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6화
이때, 마차의 발이 걷히더니 엽연채가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엽영교는 깜짝 놀라 얼른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아당기면서 물었다.
“연채야?”
“네, 고모.”
엽연채는 제민 옆에 앉았고, 엽영교와 제민은 그녀가 자기들 마차에 타자 영문을 몰라 했다.
“연채야, 너 왜 여기로 온 거야? 네 부군과 함께 가는 거 아니었어?”
“고모도 부군과 함께 타고 가지 않잖아요!”
엽연채의 반박에 엽영교는 쳇 하고 혀를 차더니 하나씩 짚으며 경우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 사람은 하루 종일 집에 있잖아. 우린 날마다 얼굴을 보니 이미 충분하단다. 너와 네 부군이 문제지! 응성으로 출정을 하더니 또 타지로 비적 떼를 잡으러 갔잖아. 한 해의 대부분을 밖에서 지냈어.
이제 모처럼 집으로 돌아왔고 머무른 지도 며칠 안 됐잖니. 젊은 부부가 이 귀한 시간을 놓치지 말고 함께 잘 보내야 하는 거 아니겠어?”
엽연채는 못 들은 척, 제민의 팔을 끌어안고 조그만 머리를 그녀의 목덜미에 기댈 뿐이었다. 그러자 엽영교는 이어서 타이르듯 말했다.
“우리 집 바보는 능력이 고작 그 정도니 집에서 고생하는 걸로 충분하지만, 네 부군은 문식으로는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리고 무예로는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잖니. 둘도 없는 인재니까 계속 도성에 머물러 있지는 못할 거야!
어쩌면 명절을 쇤 후에 다시 응성 쪽으로 보내질지도 모르지. 이번에는 상주하는 임무일 가능성이 클 거고. 그런데 넌 지금 회임을 한 상태니 부군을 따라가 곁에 있을 수가 없잖아.
그래서 네 부군이 혼자 가게 되면……. 네 부군은 사내이고 권세와 명예도 가졌고 얼굴까지 그렇게 생겼어. 게다가 이곳에서 멀기까지 하니…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 누가 알겠어.”
엽연채는 이 말을 듣더니 저도 모르게 몸이 뻣뻣하게 경직됐다. 어째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 이 이야기를 하는 걸까.
엽연채의 속내를 모르는 옥패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심란케 하는 데 일조했다.
“마님,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잖아요. 지금 부부 두 분이 함께 붙어 계신다고 해도 명절이 지난 후에는요? 또 어디로 파견되실지 모르잖아요. 사람들 모두 후야는 타고난 장수이니 수도에 머물러 있는 건 그야말로 큰 인재를 작은 일에 쓰는 거라고 해요. 진서후 대인은 대제의 변경을 단단히 지키셔야 한다고요.
아무튼 먼 길을 떠나셔야 하는데 곁에 항상 계실 수 없어요. 그러니 가급적 빨리 대인께 사람을 붙여 주셔야 해요. 대인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보살펴 드리면서 항상 집에 계시는 부인 이야기를 꺼내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게 할 사람요. 안 그러면 밖에서 웬 심술궂은 사람을 데리고 돌아오실지도 몰라요.”
엽영교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사내가 수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사는 것에 그녀도 반감을 가졌지만 이건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엽영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옥패 말이 맞아! 충성심이 강하고 널 도와 네 부군을 잘 살펴볼 자를 찾아야 돼. 여우 같은 것들이 네 부군을 꾀어낸 다음에 널 잊게 해서야 되겠니.”
엽연채는 아무 말 없이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꽉 움켜쥐었고, 제민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런 엽연채를 쳐다보며 충고했다.
“충성심이 강하고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야 돼.”
엽연채는 조그만 머리를 살짝 숙였다. 그녀는 그 누구도 찾고 싶지 않았지만, 그리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엽영교와 제민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는 이미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곧 진서후부 대문을 나섰다.
명절을 맞아 도성 안은 흥겹고 시끌벅적했다.
큰길은 사람들로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뤘다.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물건을 파는 소상인도 있고 아이를 어깨 위에 앉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세 식구가 행복하게 거리를 걷는 백성의 모습도 보였다. 또 찻집마다 사람들에게 겹겹이 에워싸인 설화자들이 올해 새로 나온 희극의 내용을 구성지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때, 후부의 대문이 활짝 열리더니 양쪽으로 늘어선 기마병들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 뒤로는 네 대의 크고 화려한 마차가 흔들거리며 이동했다. 주위의 백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곁눈질로 그 모습을 구경했다.
마차와 병사들이 인파를 뚫고 대략 이각쯤 이동해 마침내 성문 밖으로 나왔다. 겨울이라 교외 곳곳에 새하얀 눈이 가득했고 저 멀리 보이는 나무들은 잎이 전부 떨어져 있었다. 벌거숭이가 된 나뭇가지 끝에는 대신 적설이 소복이 쌓여 가지가 휘어 있었다.
엽연채가 마차의 발을 걷고 밖을 내다보니 풍경은 온통 차갑고 새하얀 눈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지난번 천산에 갈 때 봤던 풍경이 떠올랐다.
당시 이곳은 아름답고 화려한 가을 풍경을 뽐내고 있었고 곳곳에는 붉게 타오르는 듯한 단풍이 가득했다. 그때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아주 좋았었다. 반면 지금은 온통 새하얀 황무지처럼 보일 뿐이라 그녀의 마음도 함께 싸늘해질 뿐이었다.
반 시진이 더 흐르고 일행은 주운환의 별장에 도착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맑고 향긋한 매화꽃 향기가 날아와 순간 마음이 탁 트이며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마차에 탄 사람들과 병사들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즐겁게 웃었다.
소란에 엽연채가 마차에 달린 발을 들어 밖을 내다보니 커다란 별장 한 채가 눈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밖은 하얗게 칠해진 커다란 담이 둘러싸고 있었고, 높다란 담장 너머로 툭 튀어나온 처마와 검푸른 기와가 보였다. 또 높이 솟은 누각도 삐쭉 튀어나와 있으니 보나 마나 안은 꽤나 정교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을 게 분명했다.
주황색 대문이 활짝 열리자 마차와 병사들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더니 수화문에 멈춰 섰다. 마지막 마차 안에 앉아 있던 여종들이 밖으로 뛰어내리더니 조그만 걸상을 가져와 엽연채가 탄 마차 아래에 내려놓았다.
주운환은 얼른 엽연채 곁으로 다가와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도록 부축해 주려고 했는데, 엽연채가 그를 쏘아보더니 이렇게 핀잔했다.
“저희 어머니께서 전에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사람들 앞에서 찰싹 붙어 있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면박을 당한 주운환은 그저 엽연채가 작은 걸상을 밟고 혜연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부인, 헤헤.”
이때, 누군가의 실없는 웃음소리가 울려 펴졌다. 보니 진지항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엽영교를 안더니 그녀를 바닥에 안전하게 내려 줬다. 엽영교는 수줍어하며 그를 쓱 쳐다봤고 부부는 손을 맞잡고 한 걸음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걸어가면서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모습이 아주 다정해 보였다.
주운환은 다정하게 걸어가는 다른 부부의 모습을 쳐다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엽연채가 점점 더 자신을 멀리하며 차갑게 군다는 생각이 들어 주운환은 빠른 걸음으로 엽연채를 쫓아갔다.
엽연채는 혜연의 손을 잡고 정원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주운환이 걸어오더니 엽연채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깜짝 놀란 혜연은 얼른 엽연채의 손을 놓더니 몸을 굽히며 걸음을 늦췄다.
주운환은 엽연채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부인, 우리 우선 방으로 가서 식사 좀 하고 쉽시다.”
“네. 마침 고모와 민이, 미채도 배가 고프다고 하더라고요. 다 같이 식사부터 해요.”
엽연채가 말했다.
하지만 주운환은 엽연채와 둘이서만 있고 싶었다. 평소였다면 그도 시도 때도 없이 그녀와 붙어 있으려고 하지 않고 그녀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엽연채가 자신을 멀리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고 그리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고자 했다.
“아뇨, 전 부인과 둘이서만 먹고 싶습니다.”
주운환의 거부에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뜻을 거절하려는 찰나, 주운환이 갑자기 그녀의 조그만 얼굴을 감싸 쥐고 뜨거운 입맞춤을 해 왔다. 엽연채는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 강하게 힘을 줄 따름이었다.
엽연채는 발버둥을 치다가 끝내 포기하고 힘없이 그의 품에 기댔다. 주운환은 자신의 뜻에 따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그제야 그녀를 놓아줬고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엽연채와 엽영교 등 상전들은 이미 문안으로 들어갔지만 뒤에서 정리 중인 사람들은 여전히 수화문 근처에 있었다.
걸음이 느린 노교아도 아직 거기에 남아 있었다. 엽미채와 같은 마차를 타고 왔지만 그녀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득달같이 제민의 뒤를 쫓아간 후였다. 노교아는 어리둥절했지만 그녀를 따라가지는 않았다.
“낭자!”
그때, 누군가가 상쾌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노교아가 고개를 돌려 보니 소전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노교아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전 오라버니.”
소전은 생글생글 웃으며 반가운 티를 냈다.
“함께 재밌게 놀다 가요. 아, 그런데 왜 마님 일행과 함께 있지 않고요?”
노교아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전 마님 일행과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으니 그분들하고 별로 친하지도 않고 서로 공감대도 없으니까요.”
소전은 이 말을 듣더니 큰 소리로 침을 퉤 뱉었다.
‘공감대가 없기는 무슨. 분명 엽연채가 작정하고 따돌리려는 거겠지!’
소전은 혐오감이 들었고 엽연채가 점점 더 싫어졌다. 그는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낭자, 걱정 말아요. 우리 모두 낭자를 돕고 있어요!”
“그게…….”
노교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오라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말이냐고요?”
소전은 미소만 지을 뿐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아무튼 우리는 낭자가 이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걱정 말아요. 우린 모두 낭자의 편이니까.”
소전은 그리 말하고는 쏜살같이 뛰어갔다.
노교아는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그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이렇게 사람들은 모두 별장 안으로 들어왔고 별장 관리인은 이미 그들을 맞이하러 밖으로 나와 있었다.
관리인은 어제 상전들이 이곳에 놀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찌감치 명단을 작성해 그들이 묵을 방을 배정해 두었다.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오자 별장 관리인은 그들을 배정된 방으로 착착 안내했다. 모두 가져온 짐을 풀자 관리인은 이번에는 별장 뒤쪽에 딸린 매화원梅花園으로 그들을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