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3화
주운환의 서재는 여양과 여한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소전이 걸어가 보니 저 멀리 여양이 입구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여양 형님.”
“오. 소전이구나. 무슨 일로 왔니?”
여양은 미소를 지었다.
“나리께서는 언제 일을 마치세요?”
여양이 지키고 선 걸 보니 주운환이 안에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지 없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거의 다 끝나셨을 거야! 무슨 급한 일이 있거든 나한테 말하고.”
“급한 일이 있는 건 아니에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말을 마친 소전은 근처의 커다란 바위로 걸어가 그곳에 걸터앉았다.
일각쯤 지나자 밖으로 나오는 주운환의 모습이 보였다. 소전은 얼른 그를 맞이하러 뛰어갔다.
“나리.”
“무슨 일이냐?”
주운환의 청아한 얼굴이 살짝 냉담하게 변하더니 성가셔 죽겠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명절도 어느새 절반이 다 지났습니다. 곧 있으면 저흰 또 죽자 사자 일해야 하겠죠.”
소전은 헤헤 웃더니 본론을 꺼냈다.
“저희가 휴가를 보내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집을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그 때문에 밖에 나가서 놀 틈이 없죠!
그런데 나리께 하사된 별장 중에 매화장梅花庄이라는 별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 경치가 매우 훌륭하다죠! 겨울에 매화가 아주 흐드러지게 핀다고 하던데, 가서 한번 보고 싶습니다!”
“매화장?”
주운환은 날카로운 눈썹을 슬쩍 추켜올렸다.
“네!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다던데요. 저희가 우락부락한 사내들이기는 하나 저희도 예쁘게 핀 꽃은 좋아합니다. 나리께서도 마님을 모시고 함께 가서 경치를 구경하실 수 있고요.”
들어 보니 주운환도 소전의 이 제안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럼 가자꾸나.”
사실 그도 자신과 함께 생사를 넘나든 형제들을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요즘 양왕의 일 때문에 신경 쓸 틈이 없던 차였다.
“예. 감사합니다, 나리!”
소전은 헤죽대면서 쏜살같이 달려갔다.
“쯧. 저 녀석은 노는 걸 너무 좋아한다니까.”
여양은 한마디 하면서도 하하 웃었다.
나들이 계획이 생긴 주운환은 바로 운연거로 향했다.
그 시각, 엽연채는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회임을 한 뒤로 유달리 잠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전에는 진시辰時(오전 7시~9시) 일각이면 잠에서 깼는데 이제는 사시巳時(오전 9시~11시)까지는 자야 겨우 자리를 떨쳤다.
엽연채는 씻고 단장을 마친 후 소청에서 아침 식사를 들기 시작했다.
한쪽에 선 추길은 천천히 식사를 하고 있는 엽연채의 느긋한 모습을 보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마님……. 그 노 낭자를 보러 가지 않으실 거예요? 어쨌든 그 낭자는 손님이고 나리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입니다. 어제는 그 낭자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왔고 마님도 마침 피곤하셨기 때문에 대접하지 못한 거라고 사람들도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이제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었으니 아무리 그래도 한 번은 보러 가셔야죠.”
엽연채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코웃음을 쳤다.
“어제 부군이 하셨던 말을 못 들은 것이냐? 부군은 내게 푹 쉬라고 했고 하인들을 시켜 대접하면 된다고 했다.”
추길은 표정이 굳어졌다. 주운환은 엽연채가 화를 낼까 봐 빈말을 했던 것이다. 누가 정말로 그걸 진심으로 여긴다는 말인가?
게다가 주운환이 그렇게 말할수록 엽연채는 더욱더 그 생명의 은인을 잘 대접해야 했다.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추길은 마음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노교아가 자주 이곳에 드나들면 엽연채가 위협을 느껴서 자신을 첩실로 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기는커녕 아예 노교아를 상대할 생각도 없어 보이니. 추길은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감히 여러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리.”
이때, 밖에서 소월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 경쾌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주운환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엽연채가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젓가락을 들어 만두 하나를 그녀에게 집어 줬다.
“부인, 먹어 보십시오.”
엽연채는 표정이 굳어졌다.
“배불러요.”
그런데 이 만두를 보고 있으니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검은 눈썹을 찡그렸다. 이 만두는 토자포였다.
엽연채는 생각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젓가락을 들어 그 만두를 집어 올렸다. 그녀는 조앵기가 토자포를 가장 좋아한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조앵기는 하나를 먹으면 또 하나는 숨겨 엽연채가 먹을 수 있게 남겨 놓기도 했다. 양왕이 토자포 하나 먹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엽연채가 토자포를 한 입 베어 물자 안에 들어 있는 시큼하면서도 달달한 소가 미각을 자극했다. 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앵기도 토자포를 먹고 있을까요?”
“먹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엽연채는 주운환의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양왕은 지금 밖에서 쫓겨 다니는 처지 아닌가. 심히 위태로운 상황이니 아마 밥조차 제대로 못 먹고 있을 것이다.
“부인, 우리 내일 매화장에 갑시다.”
주운환은 상심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얼른 마지막 남은 토자포를 집어 입에 쑤셔 넣었다. 안 그러면 그녀가 토자포를 보며 조앵기를 그리워할 테니 말이다.
“요즘 바쁜 거 아니에요?”
“이미 준비는 확실하게 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저 마음이 불안한 것뿐이라서요.”
양왕의 일은 이미 여한에게 직접 알아보라고 했으니 자신이 집에서 애를 태워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요즘 엽연채도 기운이 영 없어 보이니 그럴 시간이 있으면 그녀 곁에 많이 있어 주는 편이 훨씬 나을 성싶었다.
“그렇군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이제 좀 잘 거니까 부군은 나가 보세요.”
주운환은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자는데 왜 자신이 나가야 한다는 말인가?
“저도 부인과 함께 자고 싶습니다.”
“아이 참. 전 하루 종일 부군을 독차지하고 있지 않을 거예요.”
“왜요. 전 부인이 하루 종일 절 독차지하고 있는 게 좋은데 말입니다.”
더욱 표정이 굳어진 그는 그리 말하며 엽연채의 몸에 기대어 그녀를 담뿍 껴안았다. 그러자 엽연채는 이번에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를 찌르며 타박했다.
“부군은 돼지처럼 온종일 잠만 자네요.”
주운환은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부인도 그러지 않습니까.”
“전 아니에요. 저녁에 자는 건 제가 자는 거지만 지금 자는 건 아이가 자는 거예요.”
말을 마친 그녀는 하품을 하더니 침상으로 걸어갔다. 주운환은 당장 그녀의 뒤를 따라가 침상 위로 올라갔는데, 엽연채는 그를 발로 차려다가 몸이 기우뚱하는 바람에 그에게 뒤통수만 보였다.
별장으로 나들이를 갈 생각에 엽연채는 기분이 퍽 좋아졌다. 하지만 혼자 가면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엽연채는 몸을 돌려 옆으로 눕더니 주운환을 쳐다보며 물었다.
“고모를 불러도 돼요?”
주운환은 마침내 그녀가 자신에게 뒤통수만 보이지 않자 기분이 아주 좋아져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요.”
엽연채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또 이렇게 물었다.
“민이도 불러도 돼요?”
주운환은 이번에도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됩니다.”
그러자 엽연채는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미채도 불러도 돼요?”
“그럼요. 전부 부르십시오.”
주운환은 마음이 들떴고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맞춤했다. 그런데 엽연채가 입맞춤을 받자마자 곧장 몸을 돌려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주운환은 표정이 굳어졌으나 어쩔 방법이 없으니 그저 꼬물거리며 그녀의 등 뒤에 달라붙었다.
그래도 엽연채는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잠시 후, 엽연채는 잠이 들었으나 주운환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저 그녀를 껴안은 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 * *
오후가 되자 주운환은 또다시 공무를 보러 출타했다.
엽연채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주운환이 이미 엽영교와 제민 등에게 함께 매화장에 가서 놀자는 내용의 첩자를 보낸 후였다.
엽연채는 내일 외출할 생각을 하니 기대감이 들어 마음이 그렇게 답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탑상에 앉아 아이에게 씌워 줄 작은 모자를 뜨기 시작했다.
혜연과 청유는 그녀 곁에 둘러앉아 한 명은 그녀에게 실을 나눠 주고 또 한 명은 그녀에게 화본을 읽어 줬다.
그때 추길이 대추와 생강, 설탕을 넣고 끓인 차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엽연채의 기대하는 모습을 쳐다보며 나직이 한숨을 쉬더니 이리 물었다.
“마님, 저희 가문 사람들이 모두 외출하면 어제 온 그 노 낭자는 어찌할까요?”
그 말에 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추길이 자꾸 노교아를 언급하는 게 불편했다. 하나 이 부분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질문이긴 했다. 엽연채 등 집안의 상전이 모두 밖으로 나가는데 손님만 집에 남겨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엽연채는 눈도 들지 않고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난 그 낭자를 부르지 않겠다고 말한 적 없다.”
추길은 엽연채가 냉담한 말투로 제 말을 받자 또다시 마음이 괴로웠다.
‘아무리 그래도 나리를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런 냉담한 태도로 대할 수 있는 거지? 이건 그야말로 배은망덕한 행동이야.’
하지만 추길이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엽연채의 이 냉담한 태도는 결코 노교아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추길이 또 입을 열었다.
“나리의 별장은… 저희도 처음 가 보는 거네요. 예전에는 수도 근교에 있는 마님의 작은 별장에만 갔었죠. 여러 번 가 본 곳이니 어디 매화장만큼 신선한 느낌이 들겠어요. 자당도 오시라고 해서 함께 가는 건 어떨까요? 다 함께 가서 바람을 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그 말에 엽연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당연히 어머니와 함께 나들이하는 걸 좋아하지만 지금은 온씨가 계속해서 첩실을 들이라고 충고할 생각을 하니 지금은 그녀를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이미 주운환을 떠나기로 결정했고 그에 수반하는 계획도 다 세워 둔 후였지만, 이 일은 자신에게 있어 크나큰 상처였다.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지만, 그 위에 소금을 뿌려 대면 여전히 아픔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린 전부 젊은 사람들이니 어머니를 부르면 어색해하실지도 몰라.”
엽연채의 대꾸에 추길은 멍해지더니 얼른 이렇게 말했다.
“그럼 친할머님과 셋째 숙모님, 진씨 가문 부인 등 친인척을 더 초대하시면 되죠.”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혜연이 추길을 노려보며 싫은 소리를 했다.
“이번에 별장에 가는 건 나리께서 나리를 따랐던 병사들을 위로해 주시려는 거야. 고모님과 제민 소저를 데려가는 것도 이미 좀 과해 보일 텐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더 데려가면 어떻게 되겠니? 나리의 사람들이 또 바쁘게 움직이며 상전들을 보호해야 할 텐데, 그럼 어떻게 위로가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