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6화
그들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더 보낸 후 이튿날 이른 아침 도성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정선제의 병이 위중하니 별장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주운환뿐 아니라 다른 귀족들도 모두 황궁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신년 축하주를 마시지 않을 수 있으면 가급적 마시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왕래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었다. 이 왕래도 주운환이 매화장에서 이틀만 머무르고 진서후부로 귀가한 이유 중 하나였다.
노교아와 추길은 별장에 갈 때 신바람이 났었는데, 진서후부로 돌아갈 때는 맥 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이미 시간은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마차에서 뛰어내린 노교아는 고개를 돌려 엽연채가 타고 있는 앞쪽의 마차를 쳐다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청유와 소월 등은 엽연채가 집으로 돌아온 걸 알고는 얼른 그녀를 맞이하러 나왔다.
“마님께서는 아직 마차에서 안 내리셨어요?”
혜연이 의아해하는 청유에게 대답해 주었다.
“잠들어 계셔.”
주운환은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몸을 숙여 잠이 든 엽연채를 소중히 안고 밖으로 나와 처소를 향해 걸어갔고, 혜연과 청유 등은 얼른 후다닥 그 뒤를 따라갔다.
추길은 멀찍이 뒤에 서서 그들을 따라가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집으로 오는 내내 마차가 그렇게 흔들렸는데, 엽연채는 용케도 잠이 들어 저렇게 총애를 받았다.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괴로워하기는 노교아도 매한가지였다. 엽연채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다시금 상기한 그녀는 수화문을 넘은 후 곧바로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노교아가 방으로 돌아와 보니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상 위엔 여덟 가지 반찬과 국 한 가지가 놓여 있었고, 노 영감은 상 위로 몸을 숙인 채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중이었다.
노교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뜸 싫은 소리부터 했다.
“할아버지, 제발 천천히 드세요. 이렇게 마구 드시면 남들이 저희를 어찌 보겠느냐고요. 창피하지도 않으세요?”
그녀는 부끄럽다 못해 화가 나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창피하긴 뭐가 창피해. 지금 안 먹어 두면 앞으로 또 먹을 수 있단 보장이 없는데. 꺼억.”
노 영감은 용트림을 하고도 계속해서 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집어 먹었다.
노교아는 이 말을 듣고 뜨끔하더니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발을 동동 굴렀으나 걸신들린 할아버지를 말리는 데도 실패했으니 그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침울해진 노교아는 침상에 엎드려 쉬었다. 그녀가 막 잠들기 전 미시未時(오후 1시~3시)쯤에 여종 한 명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마님께서 낭자를 부르세요.”
노교아는 조금 어리둥절해 되물었다.
“저를 부르신다고요?”
‘전에는 계속 날 피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갑자기 보자고 하는 걸까?’
노교아는 소전의 일과 소전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소전 때문은 아니겠지…….’
그녀는 이렇게 자신을 달랬으나 속으로는 더욱 긴장되고 불안해졌다.
“알겠어요. 길을 안내해 줘요.”
노교아는 여종을 따라 문밖으로 나갔고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대저택을 걸어갔다.
그녀는 원래 길을 잘 익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몇 번을 걸었는데도 여전히 길을 익힐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커도 너무 컸다.
잠시 후, 노교아는 여종을 따라 운연거 안으로 들어섰다.
따뜻한 방 안으로 들어온 노교아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엽연채가 탑상에 앉아 있었는데 그녀뿐만 아니라 주운환도 함께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혜연과 추길은 엽연채 옆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른 정신을 가다듬은 노교아는 고개를 숙이고 예를 올렸다.
“후야와 후 부인을 뵈옵니다.”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네. 어서 일어나게.”
예를 면해 준 사람은 주운환이었다.
노교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동자를 굴리더니 엽연채와 주운환을 힐끗 쳐다봤다. 그녀는 한층 더 긴장이 돼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쪽에 서 있는 추길도 긴장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리께서 노교아를 무슨 일로 부르신 걸까? 부부가 화해를 했으니 노교아의 일도 이미 상의를 마친 걸까? 노교아를 첩실로 들이기로 합의를 본 걸까?’
추길은 이런 생각을 하니 흥분이 됐다.
“낭자.”
주운환은 노교아를 쳐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매화장에 있을 때 소전이 함부로 입을 놀려 난 몹시 분노했었네. 하지만 어쨌든 낭자의 이야기가 언급됐으니 내가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어 이리 부른 걸세.”
“그게…….”
노교아는 깜짝 놀랐고 가슴이 쿵쿵 뛰었다. 마음이 한껏 조여든 나머지 몸 옆에 붙인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
한편, 추길은 두 눈을 반짝이며 주운환을 쳐다봤다.
‘이제 이 이야기를 꺼내는구나!’
드디어 염원대로 일이 풀리는 순간이 온 것이었다.
“그때 소전이 낭자가 날 구하느라 정혼자와 오해가 생겼고 생계 수단도 잃게 되어 고향을 떠났다고 했지.”
주운환은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너무 미안해서 여한을 보내 낭자의 정혼자를 찾아냈네. 그자가 여기에 왔다네.”
‘정혼자?’
뜻밖의 이야기에 노교아는 참한 얼굴이 싹 굳으면서, 머릿속에서는 윙 소리가 울려 퍼졌다.
추길도 현기증이 나 멍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엽연채는 청화 찻잔을 들어 올리더니 냉담한 눈으로 그런 추길을 힐끗했다.
“추길아, 가서 그자를 데려오거라. 동쪽 측문에 있다.”
추길은 깜짝 놀랐다. 왜 하필 자신에게 나가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감히 의문을 표할 수는 없었다. 추길은 입을 약간 오므리더니 여전히 얼빠진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충격을 받은 노교아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어리벙벙한 상태였다.
잠시 후,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추길이 굳은 얼굴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평범한 외모를 가진 한 사내가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사내는 깨끗하게 세탁된 회색 솜옷 차림이었는데 날이 추워서 옷을 두껍게 많이 입고 있었다. 하도 껴입어 몸이 불룩해 보일 지경이었다.
“교아야……. 마침내 널 찾게 됐구나.”
그 사내는 노교아를 보더니 감격스러워하며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노교아의 표정이 싹 변했다.
“아닙니다, 후야. 이 사람은 제 정혼자가 아니에요. 저와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교아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사내는 상심한 얼굴을 했고, 낯빛이 창백해진 노교아는 눈물을 머금고 주운환을 불렀다.
“후야! 이 사내는 제 정혼자가 아닙니다. 이 사람 이름은 두사강인데 능글맞고 뻔뻔한 사람이에요. 전에 줄곧 제게 눈독을 들이며… 몇 번이나 저희 집을 찾아왔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몇 번이나 이자를 쫓아내셨는지 모릅니다!”
이 말에 주운환은 싸늘한 눈빛으로 두사강을 쓱 쳐다봤다.
“자네, 정혼자가 아닌 겐가?”
두사강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무어라 변명을 하려 했다.
“저…….”
그때, 주운환이 날카로운 눈으로 쓱 쳐다보자 그는 놀라서 몸을 떨었고, 두 무릎에도 힘이 풀려 하마터면 무릎까지 꿇을 뻔했다. 그는 사실대로 고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전 교아를 정말 좋아합니다…….”
“썩 꺼지거라!”
그가 정혼자가 아닌 걸 알게 된 주운환이 냉담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두사강은 불만스러웠지만 결국 돌아서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떠나자 노교아와 추길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그러더니 노교아는 억울함에 입술을 꽉 깨물며 엽연채를 쳐다봤다.
엽연채는 입꼬리를 올리며 싸늘한 기운을 풍겼다. 무슨 뜻으로 노교아가 자신을 이렇게 빤히 본단 말인가.
주운환이 말했다.
“낭자가 정혼자가 있다 말해서 여한이 낭자의 마을에 가서 수소문을 해 봤네. 그러자 저 두사강이라는 자가 바로 다가와 자신이 정혼자라고 했지. 여한은 틀림없다는 그자의 말을 듣고 그자를 진짜 정혼자라고 생각해 이리로 데려온 거네.”
“후야께 폐를 끼쳤습니다…….”
노교아는 아랫입술을 물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데 그녀가 눈물을 떨구려는 찰나, 갑자기 주운환이 픽 하고 웃는 게 아닌가.
“저자가 아니라면, 그럼 낭자의 정혼자는 누군가? 내 그자를 찾아내 두 사람의 오해를 풀어 주겠네.”
그러자 노교아는 기함하며 낯빛이 또다시 하얗게 변했다. 그녀가 입을 열려는 찰나 추길이 새파란 얼굴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리, 낭자의 정혼자는 낭자가… 나리와 살을 맞댄 일을 고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낭자를 버린 거죠…….”
추길은 그리 말하며 주운환을 쳐다봤다. 일부러 ‘살을 맞댔다.’라고 강조했음은 두말하면 입만 아팠다.
“지금 그 사람을 찾아내 나리께서 혼약을 이행하도록 강요한다고 해도, 그 사람은 낭자에게 잘하지 않을 겁니다. 굳이 이런 부질없는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엽연채는 필사적인 추길을 보더니 입꼬리를 쓱 당길 뿐이었다. 반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던 노교아는 얼른 고개를 끄덕여 추길의 말에 동조했다. 그러자 주운환은 재차 ‘픽’ 입바람을 불었다.
“나도 그렇게 경솔한 사람이 아니다. 당연히 그자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본 후에 계획을 세워야겠지. 낭자의 정혼자가 정말로 낭자를 부탁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어찌 됐든 파혼을 하자고 한 사람 아닌가. 만약 그자가 입이 가벼워 낭자의 평판을 더럽히려 든다면 어쩌겠느냐? 낭자의 정조와 평판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자를 찾아내 경고해야 한다.”
“그래요. 필히 찾아내야 해요.”
엽연채가 옅은 미소를 짓더니 노교아를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걱정 말게. 낭자는 그자의 이름만 말하면 되네. 이름을 알면 그자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게다가 그자는 멋대로 낭자를 버렸으니 정말 괘씸하기 짝이 없지. 우리가 그자를 혼쭐내서 낭자의 원한을 풀어 주겠네.”
노교아는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고 머리를 굴리더니 얼굴을 살짝 숙이며 말했다.
“사실… 두 분께서 오해하고 계신 겁니다……. 제겐 정혼자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 말에 추길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주운환은 의아하단 듯이 물었다.
“그런 사람이 없었는데 어째서 소전이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저도 소전이 왜 그런 말을 해서 사람들을 오해하게 만든 건지 모르겠습니다. 전 부끄러움을 잘 타고 그땐 사람들이 제게 술을 권하며 왁자지껄 떠들어 대서 소전이 뭐라고 말했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저도… 방금 전 후야께서 정혼자 이야기를 하셔서 이제야 소전이 그날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후야의 말을 듣고 있었던 겁니다…….
다만 조금 전 그 사람이 제 정혼자가 아니라고 말했는데 그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전 정혼자 같은 건 전혀 없었으니까요……. 지금 후야께서 좋은 의도로 묻고 계시니… 저도 정확히 이야기해 드리는 겁니다.”
추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순간, 싸늘한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
“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