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1화
엽연채도 현재 돌아가는 판세를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태자와 정선제의 사이가 갈라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이 그렇게 풀리고 주운환이 경위영을 장악하게 되면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있게 될 터였다.
문제는 도성을 떠난 양왕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회임을 하고 명절을 쇠는 등 일련의 일들이 생기는 바람에 엽연채는 그쪽에 관해 주운환에게 미처 물어보지 못했다.
“양왕 전하께서는 지금 어떠세요?”
엽연채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운을 떼다가 문득 조앵기가 생각났다.
“양왕 전하께서는 도성 밖으로 나간 후로 계속 태자 등에게 추격을 당하셨습니다. 추격대를 상대하기가 쉽지 않아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았을 때는 북쪽으로 가신다는 것 같았고요. 그리고 그쪽에 도착하셨을 즈음에 저와 연락이 끊겼습니다.”
주운환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엽연채는 그의 말속에서 초조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연락이 끊겼다고?’
엽연채도 깜짝 놀랐다.
“지금 태자나 정씨 가문 입에서 양왕 전하의 위치를 알아낼 생각입니다. 동시에 그쪽으로 사람을 보내 수색할 예정이고요.”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저도 도울게요.”
“부인은 몸이 무거우니 집에서 푹 쉬십시오. 한동안 바쁠 거라 부인과 함께 있어 주기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양왕 전하를 찾아내면 모든 게 금세 좋아질 테니 걱정 마십시오.”
새해를 맞이해 밖은 즐겁고 왁자지껄해 보였지만 그 속에 섞여 있는 이상야릇한 공기는 당사자만이 느낄 수 있었다. 이 일로 요즘 주운환은 정신없이 바빴다.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양이 부군을 불렀으니 어서 가 봐요! 어쩌면 그쪽 소식이 왔을지도 몰라요.”
“그리하겠습니다.”
주운환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따가 노 낭자가 있는 곳에 가서 고맙다는 말을 전한 후 외출할 겁니다.”
주운환은 지난번 동우산 산굴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엽연채가 꺼림칙하게 생각할까 봐 얼른 그녀에게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노교아가 이 집에 머무르는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아예 그녀를 보러 가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부인… 요즘 피곤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니 푹 쉬는 데만 신경 쓰십시오. 그 낭자 일도 신경 쓰지 말고요. 하인들에게 잘 챙기라고 하면 됩니다. 명절이 지나면 제가 그 사람들의 거처를 알아보겠습니다.”
명절에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사람을 내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네. 일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모양이니 어서 가 보세요.”
엽연채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
주운환은 여전히 엽연채가 자신을 차갑게 대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요즘 양왕의 일 때문에 긴장된 상태라 그렇게 느끼는 걸까? 아니면 그녀가 회임을 해서 영향을 받기 때문일까?
“부군의 일부터 봐요. 전 회임을 해서 몸이 불편한 것뿐이에요. 양왕 전하의 일은 일각도 지체할 수 없는 일이에요. 늑장을 부렸다간 전군이 전멸하고 말 거예요.”
“맞습니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은 집에서 푹 쉬십시오. 바쁜 일만 마무리 되면 같이 놀러 나갑시다. 알겠죠?”
말을 마친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그곳을 떠났다.
주운환이 나오자 여양은 얼른 그를 따라갔고 운연거 밖에서 작은 목소리로 고했다.
“첩자의 보고에 따르면 양왕 전하께서는 뇌주酹州로 쫓겨 가셨다고 합니다.”
“뇌주?”
주운환은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추켜올렸다. 뇌주는 바로 황후의 친정인 영국후부가 군대를 주둔한 곳이었다.
“북쪽에 있는 소읍小邑에서 자취를 발견했는데 추격 부대가 사방팔방에 있다고 합니다. 태자 전하의 사람도 있고 정씨 가문 사람도 있고, 또 그쪽 지부의 사람도 있다고요.”
여양의 보고에 주운환은 표정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 어떡하든 방법을 생각해 내 그들을 양왕에게서 떼어 내야 했다.
상념에 잠겨 호숫가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여양이 다른 화제를 꺼냈다.
“참, 이쪽으로 돌아가면 서과원인데 이참에 벽옥헌에 가 보는 건 어떠세요?”
방금 전 여양이 돌아왔을 때 소전과 마주쳤는데, 소전은 노교아가 이곳에 왔고 벽옥헌으로 보내졌다고 알려 주었다.
“그래. 그럼 가 보자꾸나.”
주운환은 시간이 아직 이른 걸 보더니 발길을 돌려 벽옥헌으로 갔다. 벽옥헌은 후부의 서과원에 위치해 본채와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 * *
노교아와 그녀의 할아버지가 벽옥헌으로 보내진 후 여종들이 그들의 식사를 내왔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한 상 가득 차려졌는데, 무려 여덟 가지 반찬과 국 한 가지가 올라와 있었다.
노 영감은 진수성찬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며칠이나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던 그는 저도 모르게 닥치는 대로 위장에 음식을 밀어 넣었다.
노교아도 며칠이나 배를 곯은 상태였다. 게다가 눈앞에 차려진 성찬은 그들이 명절을 쇨 때조차 못 먹는 음식들이었고 심지어 말로만 듣던 음식들도 보였다. 전복이나 제비집 같은 건 이날 이때까지 설화자의 입을 통해서만 들어 본 식재료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재료를 아낌없이 쓴 음식들이 눈앞에 차려져 있으니 그녀도 음식들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일각쯤 흐르자 그녀는 더는 한 점도 배 속으로 밀어 넣지 못할 정도로 배가 불렀다.
노 영감만 여전히 음식을 맛보고 있었고, 거기서 일각쯤 더 흐르자 상 위에 차려져 있던 음식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노교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노 영감을 말렸다.
“할아버지, 이미 배부르지 않으세요? 이제 그만 드세요.”
“난 이런 음식들은 들어 본 적도 없다. 닭과 오리, 생선하고 거위는 그렇다 쳐도 이 생선은 납작한 것이 무슨 생선인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니 난 더 먹어야겠다. 앞으로는 못 먹을 테니 말이다.”
노 영감의 대꾸에 노교아는 다시 인상을 썼다.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우린 여기서 오랫동안 지낼 거예요. 좀 있으면 하인들이 와서 상을 치울 텐데 우리가 음식을 깨끗이 핥아 먹은 걸 보면 분명 뒤에서 흉볼 거예요. 그럼 얼마나 창피하겠어요!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들처럼 보였단 거잖아요.
사람들이 우릴 얕잡아 보게 만들면 안 돼요. 저희가 농촌 출신이기는 해도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걸 남들도 알게 해야 돼요.”
노 영감은 놀라서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얼른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잠시 후, 여종들이 와서 밥상을 정리했고 또 어멈 한 명이 물과 깨끗한 옷을 가져왔다.
조손은 따로 씻었고 노 영감은 준비된 새 옷을 입더니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노교아에게 준비된 옷은 절지 문양이 들어간 담황색 배자와 휘황찬란한 빛이 흐르는 은색 마면군이었다. 모양은 깔끔하지만 귀티가 철철 흘렀고 치마에는 은실로 놓은 수도 들어가 있었다.
노교아는 옷을 만져만 보다가 그대로 놔두고 자신의 보따리에 들어 있던 낡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후 노교아가 작은 응접실로 돌아왔는데 노 영감은 탑상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 집은 탄을 태우지 않는데도 따뜻하구나.”
“이런 저택은 건축 때부터 난방에 신경 쓴다고 들었던 것 같아요.”
“오, 그래?”
노 영감은 신기해하더니 이내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건 그렇고 후야께서는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셨구나. 우리를 보러 오지도 않으시고. 이러다 우릴 쫓아내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닐 거예요. 후야는 그런 분이 아니세요.”
노교아가 이렇게 안심을 시켜도 노 영감은 여전히 마음이 몹시 불안했다.
그런데 이때, 밖에서 갑자기 여종이 외쳤다.
“나리.”
노교아는 말소리에 어리둥절해하더니 이내 주운환이 왔음을 알아챘다. 지난번에 동우산에서 소전 등이 모두 주운환을 나리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노교아는 노 영감을 잡아당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께 문밖으로 나가 보니 저 멀리 헌칠하고 건장한 사내가 문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노교아는 주운환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반쯤 넋을 놓았다.
지난번 동우산에서 봤을 때도 그녀는 이 소년 장군이 아주 매력적이고 위엄이 넘치며 선인의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렇게 잘생긴 사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마치 사람이 아니라 그림 속 인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갑옷이 아닌 평상복을 입은 모습을 보니, 온화하고 점잖으며 귀티가 나는 귀공자의 풍모가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그는 두꺼운 검은색 소매 없는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그가 움직일 때마다 외투가 펄럭이며 안에 입은 자수를 놓은 은회색 금포가 보였다. 화려한 용모에 우아하고 품위 있는 풍모를 뽐내는 그에게 타고난 귀티가 흐르고 있었다.
귀족들 중에서도 지위가 가장 높고 존귀하기 이를 데 없는 권신과 꼭 닮아 있었다. 아니, 닮은 게 아니라 그러한 권신이었다.
주운환은 이미 앞으로 걸어와 있었고 노교아는 그제야 정신이 들더니 얼른 다가가 예를 올렸다.
“후야를 뵈옵니다.”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네.”
주운환은 그녀를 부축하는 시늉을 했지만 정말로 그리하지는 않았다. 노교아가 몸을 세우자 주운환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읍하며 정식으로 감사를 표했다.
“지난번 동우산에서 목숨을 구해 줘서 정말 고맙네. 생명의 은인이니 내가 직접 찾아가 감사 인사를 건네야 했지만, 당시 비적 떼의 잔당들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네. 직접 방문해 인사하면 그대들이 표적이 될까 봐 염려돼 나 대신 소전을 보낸 걸세. 이해해 주게나.”
“후야,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노교아는 얼른 손사래를 쳤고 시선은 살짝 아래로 향했다. 그러나 그만 참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후야와 모두를 구한 건 의로운 마음으로 행했던 일입니다. 결코 뭔가를 바라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말을 이으며 고집스러움과 무력함이 함께 묻어나는 눈빛을 보였다.
“하지만 제가 오늘 이곳에 찾아오게 되어 마치 은혜를 빌미로 보답을 요구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후야, 전 정말 일부러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단지… 지금 정말로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서 잠시 이곳에 머무르게 된 겁니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허벅지께의 두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괜찮으니 어려워 말고 놀러 왔다고 생각하게. 명절을 쇠러 왔다고 생각하면 되네.”
주운환은 부드럽게 대꾸하더니 이렇게 말을 이었다.
“다만 한 가지 말할 게 있네. 그때 낭자가 날 구해 줬을 때, 부주의로 살이 살짝 맞닿게 됐네. 하지만 난 낭자가 의원으로서 사람을 구했던 일이 부지기수이고 나와 같은 상황도 꽤 많이 겪었을 거라는 걸 알고 있네.”
그 말에 노교아의 얼굴이 경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