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4화
“마님, 진씨 가문 부인께서 오셨어요.”
혜연이 미소를 지으며 알려 왔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엽영교와 제민이 안으로 들어왔다. 엽영교는 만면에 미소를 띤 엽연채와 차분한 표정의 주운환을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부부는 정말로 싸우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모, 민아, 어서 앉아요.”
엽연채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엽영교와 제민은 자리에 앉았고 주운환은 여인들에게 자기들끼리 이야기할 시간을 줘야겠다는 생각에 자리를 비켜 줬다.
한편, 추길은 엽연채가 엽영교와 제민 앞에서 주운환이 얼마나 본인을 사랑하는지 자랑을 늘어놓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이야기는 조금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방 안이 시끌벅적한 틈을 타 밖으로 나갔고 별장의 이곳저곳을 한가로이 돌아다녔다.
그러나 추길의 기대와는 달리 할 일이 없으니 마음속이 오히려 더욱 시끄러워졌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주방에 도착했다. 저 멀리서 별장 관리인의 아내를 비롯한 사람들이 점심 식사와 고기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추길은 온 김에 안으로 들어가 식사 준비를 돕기 시작했다. 관리인의 아내는 안주인을 곁에 모시는 신변 여종이 오자 ‘아이고’ 하며 아주 반가워했다.
추길과 혜연 수준의 여종들은 상전을 따라다니는 지위 있는 여종들이라 별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집에서도 좀처럼 주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추길이 지금 스스로를 낮추고 주방에 들어와 술과 음식 준비를 도우니, 관리인의 아내는 저절로 그녀에게 호감이 들었다.
“추길이는 얼굴도 꽃같이 예쁠 뿐만 아니라 거드름도 전혀 피우지 않는구나. 어떤 운 좋은 녀석이 추길이를 데려갈까? 모르긴 몰라도 이런 좋은 낭자는 누구에게 시집을 가도 손해를 보는 거지. 하하하!”
추길은 칭찬을 듣자 기분이 좋아지면서 갸름한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이내 또 마음이 쓰렸다. 그녀 말대로 자신의 미래와 활로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할수록 답답해졌다.
추길은 밀가루를 반죽하며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마마도 참. 농담하지 마세요. 저 같은 사람을… 누가 원하겠어요.”
그녀는 그리 말하더니 갑작스레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이고,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추길은 눈물을 닦더니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관리인의 아내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그저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저런…….”
관리인의 아내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추길의 슬픈 뒷모습을 쳐다보며 조용히 한숨지었다.
주방을 떠난 추길은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주방 근처의 매화나무 아래로 걸어가더니 그곳에 쪼그리고 앉아 울기 시작했다.
‘별장 관리인의 아내조차 내가 좋은 곳에 시집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난 이렇게 평생을 살아야 한단 말이야……?’
* * *
금세 정오가 되었고 매화림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상이 차려졌다.
활짝 핀 매화는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또 어젯밤에 내린 가랑눈을 맞아 나뭇가지 끝에 얼음과 서리가 얇게 붙어 있으니, 꼭 새하얀 옷을 입은 것처럼 투명하게 반짝이는 모습이 몹시도 아름다웠다.
호위병들은 이미 와 있었지만, 어제처럼 방자하게 굴지 않고 전부 탁자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일부 대담한 이들은 어제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책잡힐 만한 말도 하지 않았다고 자신했다.
별장 관리인과 그의 아내는 이미 술과 음식을 내왔고 빈자리로 걸어가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살피던 호위병들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물론 감히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못했고 그저 전에 병영에서 있었던 우스운 일들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사람들이 즐겁게 웃고 떠들면서 분위기도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건배!”
한 호위병이 하하 웃으며 술을 따라 부었다.
“명절을 지낸 후에는 어디로 갈지 모르니 오늘은 맘껏 마십시다.”
사람들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고 중간에 앉은 평해는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그는 소전과 사이가 제일 좋아 방에서 함께 엽연채의 험담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니 소전이 붙잡혔을 때 소전이 그 이야기를 털어놓을까 봐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몰랐다.
다행히도 소전은 입이 바로 틀어막혔고 또 혀까지 뽑혔다. 안전해졌다고 생각한 평해는 그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지금 사람들 모두 어제 일은 언급하지 않고 서남과 응성이 어떻다는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불편한 화제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평해는 점점 더 마음이 놓였다.
‘어제 일은 이대로 잊힐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고 앞에 마련된 자리를 힐끗 쳐다봤다. 노교아가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후야와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이때, 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더니 잇달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주운환이 엽연채의 손을 잡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주운환은 담비 털로 만든 검은색 외투를 입고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있었다. 그 차림에 그의 산뜻하면서도 화려한 외모가 한층 돋보이는 듯했다.
엽연채는 면과 모 등을 혼합하여 짠 진홍색 소매 없는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용모는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특히 투명한 두 눈동자는 물결이 출렁이며 연파煙波(연기나 안개가 자욱하게 낀 수면)가 끝없이 아득한 호수처럼 보였다.
손을 맞잡고 걸어오는 두 부부는 이렇듯 뛰어난 용모를 과시하며 찬란한 빛을 발했다. 평해 등은 이 더없이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보더니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들은 주운환이 비록 소전을 때려죽였지만 엽연채에게는 꽤 불만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부부가 이리 사이좋은 모습으로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다만 평해는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내 참지 못하고 그 역시 두 사람을 힐끗힐끗 살폈다.
‘후야께서 일부러 다정한 척하시는 거 아냐? 어제 소전이 후야의 체면을 깎았으니 다시 매화연梅花宴을 열어 부부가 화목한 모습을 보여 주며 체면을 회복하시려는 거지.’
노교아도 부부를 쳐다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마음속에서 온갖 감정이 뒤섞여 스스로도 어떤 감정을 느끼는 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엽연채와 주운환은 상석으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고 두 사람 뒤를 따라오던 엽영교와 제민 등도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후야와 마님을 뵈옵니다.”
양쪽으로 서 있는 사람들이 전부 고개를 숙이며 읍하고 예를 올렸다.
주운환은 수묵화로 그린 것 같은 눈으로 아래를 쓱 훑어보더니 붉은 입술을 위로 당기며 말했다.
“일어나거라. 자리에 앉거라!”
“감사합니다. 후야.”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앉았다. 다들 자로 잰 듯이 똑같이 움직였고 불필요한 행동은 감히 하지 않았다.
주운환은 가볍게 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운을 뗐다.
“어제 좀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 우리의 매화연을 망쳤는데, 오늘 이어서 할 것이니 다들 사양하지 말거라. 자, 술을 내오거라.”
뒤에 서 있던 여양이 얼른 커다란 술독을 가져오더니 사람들의 사발에 하나하나 술을 따라 주었다.
주운환도 자신의 사발에 술을 따르더니 사발을 들고는 아래를 향해 내밀었다.
“건배!”
“좋습니다! 건배! 하하하!”
아래에 있는 우락부락한 사내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잇달아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퉷! 이게 뭐야!”
이 술은 단맛과 술 냄새가 나긴 했지만, 과일 향이 훨씬 강했다. 그래서 큰 사발로 술을 들이켜는 게 습관이 된 우락부락한 사내가 바로 술을 뱉었던 것이다.
그런데 술을 뱉은 뒤 그는 다시 표정이 굳어졌다. 이건 후야가 자신들에게 내린 술이었기 때문이다. 사십 대로 보이는 얼굴에 수염이 가득한 그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후야… 말씀하신 술은 어디 있습니까? 저희에게 설탕물을 마시라는 겁니까?”
주운환은 ‘픽’ 하고 웃더니 술을 홀짝거리며 말했다.
“이게 술이네! 장씨, 그리고 다들 잘 마셔 보게.”
장씨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한 모금 마셔 봤고 아래에 있는 호위병들도 그를 따라 홀짝였다.
장씨는 술을 조금 맛보더니 여전히 미간을 찡그린 채로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탕물이 아닙니까.”
병사들 중 일부는 과일 향에 섞여 있는 술맛을 조금 느꼈고, 개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후야… 이거 혹시 과일주입니까?”
“뭐?”
장씨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주운환을 쳐다보며 말했다.
“후야, 여기 있는 형제들은 나리와 함께 생사를 넘나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저희에게 과일주를 주시는 겁니까? 이건 여인들이나 마시는 거죠!”
“맞습니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다들 시끄럽게 떠들어대더니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후야, 이건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저희는 여인네가 아니에요.”
“다들 잠자코 마시거라!”
주운환은 술 사발을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더니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한 마디 했다.
“내 부인은 지금 홑몸이 아니라 술 냄새를 맡지 못한다!”
장씨 등은 모두 몸이 경직됐다. 안주인이 회임을 했기에 자신들이 꼼짝없이 과일주를 마셔야 된다는 이야기 아닌가.
보다 못한 여한이 나섰다.
“그냥 드세요. 여러분이 과일주를 마실 수 있는 것도 제가 노력한 덕분이에요! 아니었다면 다들 정말로 설탕물을 마셔야 했을 거예요.”
장씨 등은 여한을 쳐다보며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형님,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거예요?”
“그럼 안 하려고?”
여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재촉했다.
“마셔요! 어서들 술잔을 비우라고요!”
장씨 등은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술 마실 생각에 잔뜩 신이 나 있었는데 후야가 이런 과일주나 먹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물론 그들도 설탕물은 마셨다. 그런데 이 과일주는 설탕물도 아니고 술도 아닌 것이, 독한 술을 마시는 데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음료였다.
더욱이 탁자 위엔 방금 전 별장 관리인이 그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독한 술이 올려져 있었다. 그들은 술이 너무 마시고 싶었지만, 고개를 들어 보니 주운환은 엽연채에게 다과를 하나 집어 주며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장씨 등은 온몸에 한기가 들더니 감히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머금고 조용히 과일주를 마셨다.
그렇다. 안주인이 회임을 했으니 어쩌겠는가. 자신들에게는 과일주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이제야 그들은 주운환이 체면을 회복하기 위해 엽연채와 화해한 척을 한 게 아니라 정말로 화해를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화해를 넘어서서 그녀를 아낌없이 총애하고 있었다. 그러니 누구도 감히 엽연채를 얕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과일주라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게다가 독한 술이 떡하니 옆에 자리하고 있기까지 했으니, 이게 고문이 아니면 또 뭐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