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1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꼿꼿이 서서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일에 대해 감히 여러 말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진서후였다.
소전 한 명을 죽이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싹 다 죽인다고 해도, 관아에서는 못 본 척할 것이며 오히려 그를 도와 이 사건을 없던 일로 만들 것이다. 이게 바로 권세였다.
소전은 사람들에게 끌려갔는데 그리 먼 곳으로 끌려가지는 않았다. 그는 매화림 뒤쪽으로 끌려갔고 이어 몰매를 놓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희들, 평소에도 감히 이렇게 내 부인을 핍박했느냐?”
주운환은 그리 추궁하며 한 걸음씩 사람들에게로 걸어오더니 엽연채를 향해 걸어갔다. 걸음을 떼는데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마저 흐릿했다.
‘설마 계속 이렇게 억울한 일을 겪어 왔다는 거야? 이런 대접을 받아 왔다는 말이야? 어쩐지. 그래서 부인이 그렇게 나를 멀리하고 쌀쌀맞게 행동했던 거구나. 어쩐지…….’
주운환은 이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듯이 아팠다.
평해는 깜짝 놀라 온몸을 미친 듯이 떨더니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아, 아닙니다… 후야……. 소전, 소전이 이놈이 주둥이를 함부로 놀린 겁니다. 저희도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맞습니다!”
뒤에 있던 사람들도 얼른 맞장구를 쳤다. 주운환의 살기를 느끼고 또 소전의 말로를 본 그들은 하나같이 겁을 집어먹고 몸을 부들댔다.
“우우웁!”
한편, 뒤쪽에서 소전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분노와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째서……! 저런 여인은 죽어 마땅합니다! 제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악! 우웁!”
주운환은 방금 전에 그의 혀를 자르라고 명했다. 그러니 지금 누군가가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헝겊을 치우더니 그의 혀를 잘라 버린 게 분명했다.
엽영교는 비명을 듣고 잔뜩 겁에 질려 제민의 품으로 몸을 웅크렸다.
이어 퍽 하고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전이 매질을 당하는 소리였다.
주운환을 곁에서 모시는 여양과 여한을 포함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엽연채에게 불경을 저지르면 저런 꼴이 되는 것이다.
엽연채에게 다가선 주운환은 고개를 숙였다. 곱고 아리따운 그녀의 작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입술은 얼마나 세게 짓깨물었는지 처연한 핏빛이 스며 나오는 것 같았다.
엽연채는 뜻밖에도 자신을 보호해 주는 주운환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요동쳤지만, 그동안 겪었던 설움이 한꺼번에 몰려들자 연신 눈물만 뚝뚝 떨구었다.
주운환은 손을 뻗어 그녀의 뜨거운 눈물을 닦아 줬고, 자신의 품 안으로 그녀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엽연채는 입술을 물며 그를 힘껏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이에 엽연채는 고개를 틀어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우린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주운환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더니 그녀를 끌고 가려고 했으나 엽연채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운환은 화가 나 전과 마찬가지로 아예 그녀를 확 안아 들었다.
“갑시다!”
역시 잔뜩 화가 치민 엽연채는 또 그를 밀쳤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엽연채는 할 수 없이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운환은 그렇게 그녀를 안고 사람들을 지나쳐 갔고 담비의 털로 만든 검은색 소매 없는 외투가 바람에 휘날리며 화려한 색깔을 뽐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눈송이 하나가 떨어졌다. 이어 하나가 더 떨어지더니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눈에 엽영교가 중앙으로 걸어가더니 미소를 지으며 아랫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눈이 내리니… 우리도 자리를 뜹시다. 젖기 전에 피하죠! 관리인 자네는 잠시 후에 사람들을 위해 방 안에 상을 차려 주게나.”
“예.”
관리인과 그의 아내는 있는 대로 겁을 먹은지라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다른 사람들도 공포에 질려 있긴 매한가지라 얼른 대답을 하고서는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큰언니는 어떻게 될까요?”
엽미채는 몸을 떨며 엽영교 곁으로 다가갔다.
“아마… 별일 없을 거야.”
“저희, 저희 어서 가요. 가서 언니를 도와야죠!”
엽영교의 말에도 엽미채는 눈시울을 붉히며 이리 말했다. 그녀는 너무나도 두려웠고 게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소전의 다 죽어 가는 비명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러자.”
“부인…….”
엽영교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진지항이 그녀를 붙잡았다.
“부부끼리… 제대로 대화를 나눠야 돼요.”
“하지만 지금은 연채가 좀 이상하단 말이에요.”
엽영교는 인상을 쓰더니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
“이게 다 나쁜 사내들 때문이에요. 좋은 사내는 하나도 없어요.”
진지항은 표정이 굳어졌다. 왜 불똥이 애꿎은 자신에게 튄단 말인가?
“가자.”
엽영교는 그리 말하며 엽미채를 잡아당겼다.
방금 전 소전이 했던 말을 주운환이 얼마나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소전이 했던 말은 엽연채의 도리에 맞지 않는 속내를 드러내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주운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가 없었다. 첩실을 들이고 말고 하는 일은 어찌 됐든 분명하게 논의해야 하는 사항이었으니까.
“그러지 말고 각자 처소로 돌아가는 편이 좋겠어. 네 부군 말이 맞아. 둘만 있을 시간을 주고 자기들끼리 먼저 이야기를 나눠 보게 해야 돼. 만약 연채가 정말로 불리한 상황에 처하면 그때 우리가 나서 보자.”
이때 제민이 나서서 엽영교를 말렸다. 엽영교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 입을 살짝 오므렸다.
“맞아요!”
진지항이 얼른 앞으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운환이는 사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게다가… 지금 부인 배를 좀 봐요. 안 그래도 지쳐서 얼굴도 하얗게 질렸잖아요. 분명 배가 엄청 고픈 거예요. 일단은 어서 방으로 돌아가 뭐 좀 먹는 편이 좋겠어요. 부인 몸은 안 챙겨도 아이는 챙겨야 할 거 아니에요.”
마지막 군말에 엽영교는 기분이 언짢아져 그를 쏘아보았다.
“아이만 엄청 아끼네요?”
“그, 그런 말이 아닙니다.”
진지항은 정말이지 입이 만 개여도 자신의 뜻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그래도 말해야 했다.
“난 그저 부인이 내 충고를 안 들을까 봐……. 부인에게 아이를 아끼라고 말하는 거예요! 난… 당연히 부인을 아주 아끼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 말하며 그녀를 꼭 껴안았다.
“됐으니 두 사람은 어서 가 봐요!”
난데없이 사랑싸움이 벌어지자 제민이 두 사람을 흘겨봤고, 두 젊은 부부는 법석을 떨며 그 자리를 떠났다.
방금 전까지 떠들썩하기 이를 데 없던 매화림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오로지 소전이 매를 맞으며 내는 울부짖음만 남아 있었다.
한편, 노교아는 여전히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은 매화림의 공터를 둘러보다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전 주운환이 엽연채를 보호하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그녀의 수수한 얼굴이 한층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가 그곳에 얼마나 오래 서 있었고 어디까지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소전의 말 속에 담긴 뜻은 이해했을 것이다.
‘지금 그분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 * *
주운환은 엽연채를 안고 매화림을 떠났고 혜연과 추길은 서둘러 그들의 뒤를 따랐다.
중앙 정원으로 들어선 주운환은 그녀를 안은 채 곧장 본채로 들어갔고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발로 걷어찬 다음 엽연채를 연탑軟榻 위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엽연채는 그의 따뜻한 품에서 떨어지자 온몸에서 한기가 느껴져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온통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주운환은 그런 엽연채를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쥐어짜이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만 참지 못하고 그녀를 자신의 품에 확 끌어안고는 작은 목소리로 달랬다.
“부인… 미안합니다. 내가 아랫사람들을 잘 단속하지 못해 부인이 설움을 겪게 했군요. 하지만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것들이 부인을 괴롭히게 놔둔 겁니까.”
“전…….”
엽연채는 그의 어깨 우묵한 곳에 턱을 대고 그를 꽉 끌어안았다가 다시 그를 놓으며 말했다.
“준비하고 있었어요……. 부군이 그자들의 편을 들까 봐 두려웠어요. 전 소전이나 노교아 같은 자들은 두렵지 않아요. 제가 두려웠던 건 다른 사람들이 주는 상처가 아니라… 바로 부군의 마음이었어요.”
주운환은 깜짝 놀랐고, 불현듯 소전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아까 자신은 입구에 서서 소전이 노교아를 칭찬하고 엽연채를 깎아내리며 무슨 공주가 아주 어질고 현명하다며 은근히 엽연채를 헐뜯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곳에는 그녀를 돕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 상상도 못 했던 광경에 자신은 얼이 빠져 있었다. 그녀가 지금껏 이렇게 큰 압박을 받고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소전은 제게 불경을 저질렀으니 죽어 마땅해요. 하지만 그자가 한 말 중 한 가지는 옳아요.”
엽연채는 주운환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전 덕이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좋은 여인이 아니에요. 부군의 부인으로서 제대로 내조하지 못했어요. 부군을 위해 집안을 다스리고 첩실을 들이지도 않았어요. 부군의 생명의 은인에게도 아직 제대로 된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았어요. 정말 미안해요!”
주운환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걸 알기에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심중을 마저 들었다.
“양왕 전하와 연락이 끊겨 지금 부군이 골머리를 썩고 있잖아요. 부군의 마음을 더 이상 어지럽히면 안 되는데……. 게다가 저도 두려웠어요.”
“뭐가 두려웠습니까?”
주운환이 그녀를 쳐다보니 곱고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 망설임과 불안함이 묻어 있었다.
“전… 더 이상 부군과 잘 지낼 수 없다고 말하는 게 두려웠어요.”
엽연채는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랬다. 자신은 그를 좋아한다.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정말 미치도록 그를 사랑한다.
그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것도 이유이기는 하나 실은 그에게 미련이 남은 게 더 컸다. 속에 품고 있는 말을 다 꺼내고 나면 서로 껴안을 때조차 가식적으로 느껴지고 고통스러울 것이며 그의 체온도 차갑게 변할 것이다.
“부인.”
주운환은 손을 뻗어 그녀의 조그만 얼굴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엽연채는 그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며 흉중胸中을 쏟아 냈다.
“부군… 전 부군을 정말 좋아해요. 그러니 다른 여인을 안 품으면 안 돼요? 다른 여인과 가깝게 안 지내면 안 돼요? 부군 곁에 저만 있으면 안 돼요? 첩실을 안 들이면 안 돼요? 만약…….”
“무슨 첩실을 들인다는 겁니까? 전 부인만 있으면 됩니다!”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운환의 노여운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