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7화
이 매화원은 인공적으로 매화나무를 심은 곳이 아니라 매화나무들이 자연적으로 자라나 매화림梅花林을 이룬 곳이었다. 자연스럽게 형성됐고 이후에도 사람의 손길을 많이 타지 않았기 때문에 산야山野 특유의 독특한 정취가 묻어났다.
십여 년 전, 궁에서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해 이곳에 별장을 지으며 이 매화림을 둘러막았다. 하지만 매화림을 인공적으로 관리하게 되면 본연의 정취가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에 상부에선 매화림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여 이 매화림은 별장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묘한 운치가 넘쳐흘렀다. 고관대작의 저택이나 관부官府의 전담자가 관리하는 정원처럼 꽃이 활짝 피어 있지는 않지만 대신 고고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매화림으로 들어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탄사를 흘렸다. 소전을 비롯한 우락부락한 사내들마저 감탄을 금치 못하는 절경이 펼쳐졌다.
별장 관리인이 미소를 지으며 권했다.
“이곳이 풍경이 가장 아름다우니 다들 여기서 식사를 하시면 어떨까요!”
“좋아요!”
여양과 여한은 기뻐하며 크게 소리쳤다.
여양이 말했다.
“우리도 오늘은 고상한 척 한번 해 봅시다. 잠시 후에 매화주도 같이 마시죠!”
“저, 그게…….”
별장 관리인은 표정이 굳어졌다.
“갑자기 오신다고 하여… 매화주를 준비하지 못했어요.”
“그렇게 번거롭게 준비할 필요 없어요.”
소전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냥 백주 두 주전자만 가져오면 돼요. 그런 다음 그 위에 매화를 올리면 매화주가 되는 거죠.”
별장 관리인은 안도했는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되겠네요.”
그러고는 사람을 시켜 술을 가져오게 했고 별장의 여종들에게는 매화림의 빈터에 탁자를 가져다 놓으라고 했다.
탁자는 궁에서 연회석을 배치할 때와 흡사하게 놓여졌다.
상석에는 기다란 녹나무 탁자가, 하좌의 양쪽으로는 탁자들이 놓였으며 중앙의 비어 있는 공간에는 열로 익히는 커다란 조리기구가 놓였다. 또 한쪽에는 여러 가지 구운 고기가 준비됐는데, 잠시 후에 별장 관리인이 익혀서 나눠 줄 요량이었다.
식사 준비를 마친 별장 관리인은 사람들을 모두 불러 자리에 앉게 했다.
엽영교와 제민 등은 오른쪽 하좌로, 노교아와 엽미채는 왼쪽 하좌로 자리를 안내받았다. 그리고 아랫자리에는 소전과 평해 등 거친 사내들이 자리했다. 그들은 탁자 앞에 앉아 하하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렇게 고상하고 우아한 자리는 처음이네. 들어 보니 궁에서 연회를 베풀 때 이렇게 앉는다고 하던데.”
이리 말하는 평해는 소전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런 것 같아요.”
소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중앙에선 무희도 춤을 춘다고 하던데요! 그런데 우리에겐 고기 굽는 모습을 보여 주는 별장 관리인뿐이네요! 하하! 참, 나리께서는 왜 아직도 안 오시죠?”
그는 그리 말하며 두 눈을 대굴대굴 굴렸다. 그는 이미 주운환뿐만 아니라 엽연채도 이 자리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늘은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날이었다. 아니, 오늘이 아니라 지금 당장 반드시 해치워야 할 중요한 일이 있기에 그는 엽연채와 주운환에게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문으로 들어선 후로 엽연채와 주운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소전은 그들을 찾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바로 관리인에게 행방을 물어봤다간 상전에게 함부로 간섭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꾹 참고 있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 둘러앉았는데 부부 두 사람만 자리에 없으니, 이제서야 마음을 놓고 주운환 부부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었다.
“하하, 제가 가서 보고 올게요.”
별장 관리인은 그리 대꾸하고는 매화원을 나섰다.
그가 본채 쪽 정원에 도착하자 두 여종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 사람은 늘씬하고 아래턱이 뾰족한, 아주 귀엽고 아리따운 외모를 갖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단정하고 부드러운 외모를 갖고 있었다.
별장 관리인은 그들이 엽연채를 곁에서 모시는 신변 여종들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는 앞으로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리와 마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새파란 낯빛의 추길은 표정이 살짝 굳어지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흐렸다.
“아, 그게… 방 안에…….”
“옷을 갈아입고 계세요!”
혜연이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금방 끝나요.”
별장 관리인은 어리둥절해하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매화원 쪽에 가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겠네.”
별장 관리인은 그리 말하고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추길은 허허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별장까지 왔는데 마님과 나리는 방 안에서 뭘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네.”
그녀는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멀리 놀러 왔으면 당연히 밖에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거 아닌가? 거기다 다들 모여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잖은가.
‘뭐 그건 그렇다 쳐도, 이곳에 오자마자 방 안에 틀어박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엽연채는 아이까지 가진 몸이었다. 추길은 생각하면 할수록 괴로운 기분이 들었지만 직접적인 말을 꺼내기가 곤란해 입을 오므리고 있었다.
혜연도 이건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어 초조한 마음에 조그만 얼굴이 살짝 하얗게 변했다.
지금 엽연채는 아이를 뱄는데도 주운환에게 첩실을 붙여 주지 않아 사람들이 옹졸하고 포용력이 부족한 여인이라며 비난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누군가는 임신을 했는데도 사내에게 찰싹 들러붙어 있는다며 천박한 여인이라고도 욕했다.
걱정을 주체하지 못한 혜연이 결국 낭하로 걸어가 문을 두들겼다.
“마님?”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엽연채와 주운환은 침상이 아닌 탁자에 앉아 있었고, 그 위에는 간식거리가 든 상자들이 한가득했다.
엽연채는 곁눈질로 주운환을 힐끗 쳐다봤다.
“혜연이가 밖에서 부르고 있어요.”
“알겠으니 이거 좀 먹어 보십시오.”
주운환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더니 빨간색 매화고를 하나 집어 들어 그녀의 입에 대 줬다. 엽연채는 그가 화가 난 걸 알았지만, 마차 안에서 엽영교와 옥패가 했던 말이 떠오르고 또 혜연이 밖에서 나오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들리자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령 가장 친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엽연채는 마지못해 주운환이 집어 준 떡을 들더니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밖으로 나가 대문을 확 열어젖혔다.
주운환은 멍해졌다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이어 서늘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부인!”
그러나 엽연채는 이미 밖으로 나간 뒤였다. 주운환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녀가 한 걸음씩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역광을 받은 그녀의 뒷모습은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바로 그때, 엽연채가 몸을 돌렸다. 맑고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는 단호함과 비통함이 묻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부군, 요즘 저 정말 힘들었어요. 원래는 거사가 정해질 때까지… 참을 생각이었는데 정말 너무 괴로워요. 집으로 돌아가면 부군에게 말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꼭 들어줘야 해요. 그럼… 적어도 우린 잘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엽연채가 계단을 내려오자 혜연과 추길이 얼른 그녀에게 다가갔다. 추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추궁하듯 말을 붙였다.
“마님, 안에서 뭐 하셨어요? 별장 관리인도 이곳에 와서 마님을 찾았어요. 뒤쪽에 있는 매화림에 와서 식사하시라고 말이죠!”
엽연채의 옷매무새가 깔끔하고 손을 댄 흔적도 보이지 않자 추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혜연은 추길을 쓱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주운환을 찾았다.
“나리께서는요?”
묻자마자 싸늘한 기운이 느껴져 보니 언제 왔는지 주운환이 계단 위에 서 있었다. 그는 냉담한 얼굴로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눈썹 언저리에는 마치 얼음과 서리가 내려앉은 듯한 느낌마저 감돌았다.
혜연은 깜짝 놀랐다. 가만 보니 엽연채의 표정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에 그녀는 가슴이 철렁했고 부부가 싸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
반면, 추길은 상황을 보더니 속으로 기뻐했다.
‘나리와 마님이 싸운 거야? 설마 그 노 낭자 때문에?’
전에 이 부부의 사이는 바늘 하나 뚫고 들어갈 틈조차 없는 것처럼 끈끈했다. 초조하고 불안한 매일이었는데, 이제 마침내 빛이 보이는 걸까?
“어서 가자꾸나.”
엽연채는 무덤덤한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뒤에 있는 매화림으로 오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녀는 그리 말하며 발걸음을 옮겼고 혜연과 추길은 얼른 그 뒤를 따라갔다.
계단에 선 주운환은 멍한 표정을 지었고 그가 입은 검은색 외투가 차가운 바람에 휘날렸다.
요즘 엽연채는 자신에게 거리를 두며 쌀쌀맞게 행동했는데, 지금 또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를 꺼냈다. 열심히 돌이켜 봤지만 자신은 최근에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주운환은 조금 화가 났다. 하지만 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더 멀어지다가 모퉁이로 사라지자 가슴이 순간 쥐어짜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이어 공허함이 느껴졌다. 심지어 숨이 탁 막히는 듯했다. 그는 홀린 듯 계단을 내려가 그녀가 떠난 방향을 따라 걸어갔다.
엽연채는 혜연과 함께 뒤뜰로 걸어갔고 눈을 들어 바라보니 울창한 매화림이 보였다. 우아함 그 자체인 새하얀 매화와 노을처럼 붉은빛을 띠는 매화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구름과 바다처럼 끊임없이 펼쳐져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틀어 보니 엽영교와 소전 등이 매화나무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고 검무를 추며 재미나게 놀고 있었다.
원래는 식사부터 했어야 하는데, 엽연채와 주운환이 오지 않자 워낙에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소전과 평해 등의 호위무사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이들은 매화를 좀 꺾어 집에서 매화주를 담글 거라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 매화림에서 검무를 췄는데 흩날리는 매화 꽃잎과 어우러지니 고상하고 멋스러운 운치가 느껴졌다.
엽영교와 제민은 매화나무 아래서 매화 꽃잎 위에 맺힌 설수雪水를 모으고 있었다.
가장 먼저 엽연채를 발견한 엽영교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손에 들고 있던 백자병을 옥패에게 건네더니 엽연채에게 다가가 끌어당겼다.
“연채야, 왔구나. 방금 전에 조카사위랑 방에서 뭘 하고 있었어?”
그녀는 농담조로 말하며 싱글댔다. 부부가 찰싹 붙어 있다고 놀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엽연채는 오히려 표정이 굳어졌고 뒤에 있던 추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님과 나리께서 싸우신 것 같아요.”
“어떻게 된 거야?”
엽영교가 깜짝 놀라 묻자 엽연채는 고개를 돌려 추길을 쏘아봤다.
“우리가 언제 싸웠니?”
엽연채는 그리 말하고는 엽영교를 탁자 쪽으로 데려갔다.
“고모, 배고프니 어서 자리에 앉아요. 얼른 음식부터 먹자고요.”
“그래.”
엽영교는 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 모습을 보더니 그저 배를 받치고 엽연채와 함께 자리가 준비된 공터로 걸어갔다. 추길은 엽연채와 엽영교가 똑같이 자신을 상대하지 않자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