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7화
노교아와 추길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주운환을 쳐다봤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청수하고 화려했지만 날카로운 눈썹은 매서운 기세를, 살짝 올라간 눈초리는 오만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수려한 외모가 위엄을 드러내니 두 사람은 감히 그를 더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특히 찔리는 게 있는 노교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낭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겠네.”
주운환은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노교아를 향해 읍하고는 이렇게 말을 보탰다.
“낭자가 어려움에 처했으니 나는 정말로 낭자를 돕고 싶네. 하지만 낭자가 이곳에서 지내면 내자가 힘들어하니… 낭자가 내 생명을 구해 준 은혜는 돈으로 보답하는 방법 외에는 갚을 길이 없네.”
노교아는 주운환이 꺼내는 말마다 엽연채를 보호하는 말뿐이라 속에서 질투심이 끓어올랐고 마지막 말을 듣더니 그만 굳어 버리고 말았다.
‘뭐라고? 돈으로 보답하는 방법 외에는 갚을 길이 없다고? 돈? 돈이라니!’
옆에 있던 혜연조차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좀 너무한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후야, 오해이십니다…….”
노교아는 얼른 이렇게 말하고는 입술을 깨물더니 치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그때 후야를 구해 드린 건 의로운 마음에서였지, 결코 뭔가를 바라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전 후야와 후 부인께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습니다……. 몸을 의탁할 곳을 잃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곳을 찾아오지 않았을 겁니다.”
“이거 놔라!”
이때, 밖에서 누군가가 노여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엽연채와 주운환은 깜짝 놀라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영감이… 어떻게 여기까지 들이닥친 거야! 여긴 그쪽이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니 어서 나가요!”
밖에서 청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왜 못 들어간단 말이냐?”
노 영감은 물러서기는커녕 꽥 소리를 지르더니 이내 훌쩍이기 시작했다.
“세상천지에 이런 법이 어딨어? 우리 교아는 후야의 목숨을 구했다. 우린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이곳에 와서 며칠 지낸 것뿐인데……. 우린 이곳에서 손님조차 아니구나. 방에 들어가는 것조차 안 되다니. 방을 좀 보겠다는데 생명의 은인을 이렇게 막아서고 막 대하는구나!”
“할아버지!”
노교아는 놀라 외쳤으나 엽연채는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길을 익혀 이곳까지 혼자 왔다? 이곳이 얼마나 넓고 또 문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지.’
엽연채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밖에다 일렀다.
“청유야, 안으로 들이거라.”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촤락 소리가 들리며 노 영감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노 영감은 한쪽에 앉아 있는 엽연채를 쳐다보다가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노교아를 보더니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이게 뭡니까? 저희를 내쫓으려는 겁니까?”
“할아버지… 그만하세요!”
노교아는 다급히 그를 뜯어말렸다.
“여기 도성은… 저희도 사는 게 익숙하지 않으니 어서 돌아가요…….”
“무슨 말을 하는 게냐? 우리가 왜?”
노 영감은 목에 힘을 빳빳이 주고 소리를 지르더니 주운환에게 삿대질까지 했다.
“이런 배은망덕한 사람을 봤나! 이럴 줄 알았다면 구해 주지 않았을 게요! 동우산에서 죽게 내버려 뒀을 거라고! 독사에게 물려 죽고 대호大虎가 잘근잘근 씹어 먹어 뼈도 못 추리게 놔뒀을 거란 말이오!
교아가 구해 주지 않았다면 후야를 비롯한 수천 명이 전부 동우산에서 죽었을 거요. 어디 지금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겠을까! 지금 은인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 돕기는커녕 내쫓으려고 하다니!”
“돕는다고 했네. 어떻게 돕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돈을 줄 것이네.”
주운환의 대꾸에 노 영감은 순간 경직되더니 불같이 화를 냈다.
“돈 몇 푼 주고서 쫓아내려는 겁니까? 우릴 거지로 보는 거요? 후야의 목숨은 그 정도 가치밖에 안 됩니까? 후야와 병사들을 구하지 않았다면 우린 마을 사람들에게 내쫓기지 않았을 거외다!”
“그래서 내가 돈을 주겠다고 말하지 않는가!”
주운환의 준미한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후야,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저흰 금전을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그때 나리를 구해 드린 건 그저 의로운 행동이었습니다…….”
노교아는 이리 변명하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럼 낭자는 어째서 이곳에 왔는가?”
주운환이 냉담한 목소리로 묻자 노교아는 입술을 짓깨물며 말했다.
“몸을 의탁할 곳을 잃지 않았다면… 생계 수단을 잃지 않았다면… 저희는, 저희는 절대로 이곳을 찾아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낭자와 낭자의 할아버지에게 필요한 건 역시 돈이군.”
주운환이 날카로운 눈썹을 추켜세웠다.
“돈이 생기면 낭자는 다른 곳에 가서 집도 사고 생계도 꾸릴 수 있네. 그뿐만 아니라 약방을 열어 거처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생계도 이어 나갈 수 있네! 돈은 속된 것이기는 하나 사람은 생활을 해야 하니 누구나 이런 속된 것을 필요로 하네!
지금 이 속된 것을 잃었기 때문에 자네들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자네들을 도와주겠네.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
노교아는 몸을 살짝 떨며 말했다.
“다른 곳에 가서 생계를 꾸리라니요……. 저희는 고향을 떠나기가 아쉽습니다.”
“흠? 자네들은 이미 고향을 떠나오지 않았는가?”
엽연채가 비웃음과 함께 반문하자 노교아는 표정이 홱 굳었다. 할 말을 잃은 탓에 낯빛 또한 더욱 어두워졌다.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하니 그럼 해결하기 더 좋겠군.”
주운환이 말했다.
“내가 자네들에게 큰돈을 줄 테니 그걸 가지고 고향으로 가게. 내 장담하는데 그 돈이면 남은 평생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네.”
노교아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말려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노 영감은 답답한 나머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게 뭡니까? 저희를 고향으로 쫓아 버리려는 속셈 아닙니까? 돈이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습니까? 저희도 돈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닙니다!
교아는 후야를 구했고 후야와 살을 맞댔습니다. 이를 모두가 알게 됐는데 교아에게 어떻게 시집을 가라는 겁니까? 후야는 사내이면서 어째서 교아를 책임지지 않는 겁니까? 이건 교아의 순결을 더럽힌 것이니 이 아이보고 죽으라는 겁니다!
아아,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이건 교아를 죽음으로 내모는 겁니다! 생명의 은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거라고요!”
“그만하거라!”
인내심이 동난 엽연채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러곤 냉담한 눈빛으로 노교아와 노 영감을 쓱 쳐다봤다.
“하, 이제 알겠네. 분명 이 독한 여편네가 부추기는 거야!”
노 영감은 이성을 잃고 나오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후야께서 첩실을 들이는 게 뭐 어려운 일입니까? 그런데 저 여인이 여우같이 곱상한 얼굴과 회임을 핑계로 교아를 첩실로 못들이게 하는 거지. 교아가 생명의 은인이니 자기 자리를 위협할까 봐 걱정이 드는 거야. 그래서 후야께서 은혜를 갚으시려는 걸 막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생명의 은인을 이리 냉담하게 대할 수 있겠어! 생명의 은인이 집에 찾아왔는데 어느 교양 있는 귀부인이 그 사람을 귀빈으로 정중히 대접하지 않겠어! 여우같이 사내를 홀리는 당신! 바로 당신이 우리를 구걸하는 사람처럼 만들어 버린 거지!
은인이 집을 찾아왔는데도 내내 쌀쌀맞게 굴더니 이젠 우리를 다른 곳으로 치워 버리려고 하네! 분명 교아가 두려운 게지! 그래서 교아를 밀어내고 죽음으로 내몰려는 게지! 이 요망한! 아악!”
고함을 치던 그는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날아가 뒤쪽의 벽에 부딪치더니 그제야 잠잠해졌다.
“꺄악! 할아버지! 괘, 괜찮으세요?”
노교아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냅다 달려가 노 영감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러고는 겁에 질린 모습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운환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고 온몸에선 주위의 공기를 얼려 버릴 것처럼 싸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선 적의 시체를 산처럼 쌓아 놓던 때의 살기가 넘실거렸다.
노교아와 노 영감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특히 ‘생명을 구해 줬다.’ ‘생명의 은인을 죽이려 한다.’ ‘배은망덕하다.’ 따위의 말을 마구 쏟아 내려 했던 노 영감은 그 말들이 전부 목구멍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한마디도 더 꺼낼 수 없었다.
생각 없이 툭 뱉었다가는 이 자리에서 주운환에게 갈가리 찢겨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
노교아와 노 영감은 사신처럼 그들 앞에 우뚝 서 있는 주운환의 모습을 보더니 하고 싶은 말을 전부 가슴속에 묻었다. 두 사람은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뭐, 뭘 어쩌려는 겁니까…….”
노 영감은 방금까지의 기세등등하던 모습을 죄 잃어버리고 더듬거렸다. 그러곤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닦고 벽 모퉁이 쪽으로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통증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내가 너희들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너희들은 날 무릎 꿇릴 수 있고 금전적인 보답을 요구할 수 있으며 앞으로의 생활을 책임져 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감히 내 내자를 모욕하면 소전의 말로가 너희들의 말로가 될 것이다!”
주운환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은 칼끝처럼 날카로웠고 그들을 향해 살기가 가득한 말들을 쏟아냈다.
노교아는 순간 두 눈을 부릅떴다.
‘소전이라면…….’
“소, 소전의… 말로…….”
노 영감은 두려운 마음에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혀를 뽑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매질을 했지!”
주운환이 확인 사살하며 냉소를 짓자 노 영감은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소전이 누구인지는 그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노교아가 주운환을 구한 후 소전이 노교아를 집으로 데려다줬고 이틀 후에 또 그가 와서 사례금을 건넸다. 게다가 자신들이 도성으로 올라왔을 때도 소전이 그들을 진서후부로 데려왔다.
이에 노 영감은 소전이 아주 좋은 사람이며 그들을 도와주려는 선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소전이 죽었다고? 혀를 뽑히고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매질을 당했다고?’
노 영감은 표정이 싹 굳어서는 입술을 달달 떨었다. 그러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아… 흑흑, 저희는 생명의 은인입니다… 흑흑……. 후야의 목숨을 구했고 주씨 가문 병사들을 구했습니다……. 교아가 아니었다면 후야는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주씨 가문 병사들도 전부 죽었겠죠… 흑흑…….”
그는 생떼를 쓰듯 입을 벌리고 슬피 통곡을 했다.
그러자 더없이 잘생긴 주운환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수묵으로 그린 것 같은 눈에선 날카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때, 뭔가가 그의 어깨 부근을 살짝 스쳤다. 주운환이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돌려 보니 엽연채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눈빛은 더없이 부드럽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