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0화
사람들이 다 떠나자 노교아의 할아버지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주변은 눈에 다 담지 못할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했다.
“집이 정말 크구나. 진 지주의 집과도 비교가 안 되게 넓어.”
“그러게요!”
노교아도 주위를 휘둘러보고는 옅은 한숨을 쉬더니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전에 가 봤던 가장 부유한 집은 마을의 진 지주의 집이었다. 그 집은 커다란 이진원식 저택이었는데, 하얀색으로 칠한 벽과 꽃문양이 조각된 기둥이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려면 두 개의 문을 지나가야 했다.
그때 그녀는 진 지주의 집이 장엄하고 정교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뿐 아니라 마을과 읍내 사람들도 모두 더없이 부러워하며 그야말로 선경仙境 같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지금 진서후부로 들어와 보니 자신들은 정말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다섯 걸음을 내디디면 정자가 보였고 열 걸음을 걸으면 누각이 보였다. 망루望樓들도 들쑥날쑥 자리하고 있고 여기저기 낭하의 구부러진 곳이 보였다. 또 곳곳에는 이름도 모를 기이한 화초들이 가득했고 커다란 호수도 있었다!
하얀색 벽에 검푸른 기와로 덮여 있는 건물들이 죽 늘어서 있었고,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걸친 여종들이 곳곳에 지나다녔다. 길을 오가면서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는 그 모습이 아주 즐거워 보였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노교아는 그들의 차림새를 보고 어느 가문의 소저나 귀부인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듣고 나서야 그들이 그저 하인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디 사람만 근사할까? 그녀가 지나온 곳만 봐도 할아버지와 살던 마을의 절반이나 되는 규모였다.
* * *
한편, 벽옥헌에서 나온 추길은 다시 주방으로 가더니 사람들을 시켜 노교아의 식사를 준비하게 했고 진귀한 음식들까지 직접 고르고 나서야 운연거로 향했다.
노교아의 등장으로 추길은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다.
노교아는 주운환과 살을 맞댔으니 당연히 집안으로 들여야 했다. 그런데 엽연채가 여태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니 주운환도 무어라 말하기가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노교아가 알아서 떡하니 나타났다. 게다가 그녀는 외롭고 처량하며 의지할 데도 없는 처지니 주운환은 당연히 그녀를 집안으로 들여야만 했다.
이제 물꼬가 트였으니 첩실을 몇 명 더 들이는 건 당연한 수순이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추길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운연거로 돌아갔다.
* * *
그 시각, 운연거.
소월 등은 낭하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새에게 모이를 주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노교아가 주운환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고 살을 맞댄 일이 있었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엽연채는 방에서 오늘 아침에 놓던 수를 마저 놓고 있었다. 혜연과 청유가 한쪽에 서서 보니 그녀는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유가 혜연을 끌어당겼다. 두 사람은 문밖으로 나가 해당화 나무 아래에 섰다.
“혜연 언니, 그 노교아라는 사람 말이죠, 딱 봐도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나리와 살을 맞대기까지 했는데 이곳을 자기 발로 찾아왔잖아요. 우리가 그 두 사람을 쫓아내야 돼요.”
청유의 말을 들은 혜연이 그녀를 쏘아봤다.
“어떻게 쫓아내니? 감정적으로 보든 논리적으로 보든, 노교아는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리고 그 사람이 나리를 구한 건 사실이잖아. 정말로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라고. 그런 사람이 곤경에 처해 있는데 그걸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건 배은망덕한 행동이야!”
청유는 할 말이 없어 그저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노교아가 주운환과 살을 맞댄 일이 없었다면 그 사내들도 주운환이 노교아를 첩실로 들어야 한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을 테고, 그럼 자신도 그녀를 문젯거리로 보지 않고 그녀를 존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일이 겹쳤고 게다가 노교아는 주운환을 곁에서 모시는 부하들에게 엽연채보다 더 많은 환심을 샀다. 청유는 그 점 때문에 노교아가 괘씸하다고 생각했다.
“추길 언니가 돌아왔어요.”
그때, 맞은편 낭하에 있던 매화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청유와 혜연이 고개를 들어 보니 과연 추길이 문안으로 들어와 본채를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혜연과 청유도 엽연채 곁으로 돌아갔다.
방 안으로 들어온 추길은 수를 놓고 있는 엽연채를 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들을 처소로 모시고 잘 안배하였습니다.”
그녀는 말하며 엽연채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숙인 채 한쪽에 섰다. 하지만 엽연채는 전혀 대꾸를 하지 않았다.
추길은 입술을 뗐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이야기를 꺼냈다.
“그 노교아라는 사람은… 딱 봐도 불순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마님께서 잘 대비하셔야 합니다. 노주를 불러오는 건 어떨까요?”
지금 노교아가 아주 세찬 기세로 밀고 들어오고 있고 또 소전을 포함한 호위병들의 호감을 얻었으니, 그녀가 주운환의 첩실이 되고자 한다면 그건 정말이지 누워서 떡 먹기였다.
엽연채는 노교아가 갑자기 들러붙은 것에 불만을 품고 있으니 당연히 그녀의 심복인 자신이 먼저 이낭의 자리를 차지하게 일을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감히 자신이 나리의 총애를 붙들어 주겠다는 말은 엽연채에게 할 수 없으니, 추길은 에둘러서 노주를 데려오자고 말한 것이다.
엽연채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지난번에 명절을 쇠고 나서 불러오자고 하지 않았느냐? 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냐?”
추길은 몸이 경직됐고, 몸 옆에 붙인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마음이 쓰리고 아팠으며 더없이 억울하고 속상했지만, 감히 여러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마치 활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칫 실수했다가는 모든 게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나리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때, 밖에서 소월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운환이 돌아왔다는 소리에 혜연과 청유는 얼른 구석으로 걸어가 그곳에 섰다.
자수품을 손에 들고 있던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힐끗 쳐다보니 주운환이 찬바람을 풍기며 지친 모습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담비의 털로 만든 검은색 소매 없는 외투를 입고 있었고 몸 위에는 눈송이가 묻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준미하고 청아하며 화려했다. 그리고 엽연채를 보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웠던 그 얼굴에 순간 환한 미소가 번졌다.
“부인.”
탑상에 앉아 있던 엽연채가 조그만 얼굴을 들어 올리자 하얗고 부드러운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한데 아리땁고 요염한 그녀의 두 눈은 예전만큼 반짝이지 않았다. 아니, 완전히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주운환은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자 당장이라도 다가가 그녀를 안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온몸에 찬바람과 눈이 묻어 있다는 걸 깨닫고는 발걸음을 딱 멈추더니 목 쪽으로 손을 뻗어 끈을 확 잡아당겼다.
추길은 상황을 보더니 얼른 앞으로 다가가 주운환이 외투를 벗는 걸 도와주려고 했다. 하지만 주운환은 이미 외투를 벗은 후였다.
그가 추길과 혜연 쪽으로 외투를 던지자 추길은 깜짝 놀라 얼른 외투를 받아 들었다. 그런 다음에 보니 주운환은 이미 엽연채 곁으로 걸어가 있었다.
주운환은 엽연채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부인.”
추길은 주운환이 들어오자마자 엽연채에게 애정 표현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질투심이 용솟음쳤다. 자신은 그저 외투나 들고 한쪽에 서 있는 처지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 같아서는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한편, 엽연채는 몸이 뻣뻣해졌고 눈꺼풀을 살짝 아래로 드리우며 말했다.
“부군, 부군의 생명의 은인인 노교아가 왔어요. 벽옥헌에서 쉬게 하였고요.”
주운환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무슨 일로 온 겁니까?”
“들어 보니 그 낭자가 뱀을 잡고 쫓아내는 비방 같은 걸 부군과 병사들에게 알려 줬는데, 어쩌다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면서 생계가 막막해졌다고 해요. 그런 데다 그 낭자와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이 나쁜 말을 퍼뜨려서 그 낭자와 조부가 더는 그 마을에 발을 붙이고 살 수가 없게 됐다고요.
그래서 도성으로 와서 친척에게 몸을 의탁하려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친척이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할 수 없이 길에서 눈을 피하던 중에 마침 소전 등이 지나가다가 두 사람을 봐서 집으로 데려왔고요. 제게 와서 어찌할지 물어보길래 일단 그 사람들을 벽옥헌으로 보냈어요.”
주운환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고는 의기소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엽연채를 끌어안고 이렇게 다독였다.
“부인,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저와 그 낭자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주운환은 수주에서 노교아가 저를 구하기 위해 서로 껴안고 있었던 그 장면을 엽연채에게 보였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때 다행히 정신을 차리고 바로 엽연채에게 해명해서 부부 사이의 의혹은 말끔히 해소됐었다.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어찌 됐든 간에 그 사람은 부군의 은인이잖아요. 설령 수주에서 계속 잘 지내고 있었어도 연말 선물을 보내면서 제대로 감사 표시는 해야 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가족과 함께 곤경에 처했다니까요.”
노교아가 주운환을 구한 건 어떻게 해도 지울 수 없는 사실이고 그녀는 정말로 생명의 은인이었다. 주운환을 구했고 주씨 가문 병사들도 구했는데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교활한 궤변 따위로 그녀의 공을 없애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 그 낭자는 어려움에 당면했고 또 이곳에 찾아와 도움을 청하고 있으니, 저희가 그 낭자를 도와줘야 합니다.”
“그럽시다.”
엽연채의 말에 주운환은 고갯짓으로 동조했다.
노교아에게는 주운환 하나뿐 아니라 그 부하들도 은혜를 입었다. 그런 은인이 곤경에 처한 모습을 보고도 도움을 주지 않거나 도리어 그녀를 집에서 내쫓는다면, 그건 군자가 보일 행동이 아닐 것이다. 그리 행동하면 어떻게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을 수 있겠는가?
“부인, 전 그저 그 낭자를 돕고 은혜만 갚을 겁니다. 다른 건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언짢아하지도 마십시오.”
그는 그리 말하며 그녀를 품속으로 더욱 꽉 그러안았다.
엽연채는 결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주운환은 자신이 이미 거듭 해명 했으니 그녀도 자신을 믿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엽연채는 도통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의원에게 물어보니 회임한 여인은 기분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지금 엽연채의 기분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또 정신력도 아주 약해지기 때문에 더욱 그녀를 아끼고 보호해 줘야 한다고도 당부했다.
“나리……!”
이때, 밖에서 갑자기 쿵쿵쿵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양이 황급히 걸어오더니 주렴을 사이에 두고 멈춰 섰다.
부부가 합방을 한 뒤로 여양과 여한은 그들이 지내는 본채로 들어오는 일이 매우 적었다. 어찌 됐든 간에 그들도 외간 사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여양이 사람을 통해 말을 전하지 않고 직접 이곳으로 온 것을 보아하니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