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5화
상석에 앉아 있는 엽연채는 죽상을 짓고 있는 사내들을 보더니 작게 웃음을 짓고는 이렇게 말했다.
“원래는 술 냄새를 맡지 못했는데 이곳에 매화가 있어 그렇게 강하게 느껴지는 것 같지 않네요. 저들은 원래 독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니 마시게 두세요. 냄새가 중화되어서 저는 괜찮아요. 술을 마시거라! 난 괜찮다.”
허락이 떨어지자 장씨 등은 두 눈을 반짝이며 주운환을 쳐다봤다. 그 눈길에 주운환은 날카로운 눈썹을 추켜올리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럼 한 사발씩만 마시거라! 천천히 마시고! 술을 콸콸 부어 술 냄새가 퍼져 나가는 일 없게 하고.”
‘겨우 한 사발?’
기대에 부풀었던 장씨 등은 다시 몸이 경직됐다. 하지만 술을 아예 못 마시는 것보다는 나았다.
“알겠습니다! 헤헤헤. 감사합니다, 마님. 관리인, 가서 가장 큰 사발을 가져오게! 아니 밥 지을 때 쓰는 솥을 가져오게!”
“저도요!”
“나도!”
별장 관리인은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그렇게 많은 솥단지가 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솥은 없어도 큰 사발과 국그릇은 많이 있었다. 그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매화림에서는 기이하고도 우스운 풍경이 펼쳐졌다.
사람들 앞에 놓인 작은 탁자 위엔 술로 가득 찬 커다란 그릇들이 주르륵 올려졌고, 우락부락한 사내들은 그 술을 홀짝거리고 핥으며 더없이 조심스럽게 마셨다.
엽연채는 이 희한한 광경을 쳐다보며 웃음을 흘렸다. 주운환은 우스워하는 그 모습을 보더니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그녀의 조그만 얼굴을 감싸 쥐며 말을 붙였다.
“재미있습니까?”
“네.”
“앞으로 더 재밌게 지냅시다. 아이를 낳으면 부인을 데리고 응성에도 가고 옥안관에도 가려고 합니다. 변방에 가서 제가 전투하던 곳을 보여 주겠습니다. 또 말 타는 법도 가르쳐 주고 싶군요.”
주운환은 그리 말하며 그녀를 자신의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엽연채는 그의 품에 기대어 있으니 달콤한 기분이 들면서 안심이 됐다.
“좋아요.”
주운환은 자신의 인생이 엽연채로 가득 차기를 바랐다. 그가 경험한 것들, 그의 모든 것들을,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전부 그녀와 공유할 심산이었다.
사람들은 한창 술기운이 오르고 있었다. 엽연채는 녹차가 든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입술을 위로 말며 개중 한 명을 콕 짚었다.
“참, 평해 자네 집에는 여인들이 많다고 하던데.”
이 순간 평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존재감을 한껏 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제 이름이 불릴 줄은 몰라 깜짝 놀랐다.
엽연채가 평해라는 이름을 말하자마자, 장씨를 포함한 우락부락한 사내들은 전부 술잔을 드는 동작을 멈추고는 힐끗 평해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상석의 배나무로 만든 낮은 탁자 앞에 앉아 있는 엽연채를 살폈다.
오늘은 마침 날이 좋아 겹겹의 매화 나뭇가지를 뚫고 아래로 햇살이 내리비추었고, 엽연채가 입은 진홍색 외투 위로도 그 햇살이 드리워져 있었다. 꼭 노란 햇빛을 덧입은 것처럼 보이는 그녀에게선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풍겨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엽연채는 보기 좋은 각도로 붉은 입술을 위로 당겼고 아리따운 용모와 부드럽고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뒤에 펼쳐져 있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매화림이 그녀의 미모 때문에 더없이 초라해 보였다.
엽연채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녀에게서 유달리 무겁고 싸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녀의 눈동자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반짝거리며 일렁였지만 차가운 한기가 어려 있는 듯 보였다.
평해는 가슴이 쿵쿵 뛰며 몸이 뻣뻣하게 경직됐다. 그는 술 사발을 내려놓더니 스스로 생각하기에 최대한 적절해 보이는 미소를, 있는 힘을 다해 얼굴에 띠었다.
“하하. 마님…….”
그러나 엽연채는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옥조였다.
“어제 들어 보니 자네 집에 또 경사가 있다고 하던데. 첩실을 들인다고 했지.”
평해는 하하 하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둘러댔다.
“저… 그건 그저 농담이었습니다.”
그는 엽연채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일로 트집을 잡으려 한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얼른 그녀의 말을 부인했다.
“아니었다고?”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며 반문했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평해 자네가 아내 곁에 있는 여종을 첩실로 들인 걸 알고 있던데, 어찌 아니라고 하는 겐가? 역시 급료가 너무 많은 건가? 돈이 넘쳐흐르니 첩실도 여럿 거느릴 수 있는 거겠지.”
이 말에 평해는 코를 만지작거렸다.
가문의 호위병 대장인 그는 주운환과 함께 출정하지는 않아 장씨 등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문을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맡은 간부였다.
그러한 까닭에 한 달 급료가 무려 열 냥이나 되니 여인 두셋을 데리고 살기에 충분한 형편이었다. 여력이 되자마자 평해는 자기 집에서 부리는 여종을 첩실로 들였고 집 안에 상도 차려 잔치를 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그와 잘 알고 지내던 몇몇은 그 잔치에 왔었으니 그 일이 없었다고 잡아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평해는 그저 허허 웃으며 변명했다.
“제 마누라가 억지로 붙여 준 겁니다.”
“안 붙여 주면 때렸나 보지?”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리나 싶더니 이내 그를 매섭게 질책했다.
“대제의 규율에 따르면 평민은 첩실을 들일 수 없다!”
“그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이 말을 듣더니 모두 좌불안석, 어쩔 줄 모르고 두 눈을 부릅떴다.
분명 평민은 첩실을 들여서는 안 된다는 규율이 있었다. 벼슬아치나 공명이 있는 자, 귀족의 자제만 처첩을 여럿 두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이 규율은 있으나마나 했다. 누가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따르겠는가?
돈 좀 있다 하는 사내들은 전부 첩실을 들였다. 그리고 상인들은 남아도는 게 돈이라 집안에 첩실과 이낭들이 수두룩했다. 관아에서는 이를 목격해도 벌을 내리지 않았고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 규율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무용지물한 것이었다.
가령 어떤 상인이 첩실을 들여 큰 잔치도 벌이고 일부 관리들을 불러 술까지 대접한대도 누가 이를 상관하려 하겠는가. 이건 백성이 고하지 않으면 관리들도 추궁하지 않는 일, 아니 백성이 고한다고 해도 관리들이 추궁하지 않는 일에 속했다.
그런데 엽연채가 뜬금없이 이 일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마님… 그게…….”
평해는 화가 나면서도 두려웠다. 이건 권세가 없다고 사람을 괴롭히는 짓 아닌가? 하지만 자신에게는 정말로 힘이 없었다.
“끌고 나가 곤장 스무 대를 때리거라. 우리 진서후부에 이렇게 규율을 준수하지 않는 자는 필요 없다!”
“그, 그게 무슨……!”
엽연채의 명에 평해는 온몸이 경직됐다. 그러나 엽연채의 웃는 듯 마는 듯 차가운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부르르 떨며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에야 말을 더듬으며 겨우 이렇게 인사했다.
“마, 마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장씨 등은 멍한 표정을 지었고 저도 모르게 몸을 곧추세웠다.
그들도 바보가 아니었다. 엽연채가 평해를 처벌하려고 핑계를 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걸 누가 모르겠는가.
왜 하필 평해가 찍혔냐면, 그가 어제 소전 다음으로 말을 가장 많이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놓고 엽연채를 욕하지는 않았지만 소전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식으로 엽연채를 핍박했다.
하지만 소전의 말로를 생각해 보면 평해에게 내려진 벌은 그야말로 새 발의 피였다.
누군가가 앞으로 나와 평해를 끌고 나갔다. 끌려가는 평해는 낯빛이 새파랬지만 그래도 다행이라는 눈빛을 보였다. 어쨌든 소전과 같은 처참한 말로는 맞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냥 마음이 편할 수만은 없었다. 진서후부의 호위병 대장직은 세상에 다시 없을 짭짤한 보직이었다. 이대로 쫓겨나면 어딜 가서 이런 좋은 일을 구한단 말인가?
게다가 그의 이력에도 큰 오점이 생기는 셈이었다. 이후에 다시 호위병이 되고 싶어 해도 그를 원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대갓집은커녕 표국鏢局(개인의 재물과 신변을 보호해 주는 경비 및 호송 업체)에 간다 해도 그를 고용해 주지 않을지도 몰랐다.
매달 열 냥을 받는 괜찮은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앞으로는 한 달에 한 냥도 벌기 힘들지도 몰랐다. 앞으로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더욱이 첩실을 들인 지 얼마 안 됐고, 얼마 전에는 어린 계집아이까지 사 왔는데 말이다.
앞으로 펼쳐질 고생스러운 나날들을 생각하니 평해는 후회막급이었다.
평해가 매화림 입구 밖으로 사라진 뒤 이어 멀지 않은 곳에서 곤장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장씨 등은 저도 모르게 코를 만지작거리며 상전들을 힐끔했다.
그들은 평해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어 보였다. 주운환은 태평하게 압자고나 집어 엽연채에게 권하고,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리며 그런 그를 모른 체할 뿐이었다.
장씨 등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마님의 심기를 건드리면 절대 안 되었다. 마님에게 잘못을 들키면 매를 맞고 진서후부에서 쫓겨나 생계를 잃는다. 이건 그나마 양반이고, 마님 눈 밖에 날 짓을 한 걸 후야에게 들키면 혀를 뽑히고 맞아 죽게 될 것이다.
한편, 노교아는 찻잔을 든 채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녀가 앉은 탁자 모서리에는 과일주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전에는 이런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어 어제 처음으로 맛을 보았는데 정말 맛이 끝내줬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도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주운환이 엽연채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것이니 말이다. 이제는 냄새만 맡아도 시큼한 맛이 느껴지는 듯했다.
“허허! 마님, 고기가 다 익었습니다.”
이때, 별장 관리인이 미소를 지으며 고기를 접시 위에 올리더니 먼저 주운환과 엽연채 앞으로 들고 왔다. 그런 후에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차례로 나눠 줬다.
구운 고기 냄새와 화로의 열기가 더해져 방금 전까지 얼어붙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조금 누그러졌다. 또 여양이 우락부락한 사내들을 이끌고 군가를 부르자 분위기는 연회답게, 차츰 떠들썩하게 변했다.
주운환은 분위기가 풀리고 엽연채도 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