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82화 (582/858)

제582화

“그…….”

주운환은 그녀가 무어라 대꾸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땐 위급했던 상황이라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뿐이지. 걱정 말게. 난 이 일을 결단코 밖에다 떠벌리지 않을 것이네. 그러니 낭자는 마음 푹 놓게.”

노교아는 입술을 뗐지만 이내 멈추고 말았다. 노 영감이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 노교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오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후야.”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 둘 게 있네. 내 부인이 회임 중이라 의원이 푹 쉬며 몸조리에 힘쓰라고 했네. 그래서 부인이 직접 자네를 대접하기는 힘들겠지만, 대신 하인들이 정성껏 시중을 들 테니 양해해 주게.”

노교아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인의 건강이 가장 중요하죠.”

“그럼 난 중요한 일이 있어 밖에 나가 봐야 하니 편하게 있게. 마음 푹 놓고 이곳에서 지내시게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후야.”

노교아가 부드러운 미소를 입매에 걸치며 인사하자 주운환은 곧장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노교아는 고개를 들어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고, 노 영감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이, 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

“할아버지. 아무 말씀 마세요. 결국 순리대로 풀릴 겁니다. 날이 어두우니 어서 돌아가서 쉬세요!”

“지금 잠이 오겠느냐.”

노 영감은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더니 다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큰 집에 넘쳐나는 하인들과 맛있는 음식들이……. 하지만 전부 사라져 버렸다. 어찌 됐든 간에 너는 후야와 살을 맞댔고 목숨까지 구해 줬다. 지금 넌 정실의 자리를 달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낭이 되겠다는 것뿐인데 이것도 안 된다는 말이냐?”

그들은 후야는 지현知縣의 지부나 지주보다 훨씬 고귀한 권세가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의 이낭이 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팔자를 열 번은 고쳐야 얻을 수 있는 복이었다. 하여 천신만고 끝에 이곳에 도착했는데 주운환이 이런 말을 꺼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만하세요. 할아버지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셔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리고 전 그럴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전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노교아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할아버지, 지위나 재산 같은 걸 너무 따지지 마세요.”

노교아는 그리 말하며 굴욕을 참는 표정을 지었다.

“너……!”

노 영감은 답답해 발을 동동 구를 지경이었다.

“할아버지, 어서 돌아가서 쉬세요. 벌써 여러 날을 고단하게 지내셨잖아요.”

그러나 노교아는 이렇게 대화를 일단락하고 조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노 영감은 심란했지만 무척 지쳐 있던 터라 부드러운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바로 잠이 들어 버렸다.

노교아는 혼자 정원으로 나왔다. 그녀는 정원에 놓인 돌 탁자에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다가 눈이 내리자 그제야 방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여종들이 두 사람에게 아침 식사를 가져다줬는데 그들이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정교하고 앙증맞은 다양한 간식거리였다.

노 영감은 간식을 먹다가 실수로 살점을 깨물었는데도 식사를 멈추려 하지 않았다. 노교아는 할 수 없이 간식거리를 꽤 많이 집어 준 다음 그에게 방으로 가져가서 먹으라고 했다.

“낭자.”

이때, 누군가가 환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고 노교아가 고개를 들어 보니 소전이 안으로 들어왔다.

“낭자, 어젠 잘 쉬었어요?”

노교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례했다.

“푹 잤어요. 오라버니, 관심 가져 주셔서 고마워요. 안 그래도 지금 후 부인께 문안 인사를 드려야 하는지 아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오라버니가 오셨네요. 어쩌면 좋을까요?”

“마님께서 아직도 낭자를 부르지 않으셨어요?”

소전이 인상을 쓰며 묻자 노교아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소전의 낯빛이 바로 어두워졌다. 어젯밤에 노교아를 냉대한 건 그렇다 쳐도 오늘은 그녀가 온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사람도 환경도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낯선 사람의 집에서 지내게 됐으니 이 조부는 속으로 안절부절못하며 불편해할 게 당연했다. 그러니 엽연채는 주인으로서 당연히 노교아를 잘 대접하고 보살펴 줘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일개 손님한테도 그리해야 마땅할진대 노교아는 주운환과 그 부하들을 구한 은인이었다. 그런데도 엽연채는 그녀를 이리 박대하는 것이었다.

소전은 불만을 곱씹으며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물었다.

“참, 나리께서 어제 낭자를 보러 오셨어요?”

노교아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셨어요. 후야께서 어제 이곳에 오셔서 제게 구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셨어요. 또 부인께서는 몸이 무거워서 의원이 푹 쉬라고 당부했다고도 알려 주셨고요. 몸 상태 때문에 절 대접하기 어려우시다더군요.”

소전은 쳇 하고 혀를 찼다.

‘몸이 무겁기는 무슨. 대접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분명 며칠 전만 해도 여기저기 잘 돌아다녔으면서.’

소전은 불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지만, 노교아 앞에서 털어놓기는 곤란해 그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달랬다.

“낭자, 걱정 마요. 우리 후야께서는 박정하고 의리 없는 분이 아니세요. 낭자는 앞으로 여기서 편안히 지내면 돼요!”

“네.”

소전은 노교아와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눈 후 그곳을 떠났다.

호위병들이 지내는 곳으로 돌아온 그는 평해를 끌고 방으로 들어가 술을 마시며 불평을 토로했다.

“노 낭자가 찾아왔는데도 마님은 잘 대접하기는커녕 눈치까지 주고 있어요.”

소전은 평해에게 술을 따라 줬다. 두 사람은 나이차가 많이 나서 거의 부자뻘이지만 성격이 잘 맞아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여인네들이 다 그렇지, 뭐.”

평해는 작은 목소리로 비웃고는 이렇게 말했다.

“하, 우리 사내들이 이렇게 밖에서 죽기 살기로 고생하는 게 뭘 위해서야? 다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고 재물과 미인을 얻기 위해서 아니겠어!

다른 집 여인들은 이걸 알아. 그래서 부녀자의 미덕대로 남편을 위해 첩실들을 준비해 준다고. 설령 남편이 괜찮다고 거절해도 강하게 밀어붙이는 게 현명한 부인이지. 하다못해 우리 집 드센 마누라만 해도 그래. 집안에 돈이 좀 생겼더니 자기가 부리는 어린 여종을 내게 붙여 줬단 말이야.”

평해는 노교아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지만 엽연채의 행동에 대해서는 심한 반감과 혐오감을 느꼈다. 이건 그야말로 모든 사내들의 존엄과 관행을 건드리는 짓이며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엽연채가 나쁜 선례를 남기도록 해 준다면 세상 모든 여인네들이 반기를 들려고 하지 않겠는가? 이는 수많은 사내들이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하나같이 엽연채의 행동에 맹렬히 의분을 느끼는 것이었다.

“노 낭자가 그러더라고요. 나리께서 낭자를 보러 오셨을 때 마님 편에 서서 말씀을 하셨다고요. 마님은 몸이 무거워 움직이기 불편하시다고 말이죠.”

소전은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었다.

“어디가 불편하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제가 보기에는 아주 훨훨 날아다니시던데. 주씨 가문에 가서 불꽃놀이도 보고 친정에도 가셨잖아요. 그렇게 왔다 갔다 해도 피곤해하지 않으시던데, 공교롭게도 그 낭자를 보더니 쉬어야 한다고 하시네요.

사람 좀 보는 게 뭐 그렇게 힘이 드는 일이에요? 그저 불러 놓고 앉아서 한가롭게 이야기 좀 하면 그만인데, 그럴 기력조차 없나 보죠?”

“그러게 말이다.”

평해는 고갯짓으로 동조했고, 소전은 계속해서 불만을 쏟아냈다.

“분명 나리와 그 낭자가 살을 맞댄 일이 있으니 그 낭자를 첩실로 들일까 봐 꾀를 부리는 거예요. 부른 배 좀 내밀고는 그걸로 나리께서 노 낭자를 멀리하도록 강요하는 거죠.

노 낭자가 너무 가엾어요. 마님이 나서서 그 낭자를 첩실로 들여야 하는 건데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네요.”

소전은 한탄하며 사발에 술을 콸콸 들이부었다.

“그래, 네 말대로 정말 용납할 수 없는 경우지.”

평해도 술을 입에 털어 넣었고, 얼큰하게 취하니 내뱉는 말도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나리였다면 지금쯤 사정없이 뺨을 두어 대 올려붙였을 거야. 그리해서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거지. 여인네가 뭘 안다고. 나리의 신분이면 여인 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 건데!”

“그러니까요!”

소전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지금 나리의 신분과 지위이면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다고 해도 충분해요. 그때 그 엽씨 가문 둘째 소저가 파혼하자고 했을 때 나리의 옆자리는 비워졌어야 했어요.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린 후에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으면 얼마나 좋으셨겠어요!

쯧쯧. 지금 태자 전하께서 이렇게 나리를 신임하고 총애하시니 나리께 아내가 없었다면 어쩌면 적출인 공주를 짝으로 주셨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자기가 아득바득 주씨 가문으로 밀고 들어왔으면서 제멋대로 굴기까지 하네요.”

“그러게 말이다.”

“안 되겠어요! 이렇게 두면 안 돼요!”

소전은 갑자기 술 사발을 내던지더니 눈알을 대굴대굴 굴리며 배시시 웃었다.

“저희가 나리와 노 낭자를 잘 맺어 주죠. 아예 마님이 나서서 그 낭자를 첩실로 들이게 하는 거예요.”

“어?”

평해는 어리둥절해하더니 청자기 사발을 들고 홀짝거리며 물었다.

“그렇게 쉬울 리가 있어? 마님의 행동이 부적절하기는 하나 신분이 다르니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 그러면 하극상이 되는 거야.”

자기네끼리 몇 마디 떠들어대는 건 괜찮지만, 바깥에 내보내는 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제가 무슨 자격으로 대놓고 마님을 비판하겠습니까? 머리를 써야죠.”

소전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콕콕 찔렀고 약삭빠른 표정으로 실실댔다. 그러고는 평해의 귀에 대고 자신의 계획을 들려줬다.

“그렇죠? 이렇게 간단한 일이라니까요. 그리하면 마님도 별수 없을 거예요.”

평해는 하하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소전을 치켜세웠다.

“역시 소전이 네가 참 영리하단 말이야.”

“당연하죠.”

소전은 들고 있던 술을 전부 들이켜더니 움푹하게 파인 곳으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평해는 얼른 그를 잡아당기며 당부했다.

“우리가 이곳에서 나눈 말은 배 속으로 들어간 술처럼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 거다.”

“물론이죠.”

소전은 그의 어깨를 두드린 후 문밖으로 나갔다.

그는 자신이 지내는 처소에서 나와 주운환의 서재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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