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3화
“참, 집으로 돌아가면 나한테 이 일을 알릴 생각이었습니까?”
주운환이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내가 첩실을 들인다 하면 부인은 어떻게 할 생각이었습니까?”
엽연채는 그를 쏘아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이를 데리고 떠날 생각이었어요.”
그 말에 주운환의 수려한 얼굴이 굳었다. 저절로 그녀가 회임을 했다는 사실을 자신이 처음 알게 된 그날이 떠올랐다. 당시 그녀는 그가 배를 만지는 것조차 거부하며 아이는 자신의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거기에 이런 뜻이 담겨 있었을 줄이야.
“내가 아이를 빼앗아 갈까 봐 걱정했습니까?”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주운환에게 터놓고 이야기를 하지 않은 데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먼저 그의 일에 지장을 줄까 봐 걱정이 되었고 또한 그녀 스스로도 그에게 미련이 남아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그가 아이를 빼앗아 갈까 봐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거사가 성사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자신도 공로를 인정받을 테니 아이를 데리고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전 부인에게서 아이를 빼앗지 않을 겁니다.”
주운환은 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목덜미에 묻고 이렇게 속삭였다.
“우리 함께 키웁시다. 우린 함께 잘 살 겁니다.”
엽연채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배고프지 않습니까?”
“배고파요.”
“그럼 뭐라도 좀 먹읍시다.”
주운환이 밖을 향해 외쳤다.
“여봐라.”
문밖에 있던 혜연과 추길은 깜짝 놀랐다.
그동안 두 사람은 줄곧 이곳에 서 있었고 추길은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부부가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애가 타들어 갔다. 말다툼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시끄러운 소리는 일절 들려오지 않았다.
추길은 주운환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노교아가 진서후부에 온 뒤로 엽연채는 점점 더 우울해했다. 노교아가 첩실이 되려고 진서후부를 찾아온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아까 별장에 오자마자 방에서 부부는 말다툼까지 벌였는데, 추길은 그 이유가 분명 노교아이리라고 생각했다.
또 방금 전에 소전이 기를 쓰고 엽연채를 궁지로 몰지 않았는가. 노교아가 첩실이 될 수 있도록 그녀를 도왔고 엽연채가 부덕이 부족하다는 사실도 대놓고 지적했다.
주운환은 상황을 알게 됐으니 당연히 소전의 말에 따라 엽연채가 어질지 못하고 부녀자의 미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훈계해야 옳은 건데, 뜻밖에도 그는 엽연채를 위해 나섰고 도리어 소전을 때려죽였다. 추길은 정말이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설마 나리께서는 소전의 말에 동의하시지 않는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사내라면 다들 엽연채의 이런 옹졸하고 포용력 없는 태도를 응징하려고 할 거야. 그런데 어째서……. 아, 알겠다. 마님이 아무리 부덕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해도 어쨌든 아내이니 일개 병사나 수하가 욕을 하게 놔둘 수는 없으셨던 거지! 나리의 체면을 깎는 일이니 그렇게 화를 내셨던 거야.
그래, 그게 분명해! 집안의 허물은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거라는 말도 있잖아! 나리도 다른 사람들이 자기 아내가 이렇게 제멋대로란 걸 알게 되는 게 부끄러우신 거야. 그래서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소전에게 화풀이를 하신 거지. 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마님이 노교아를 첩실로 들이지 않았다며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을 거야. 이제 한숨 돌렸으니 마님을 손보려고 하겠지.’
추길은 끊임없이 자기 좋을 대로 추측을 하며, 목을 쭉 빼고 안에서 말다툼 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추길이 고대했던 대판 싸우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추길이 실망하려는 찰나, 갑자기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엽연채가 내는 소리였다.
추길은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어라……? 왜 우는 거지? 나리께서 마님에게 욕하시지는 않은 눈치인데? 아, 조곤조곤 가르치셨을까? 그래, 나리가 아무리 군자셔도 마님의 행실은 참을 수 없으셨을 거야. 그래서 본인이 직접 첩을 들이겠다고 하셨을까? 그럼 누굴? 노교아? 그럼 마님은 분명 화가 나 미쳐 버릴 거야! 자신을 위해 총애를 붙들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끼시겠지.’
추길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고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봐라!”
이때, 방 안에서 주운환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멍해졌던 혜연이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땐 흥분한 추길이 이미 앞으로 나간 뒤였다.
“예!”
추길은 대답을 하며 문을 열어젖혔고 안으로 들어가 서차간을 돌며 말했다.
“마님, 어째서 울고 계시는…….”
그리 말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는 얼굴이 경직되더니 몸도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추길을 따라 들어오던 혜연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보니 서차간의 팔보유리이화탑八寶琉璃梨花榻에 주운환이 늠름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고 엽연채는 그의 품에 비스듬히 기대어 매화수정고를 베어 물고 있었다.
다정한 모습으로 함께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 추길은 메스꺼운 기분이 들면서 가슴속에서 질투심이 불타올랐다.
“저… 마님, 시장하세요?”
반면, 이렇게 묻는 혜연은 가슴이 벅차올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밖에서 엽연채의 작은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때문에 걱정스러웠는데, 뜻밖에도 이 젊은 부부는 점점 더 격렬하게 싸우기는커녕 화해한 것처럼 보였다.
“응.”
“그럼 바로 가서 준비하겠습니다.”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자 혜연은 미소를 짓더니 추길을 쳐다봤다.
“어서 가자. 멀거니 서서 뭐 하는 거야?”
추길은 속이 편치 않았으나, 그저 입술을 깨문 채 돌아서서 나갈 수밖에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친밀하게 붙어 있는 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더욱더 괴로워지니 당연했다. 추길은 눈물을 머금고 자리를 떴다.
한편, 별장 관리인은 이미 식사를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혜연과 추길은 그 음식들을 부지런히 옮겼고 잠시 후 탁자 위는 음식으로 가득 찼다.
별장 관리인은 세심한 사람이라 준비한 음식은 전부 임신부들이 즐겨 먹는 것들이었다.
엽연채는 임신한 후로 계속 우울해했고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일이 있으니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마음속 응어리가 풀어지니 그녀는 갑자기 입맛이 확 돌아 모든 음식이 달고 맛있게 느껴졌다.
옆에 앉아 있는 주운환은 그녀가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먼저 그녀에게 새우를 까 줬고 또 생선 가시도 발라 줬다. 식후에 먹는 사과 또한 뜨거운 물에 담가 따뜻하게 만들었다.
추길은 도저히 그 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어 핑계를 대고 문밖으로 나갔고, 낭하를 걸으며 몹시 침울해했다.
한쪽에 서서 시중을 들고 있는 혜연은 금슬 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이때,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양이었다.
“나리… 소전의 숨이 끊겼습니다.”
그 말을 들은 주운환은 온화한 눈빛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냉담한 목소리로 한마디만 했다.
“처리하거라.”
“예.”
여양은 대답을 하고선 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주운환은 여양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자신의 수하들을 생각했다.
수하들은 자신이 까다롭게 고른 자들로, 하나같이 용맹해서 집으로 데려온 이들이었다. 하나 용맹한 것과 별개로 생각이 글러 먹었다면 시간을 들여서라도 뜯어고쳐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쓸 만한 자들은 남겨 두고 쓸모없는 자들은 일찌감치 내치면 된다.
혜연은 여양이 나가는 모습을 보더니 자신도 밖으로 향했다. 그녀는 엽연채와 주운환이 화해한 소식을 엽영교와 제민에게 알려 그들을 안심시켰다.
한편, 여양은 밖에서 소전의 시체를 처리했는데 척박한 땅을 찾아 그를 묻어 주는 게 다였다.
소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곳에 놀러 온 호위병들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겁을 먹은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처소에 꼭꼭 숨어 밖으로 나갈 엄두도 못 내며 말조차 주고받지 못했다.
이 모든 게 소전의 세 치 혀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닌가.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이런 상황에서 누구도 감히 이야기를 나누거나 대책을 논할 수 없었다.
소전의 말에 맞장구를 쳤던 것을 대단히 후회할 따름이었다. 물론 변명할 거리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아깐 다들 술을 많이 마셔 취기가 오른 상태였고 게다가 엽연채의 행동은 사내들이 보기에 확실히 옹졸하고 부덕이 부족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어쨌든 지금 소전이 매를 맞아 죽었으니, 전부 입을 꾹 다물고 감히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설령 엽연채가 어질지 않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후야의 집안일이었다. 그러니 자신들이 감 놔라 배 놔라 할 주제가 되겠는가?
다만, 주운환은 자신의 아내가 소전에게 핍박당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언짢았겠지만, 엽연채가 현명하게 처신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호위병들은 벌벌 떨면서도 추길과 마찬가지로 주운환 부부가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을 벌일 것이겠거니 추측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부부 사이의 일이었다. 누구 하나 간섭하거나 참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때, 별장 관리인이 갑자기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 오늘 갑자기 눈이 내려서 급히 자리를 정리하는 바람에 흥이 확 깨졌죠. 그래서 후야께서 내일 이어서 연회를 열자고 하셨습니다. 하하하.”
자리에 있던 호위병들은 소전의 말로를 떠올리더니 다들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또 하자고?’
* * *
밤이 되자 또 하늘에서 가랑눈이 내렸다. 그런데 이튿날 이른 아침엔 날이 맑게 개면서 본래도 곱고 아름다운 매화 위에 새하얀 눈이 한 층 덮여 있을 뿐이었다.
붉은 칠을 한 문양이 조각된 난간 너머, 본채의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화장火墻은 방 안을 따뜻하고 포근하게 만들었고, 벽 모퉁이의 보섬연로寶蟾煙爐엔 마른 매화가 타고 있어, 희미한 연기가 솟아오르자 상쾌한 꽃향내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검은 칠을 한 가자상架子床 위, 엽연채는 주운환의 품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주운환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그녀가 자신을 멀리하고 싸늘하게 대했던 걸 떠올린 주운환은 마침내 먹구름이 걷히고 밝은 태양이 빛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엽연채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시간은 이미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되어 있었다.
부부는 느지막이 단장을 마친 후 응접실로 향했다.
“부인, 잠시 후에 매화림에 가서 고기를 구워 먹읍시다.”
주운환이 미소를 지으며 이리 권했다. 엽연채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어 붉은 입술을 쓱 올리며 응했다.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