있는 호위병들이 다 알고 있는데 교아에게 어떻게 시집을 가라는 겁니까? 후야께서 책임지셔야 합니다.”

그러자 엽연채가 비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순결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뭣 하러 외간 사내의 옷을 벗겼다는 말인가? 그때 주씨 가문 병사들은 전부 뱀을 물리치는 약초를 갖고 있었네. 모두 살아 있었고 움직일 수도 있었지.

낭자처럼 작은 여인이 내 부군과 여한을 함께 어깨에 메고 그 산굴로 갔다는 말은 하지 말게. 그 정도 무게를 혼자 감당했다면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끌고 가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럼 그간에 사람은 이미 죽었겠지!

그러니 분명 주씨 가문 병사들이 도와줬겠지. 소전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

정곡을 찔린 노교아는 낯빛이 확 변했다.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낭자는 어째서 도움을 구하지 않았는가? 참, 독은 어떻게 제거했는가?”

엽연채는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질문을 쏟아냈다.

“설마 옷을 벗기고 침을 놓아야 했는가? 아니면 입으로 뱀독을 빨았는가?”

“뱀독은… 아주 까다로운 거라… 확실히…….”

노교아는 확실히 입으로 빨아내야 한다고 대답하려고 했다. 그런데 엽연채가 코웃음을 치더니 말허리를 뚝 잘랐다.

“내가 의정醫正에게 물어봤는데 적명사의 독에는 입을 대면 안 된다고 하더군. 타액에 묻어도 중독되기 때문에 절대 입으로 뱀독을 빨아내면 안 된다고 했네.

그리고 그때 부군을 들고 산에서 내려와 의원에게 보였는데, 그자가 말하길 이미 해독약을 먹었다고 하더군. 하하, 낭자는 뱀을 잡아 생계를 꾸렸으니 당연히 항상 몸에 해독약을 지니고 있겠지. 그러니 낭자는 부군의 뱀독을 해독할 때 그저 해독약 하나를 먹였을 게야.

외상 이야기도 내가 먼저 하지. 낭자는 남녀가 유별함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순결 또한 중요하게 생각하니, 부군의 몸에 외상이 있으면 소전이나 장씨 등을 불러 그들에게 보일 수 있었네!

나중에 우리도 외상은 심하지 않고 뱀독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는 걸 알게 됐네. 그렇다면 더 궁금하군. 일 년 내내 행군하는 장씨와 소전 등은 충분히 상처를 동여맬 줄 아는데, 그들을 찾지 않고 낭자가 직접 부군의 옷을 벗기고 부군을 안아 가면서까지 상처를 동여맨 이유가 대체 뭔가?”

노교아의 안색은 시시때때로 달라졌다. 제 속셈이 낱낱이 밝혀진 줄 깨달은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노 영감의 손을 잡고 있는 손을 살짝 떨며 억지를 쓰려고 했다.

“저… 전…….”

“이제 와 의원들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다고 말을 바꾸진 말게나. 이곳에서 울며불며 낭자의 순결을 더럽힌 것을 책임지라고 생떼를 쓰고 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순결을 중요시하는 낭자가 어찌 부군의 옷을 벗기고 부군을 안은 것인가?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즉, 자네는 나에게도 깊은 악의를 품고 있었지! 그래서 난 자네가 싫었던 게야!”

엽연채는 싸늘한 목소리로 결론을 지었다.

“평범한 생명의 은인이었다면 나도 당연히 귀빈으로 극진히 대접했을 거네! 하지만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악의를 품은 자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도저히 좋게 대해 줄 수가 없네.”

불순한 목적, 그리고 악의. 주운환은 엽연채의 말을 듣더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저도 모르게 그녀의 작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노교아는 갑자기 벌거벗겨진 듯한 기분이 들며 분하고 수치스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자존심이 완전히 짓밟히는 느낌이 들어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체면 같은 건 깡그리 사라져 버렸고 치욕스럽다 못해 공포마저 느껴졌다.

그녀는 줄곧 시골에서 살아온 시골 처녀였지만 아버지가 의원이라 다른 처녀들하고는 입장이 좀 달랐다. 이 동네 저 동네에서 그들에게 방문을 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들을 떠받들어 주었으니까.

또 그녀는 얼굴도 반반하게 생겼고 의학적 지식도 있으니 오만한 태도로 다른 시골 처녀들을 업신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아무도 그녀 같은 어린 여인에게 진찰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순간에 하늘에서 진창으로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에 그녀도 원래는 시골 총각 중 누군가에게 시집가서 그냥 그렇게 살 거라고 생각했었다. 진서후 주운환을 만나기 전까진 말이다.

그때 멀리 바위에 늠름하게 앉아 있는 그를 보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구름 위에 걸려 있는 태양처럼 느껴졌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려한 외모에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풍기며,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느낌을 주는 사내. 마치 꿈처럼 아득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내였다.

그러나 주운환에게서는 그녀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느껴져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주운환과 병사들을 도와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노교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아쉬운 느낌이 들었고 마음이 괴로웠다. 자신의 인생이 그동안 너무도 평범하고 무미건조해서 싫증이 났다.

그런데 일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람이 어느 날 눈앞에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그런 큰 영웅을, 의기양양한 소년 장군을 언제 또 보겠어…….’

결국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녀는 걸어가면서 마음이 떨리고 긴장이 됐지만 또 한편으론 뜨겁게 달아올랐다.

물론 그녀는 그저 그들이 걱정될 뿐이었다. 그저 그 약들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는 것뿐이었고, 산에 있는 맹호가 걱정되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돌아가서 살펴만 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돕고 싶다고 반드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들이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그런 마음으로 산에 올랐는데, 때마침 위험한 장면을 맞닥뜨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랬다, 그녀는 눈앞에서 맹호 한 마리가 주운환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맹호는 주운환이 쏜 총에 목이 뚫려 죽고 말았지만, 그 전에 녀석의 발톱이 그를 할퀴었고 피비린내 때문에 주위에 있는 적명사들이 순식간에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뱀을 쫓는 약초도 전혀 효용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린 듯 풍채가 탁월한 그 소년 장군이 그렇게 바닥으로 쓰러졌다.

노교아 스스로도 그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른다. 맹호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용감하게 앞으로 달려들어 그를 받쳤고 자신의 등에 그를 기대게 했다.

그때, 어째서인지 두려움과 걱정 외에 흥분과 기대감도 조금 들었다. 이어 소전을 비롯한 주씨 가문 병사 몇 명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고, 그녀는 그들과 함께 주운환을 안전한 산굴로 옮겼다.

주운환을 산굴로 옮긴 후 그녀는 얼른 주운환과 여한에게 해독약을 먹였다. 하지만 독이 이미 몸 안으로 침투했고 두 사람은 부상도 입은 상태라 독을 빠르게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녀가 산 아래에서 뱀을 쫓는 약을 제공했고 주씨 가문 병사들은 그녀에게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주운환도 그녀를 믿고 그녀의 방법을 썼다. 소전과 장씨 등도 당연히 그녀를 매우 신임했다.

이를 아는 그녀는 모든 걸 자신에게 맡기라면서 소전과 장씨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주운환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멀리서 여인 목소리 같은 게 들렸다. ‘부군!’이라고 외치는 목소리를 듣자 그녀는 얼른 주운환을 안고 약을 갈아 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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