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85화 (585/858)

제585화

노교아의 말에 혜연은 표정이 어두워졌고 추길은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더니 저도 모르게 칭찬하는 얼굴로 노교아를 쳐다봤다.

제민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수주에 오갈 때 자신도 동행했다. 도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전 등이 노교아와 주운환이 살을 맞댔으니 그녀를 주운환의 첩실로 들어야 한다는 둥 농담을 했던 일도 당연히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노교아가 이곳에서 지내면 그동안 연채는 꺼림칙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을 거야.’

걱정하는 마음에 노교아에게 자신의 집에 와서 지내라고 했는데, 노교아는 고의로 그런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제안을 거절했다. 제민은 엽연채 편인 데다 원래부터 노교아에게 편견을 갖고 있었던 터라 노교아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제민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눈알을 굴리더니 노교아를 쳐다보며 이리 물었다.

“참, 낭자의 집안은 무슨 일을 해요?”

알면서 모르는 척 태연스레 묻자 노교아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희 아버지께서 의원이셨어요. 저도 어릴 때부터 아버지께 약리藥理를 배워 의술에 대해 조금 압니다.”

“오, 그랬군요.”

제민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에 혜연이가 낭자도 나처럼 농촌 출신이라고 하던데, 그럼 아버지는 농촌에서 의원으로 지내셨어요?”

노교아는 고개를 들어 제민을 쳐다봤다. 그녀는 제민이 자꾸만 출신을 거론하며 자신을 업신여기고 따돌리려 한다고 생각해 다시 고개를 숙이고 짧게 대꾸했다.

“네.”

“그럼 집안에 농지도 있나요? 갑자기 집을 떠나왔으니 농지가 황폐해질 것 같아서요.”

노교아는 미간을 더욱 심하게 찌푸렸고 굴욕감을 느꼈다. 지금 그녀 앞에 있는 사람은 후부의 적장녀였고 지금은 명망 높은 후야의 정실부인이었다. 그리고 엽영교는 고관의 며느리고 엽미채는 귀한 규수였다.

그런데 하필 이런 사람들 앞에서 제민이 농사짓는 이야기 같은 걸 하는 것이었다. 마치 자신이 일개 농촌 여인에 불과하다는 걸 강조하는 것 같았다. 노교아는 모멸감을 느꼈지만 대답하지 않을 수는 없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전에는 있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의원이시라 농사로 생계를 꾸리지는 않았어요.”

“그랬군요.”

제민은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낭자의 가족들은 전문 기술을 갖추고 있었네요. 어디 나처럼 양친이 다 돌아가시고 그저 땅마지기에 의존해 농사를 지으며 살 수밖에 없었겠어요. 전 나중에는 농사도 지을 수 없게 되어 곳곳을 돌아다니며 좌판을 펴고 물건을 팔아 그걸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답니다.”

노교아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저 미소만 지었다. 말끝마다 농사를 짓고 힘든 생활을 했다고 하는 것이 몹시 귀에 거슬렸다.

한편, 엽연채는 농사 이야기에 관심이 생겨 제민을 쳐다보며 물었다.

“민아, 이젠 너희 집에 땅이 전혀 없어?”

“그때 나오면서 전부 팔았어! 그런데 명절을 쇤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예전 그 땅을 다시 살 생각이야.”

“오, 그럼 토란도 심을 수 있어?”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토란을 좋아하거든. 나중에 토란 좀 심어 주라.”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제민은 미소를 지으며 시원하게 응낙했다.

“언니, 토란을 먹고 싶으면 별장으로 사람을 보내 심게 할 수도 있잖아요.”

엽미채가 이렇게 끼어들자 제민이 딱 잘랐다.

“그건 다르지. 우리 땅에서 자란 토란은 특별히 맛있거든! 때가 되면 내가 직접 심고 잘 키워 줄게.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거야.”

그러고는 토란을 심을 때는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 이야기했고 또 다른 농작물 이야기를 하며 노교아와도 몇 마디를 더 나눴다.

“벼를 심는다면 우리 쪽 땅에선 사월에 심어야 돼. 낭자, 수주는 기후가 따뜻한데 몇 월에 심어요?”

제민의 물음에 노교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잘 몰라요. 저희는 주로 환자들을 진찰하면서 생계를 꾸렸고 저도 어릴 때부터 약리 쪽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농사에 대해선 잘 몰라요.”

“아유. 그거참 아쉽네. 그쪽에 가서도 땅을 좀 사려고 했는데.”

“그쪽은 삼월이면 됩니다.”

엽영교가 아쉬워하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니 주운환이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엽미채와 엽영교는 깜짝 놀라더니 미소를 지으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엽연채가 그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뭘 일어서는 거예요! 얼른 자리에 앉아요!”

엽영교는 호호 하고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누가 네 부군이 무서워서 그러는 줄 아니? 난 손윗사람인걸. 설마 내가 네 부군에게 예라도 갖춰야겠어? 난 그저 네 부군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려는 거야. 연채 네 옆에 앉게 하려고.”

그러자 엽연채는 더욱더 그녀를 쏘아보며 내키지 않아 했다.

“제 옆에 앉기는 뭘 앉아요.”

주운환은 물론 엽연채 옆에 앉고 싶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사양했다.

“고모님, 괜찮으니 어서 자리에 앉으시지요.”

그는 그리 말하며 직접 권의를 끌어당겨 근처에 앉았다.

다들 자리에 앉자 제민이 미소를 지으며 아까 이야기를 다시 이어 갔다.

“후야, 수주 쪽은 삼월에 심을 수 있다고 했죠?”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고는 기후와 토양에 대해 설명을 해 주고, 몇 월에 비료를 주고 몇 월에 충해가 생기니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도 상세히 이야기해 줬다. 심지어 모내기 외에도 고구마를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도 말이다.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노교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후야이자 지위 높은 권신인 그가 어째서 이런 걸 알고 있단 말인가? 게다가 왜 이런 걸 이야기한단 말인가?

그녀는 대화에 끼어들고 싶었지만 방금 전에 이런 것에 대해선 모른다고 했으니 그저 조용히 한쪽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가만히 자리만 지키려니 너무나도 어색하고 난처했다.

다들 모두 농작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주운환의 말도 전부 사리에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정작 농촌 출신인 자신만 대화에 끼지 못하고 있으니 너무 무지한 사람처럼 보였다.

노교아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지만,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이 이야기는 마침내 끝이 났다.

제민은 까르르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과연 후야는 정말 대단해요. 장원이 되기에 손색이 없어요! 모르는 게 없네요!”

그러자 엽영교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조카사위가 장원이기는 하지만 농작물과 충해에 대해서는 우리 집 바보만 못해. 황제 폐하께서도 전에 자주 칭찬하셨어!”

그녀의 바보는 당연히 진지항이었다. 진지항은 농작물과 수리水利에 대해 무척 잘 알아 주운환마저도 그에게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이들은 하나같이 농작물에 대해 이해하는 걸 영예롭게 생각했고 황제마저 이를 칭찬했던 것이다. 노교아는 연꽃 문양을 수놓은 운금 손수건을 움켜잡으며 얼굴에 미소를 띠었지만 속으로는 어색함과 난처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아, 맞다!”

주운환이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고모님 댁 바보가 고모님을 찾았었는데요!”

엽영교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그를 쏘아봤다.

“일찍도 이야기하는구나!”

“앉으면서 깜빡해 버렸어요. 시간이 늦었네요. 밖에서도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 출발하시죠.”

“좋아요.”

주운환의 말에 제민이 웃는 얼굴로 대답하고는 엽미채를 잡아당기며 일어섰다. 두 사람은 양옆에서 엽영교를 부축해 문밖으로 나갔다.

주운환은 엽연채 옆으로 걸어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갑시다.”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게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고개를 돌려 노교아를 불렀다.

“갑시다.”

노교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네.”

그렇게 그들은 함께 운연거에서 나와 천천히 수화문으로 걸어갔다.

그쪽에는 이미 화려한 큰 마차가 무려 네 대 세워져 있었고 엽영교 등은 재잘거리며 걸어가더니 한 사람씩 마차에 올랐다.

엽영교와 제민은 각각 여종 둘씩 데리고 한 마차에 탔고, 엽미채와 노교아도 마찬가지로 여종 둘을 데리고 한 마차에 탔다.

주운환은 엽연채를 끌고 그중 한 마차에 오르려고 했다. 그런데 엽연채가 엽영교와 제민 쪽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전 민이랑 고모와 함께 가고 싶어요.”

주운환은 어리둥절했다.

“저랑 같이 타고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제가 부인을 안고 가면 흔들리지도 않을 거고요.”

하지만 엽연채는 엽영교의 마차로 걸어가며 이렇게 대꾸할 뿐이었다.

“고모도 그렇고 다들 본 지 오래됐어요. 모처럼 함께 나들이 가는 거잖아요. 고모는 이미 6개월 차라 한동안은 함께 나들이하기 어려울 거예요. 고모가 해산하고 나면 제가 아이를 낳을 차례가 되니 또 그렇게 미뤄지겠죠. 그러니 고모와 함께 갈래요.”

엽연채의 말 자체는 타당했지만, 주운환은 그녀가 자신을 상대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전에도 이랬는데 자신이 요즘 들어 너무 민감하게 느끼는 걸까? 뭐든 간에 주운환은 그녀를 안고 잘 달래 함께 타고 가자고 권하려 했다.

그런데 엽연채는 고개를 숙인 채 시들시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니 주운환은 마음이 너무 아파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인은 고모님과 함께 타고 가십시오. 하지만 모레 돌아올 때는 저와 함께 타고 와야 합니다. 알겠죠?”

엽연채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주운환은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는 가는 허리를 살며시 감싸 안은 채 엽영교가 탄 마차로 부축했다.

이미 마차에 오른 제민과 엽영교는 안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엽영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니까 너, 그 노 낭자에게 그다지 살갑게 굴지 않던데. 왜야?”

그 말에 제민은 코웃음을 쳤다.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그 낭자가 농촌 출신이란 점을 되게 많이 신경 쓰는 것 같아 보였거든. 계속 그 이야기를 했잖아.”

“농촌 출신이 뭐 어때서? 그렇게 신경 쓸 게 뭐가 있다고? 나도 농사짓고 살던 사람 아니었어? 그게 뭐 어때서? 난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아! 내가 내 자신을 존중하고 업신여기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이 두려울 게 뭐가 있어?

사농공상이라고들 하는데, 우리가 어떤 점에서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는 거야? 자신의 출신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엽영교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과연 제민은 현주가 되기 전에도 자기 식대로 행동하던 사람이었다.

처음 제민을 봤을 때, 그녀는 유곡요와 바둑 대결을 펼쳤는데 스스로를 농가 소녀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숨긴 적이 없었고 늘 대범하게 행동했다. 현주가 되고 난 후에야 출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며 뒷북치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제민은 확실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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