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4화
혜연의 말에 추길은 표정이 굳어졌다.
“네 말이 맞네.”
말은 이렇게 해도 추길은 마음이 초조해졌다. 만약 온씨가 오게 된다면 분명 아직까지 첩실을 들이지 않은 엽연채에게 첩실을 들이라고 충고를 해 줄 것 아닌가. 하지만 확실히 혜연 말대로 지금 이 나들이는 진서후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가는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노교아가 있었다. 게다가 소전을 포함한 꽤 많은 호위병들이 노교아 편에 서 있었다.
엽연채는 지금까지 주운환에게 첩실을 붙여 주지 않았는데, 그녀의 이런 행동은 이미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고 있었다.
자신만 해도 원래부터 첩실로 들였어야 하는 사람인데 지금까지 이러고 있으니. 추길은 저도 모르게 동질감을 형성하고 자신을 지지해 주는 사람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노교아 일은 소전과 평해가 그녀에게 말해 준 것이었다. 평해가 이 이야기를 들려 줄 때 추길은 호위병들의 말속에서 엽연채의 행동에 대한 불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노교아 편에 서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자신이 조금만 노력한다면 금방 주운환을 곤경 속에서 구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리께서 내일 가신다고 하셨지?”
추길이 미소를 지으며 말머리를 틀었다.
“맞아요!”
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인들에게 준비하라고 해야겠네.”
추길은 그리 말하며 밖에 대고 소리쳤다.
“매화야, 가서 노 낭자에게 내일 매화장에 간다고 알려 주렴.”
건넌방에서 다층 진열장 위의 먼지를 닦고 있던 매화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제 이름과 똑같은 별장이네요! 알겠어요. 지금 가 볼게요.”
추길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직접 가서 노교아에게 알릴 생각이었지만, 계속해서 본인이 찾아가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을 테고 또 너무 공들이는 것처럼 보이리라는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 * *
이튿날, 이날은 모처럼 날씨가 화창하고 눈도 내리지 않았다. 또 햇볕이 고르게 내리쬐어 아주 따뜻해 보였다.
엽연채는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단장을 했다. 그녀가 화장대 앞에 앉자 청유가 그녀의 머리를 매만져 줬고 혜연은 그녀가 입을 옷을 찾았다.
엽연채가 옷을 갈아입었을 무렵, 밖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영교와 제민, 엽미채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고모.”
엽연채는 밖을 내다보더니 얼른 머리 위에 장신구 하나를 꽂고 밖으로 나갔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저 멀리 제민이 엽영교를 부축하며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고 엽미채가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엽연채는 함박웃음을 짓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엽영교의 배로 향했다.
엽영교는 이미 6개월이라 몸이 꽤 무거웠지만 오히려 지금이 훨씬 안정적이라 외출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탈것이 안정감 있는 마차이기만 하면 문제 될 게 없었다.
엽연채는 얼른 그들을 응접실로 데려갔고 혜연과 청유 등은 서둘러 차를 내왔다. 그런데 네 사람이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밖에 있던 여종이 갑자기 이렇게 소리쳤다.
“노 낭자가 왔습니다!”
제민을 포함한 세 사람은 어리둥절했고 제민은 저도 모르게 엽연채를 쳐다봤다.
‘노 낭자? 설마, 수주에 있을 때 봤던 그 사람은 아니겠지?’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는 엽영교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노 낭자라니? 주씨 가문 친척이야?”
엽연채는 냉담한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만 답했다.
“아니요.”
옆에 있던 소월이 대신 말했다.
“의원이에요. 지난번에 나리께서 타지로 비적 떼를 잡으러 가지 않았습니까? 나리께서 산에서 맹호를 만나 중상을 입었을 때, 저 낭자가 나리의 목숨을 구해 줬다던걸요.
그런데 들어 보니 지금 저 낭자의 집이 어려움을 겪고 있대요. 도움을 청하려고 도성으로 올라와 친척을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했는데, 때마침 소전 등과 마주쳐서 그 사람들이 낭자를 집으로 데려왔어요. 저희 마님께서 바로 그 사람들이 지낼 곳을 마련해 주셨고요.”
“맞아요!”
혜연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월은 자세한 내막을 잘 알지 못했는데, 이렇게 내막을 모르면서 말한 대답이 오히려 엽연채를 더 대범하고 품위 있어 보이게 만들었다.
제민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노교아와 주운환이 살을 맞댄 일이 있었다는 걸 모르는 엽영교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오, 그런 사람이라면 제대로 답례해야지! 더욱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하니 당연히 잘 도와줘야겠다.”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노란색 옷을 입은 소녀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어제 나들이를 간다는 소식을 들은 노교아도 속으로 기대감을 품었다.
주운환이 보러 왔던 날, 그녀는 자신의 낡은 옷을 입는 걸 고집했는데 소박하고 수수해 보이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엽연채가 준비해 준 옷을 입었다. 어쨌든 이곳에서 지내게 됐으니 그녀도 예쁘고 산뜻하게 입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들이를 가는데도 굳이 낡은 옷을 고집하면 소박해 보이기는 하겠지만 아무래도 가식적으로 보일 테고.’
그녀는 절지 문양이 들어간 담황색 배자와 휘황찬란한 빛이 흐르는 은사로 수를 놓은 마면군을 입고 있었다.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옷이었고 머리에는 벽록칠보금잠碧碌七寶金簪 한 쌍을 꽂고 있었다.
원래도 참하고 얌전하게 생긴 얼굴인데 이렇게 꾸며 놓으니 더욱 고왔다. 하지만 눈썹 언저리에서는 고집스러움과 억센 기운이 얼마간 느껴졌다.
노교아는 소월을 따라 안으로 들어왔고 고개를 들어 보니 엽연채가 화려한 탑상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잘 차려입은 여인 몇이 그녀를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왼쪽에 앉아 있는 젊은 부인은 아주 곱고 아리땁게 생겼고 옷과 장신구가 화려했으며 아이를 가진 상태였다. 오른쪽에 앉아 있는 소녀는 열일곱 살쯤 되어 보였고 예쁘장한 외모에 총명한 인상이었다. 좌우를 살피는 모습에서 맑디맑은 샘물처럼 상쾌하고 신선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왼쪽 하좌의 수돈에 앉아 있는 소녀는 개중 나이가 가장 어려 보였는데, 그래도 열네 살쯤은 되어 보였다. 어여쁜 외모를 가진 이 소녀도 팔보八寶를 감아 놓은 정교한 보요를 꽂고 있으니 신분이 결코 낮지는 않아 보였다.
무리를 이룬 엽연채에 비해 노교아는 혼자였다. 그 때문일까. 그들과 그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며 전혀 어울리지 않아 부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였다.
노교아는 속으로 조금 겁을 먹었고 약간 거북하기도 했지만 예의 그 침착한 성격을 발휘하여 앞으로 나와 예를 올렸다.
“부인을 뵈옵니다.”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했다.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네. 어서 자리에 앉으시게.”
이미 수돈을 가져온 청유는 엽미채 옆에 수돈을 내려놓았다. 노교아는 일순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그쪽으로 걸어가 수돈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혜연이 미소를 지으며 노교아에게 말을 건넸다.
“낭자, 요 이틀 동안 대접이 너무 소홀했죠. 하지만 의원이 마님은 푹 쉬어야 한다고 했고 마님도 요 이틀 동안 몸이 나른해서 편안한 상태가 아니셨어요. 오늘 겨우 기운을 차리신 거예요. 사람들이 많으니 함께 별장에 가서 놀면 시끌벅적하고 즐겁겠죠?”
노교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사의를 표했다.
“그렇죠. 후 부인,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것 아니네.”
엽연채가 간단히 답례하자 혜연이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엽영교를 가리켰다.
“소개부터 할게요. 이분은 진씨 가문 부인이신데 저희 마님의 고모님이세요. 부군은 이번 과거 시험에서 탐화로 합격하신 분으로, 현재 한림원 편수직에 계시고요. 시아버님은 정3품 호부시랑이세요.”
엽영교가 고관의 며느리라는 말에 노교아는 저도 모르게 몸이 경직되었으나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엽영교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낭자,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아도 되네. 낭자는 주씨 가문 손님이니 우리 사람인 셈이지.”
혜연은 이번에는 제민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분은 능연凌燕 현주세요. 현주께서도 낭자와 마찬가지로 농촌 출신이신데 바둑 실력이 뛰어나 우리 마님과 함께 대국에 참가하셨고, 북연 사신에게서 멋진 승리를 거두셨죠. 당시 북연에서 군량 십만 말을 얻어 낸 공로로 능연 현주에 봉해지셨어요.”
노교아는 제민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농촌 출신이라는 말에 놀라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자신의 실력으로 현주가 되었다니. 노교아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또 순간 제민에게 밀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몹시 거북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예의를 갖췄다.
“현주를 뵈옵니다.”
제민은 허허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낭자, 편하게 지내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우린 배경도 비슷하니 서로 잘 보살피고 돌봐 주기로 해요. 앞으로 날 제민이라고 편하게 부르면 돼요! 하인들이 날 소저나 현주라고 부르는데, 얼마나 불편한지 몰라요.”
“이분은 마님의 여동생인 엽씨 가문 셋째 소저입니다.”
혜연은 제민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엽미채를 소개했다.
노교아가 엽미채와도 인사를 나누자 제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현주에 봉해진 후로 계속 혼자 살고 있어 너무 쓸쓸해요. 낭자는 나와 배경이 같으니 분명 말이 아주 잘 통할 거예요. 낭자, 차라리 우리 집으로 옮겨와 나와 함께 지내는 건 어때요?”
제민은 명랑하게 웃었으나 옆에 서 있던 추길은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혜연은 두 눈을 반짝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놀리듯이 말했다.
“봐요. 제민 소저는 이렇게 친절하고 손님 접대를 좋아하신다니까요! 마음이 잘 맞는 사람만 봤다 하면 집으로 데려가 며칠이고 함께 지내려고 하세요. 그런데 또 소저가 만든 교자가 유달리 맛있어서 다들 한번 머무르면 나가지 않으려고 하죠.
하지만 제민 소저도 참 이상해요. 사람을 한 번 초대하고 나면 다음에 또 초대하는 일은 없거든요. 딴 데다 한눈파시는 거죠. 그러니 낭자도 얼른 수락하고 소저 집에 가서 교자를 먹어 봐요. 다음번에는 가고 싶어도 기회가 없을걸요.”
“하하. 그래, 맞아.”
제민이 맞장구를 치자 노교아는 불편한 느낌을 참으며 입술을 살짝 오므리고 말했다.
“호의에 감사드려요. 하지만 전… 이제 막 이곳에서 지내게 됐어요. 다들 제가 후야의 생명의 은인인 걸 아는데, 어제 마님께서 몸이 편치 않으셔서 절 보러 오지 못하셨어요……. 제가 갑자기 떠나게 되면 아마 사람들은 마님께서 절 박대했다고 오해할 거예요.
그러니 명절을 쇤 후에 댁에 방문해서 교자를 먹으면 어떨까요. 그때 가서 싫다고 내치시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