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9화
소전은 말문이 막혔다. 노교아가 이곳에 있는데도 무슨 일이냐고 묻는단 말인가? 그는 한 발 앞으로 나오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님, 벌써 잊으신 겁니까? 이 여인이 바로 노 낭자입니다! 지난번 수주에서 이 여인이 나리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나리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소전은 놀리는 듯한 얼굴로 빈정거렸다. 그의 말에선 어떠한 잘못도 집어낼 수 없었지만 가시가 박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더니 노교아를 쓱 훑어봤다. 노 낭자의 일은 이미 일단락 지어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본인이 직접 후부를 찾아온 것이다.
노교아의 수수한 얼굴에 당혹감이 어리더니 그녀는 노인을 끌어당기며 무릎을 꿇었다.
“부인을 뵈옵니다.”
엽연채는 냉담하게 ‘음’ 하고만 대답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네. 그런데 자네는… 무슨 일로 왔는가?”
소전은 노교아가 이렇게 무릎을 꿇었는데도 엽연채가 심드렁한 모습을 보이자 속으로 불만을 품었다.
노교아는 주운환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지난번에 자발적으로 그녀를 찾아가 고맙다는 인사를 안 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 노교아가 찾아왔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를 무릎 꿇리다니, 이게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남편을 구한 생명의 은인을 보면 바로 다가가 그 사람의 손을 잡고 고맙다고 인사하고 상석에 앉힌 다음 극진히 대접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교아는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추길은 노교아를 보고 있으니 안달이 나 미간을 찌푸렸다가 얼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낭자, 우리 마님께서 일어나라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어요. 우리 마님께서는 아주 부드럽고 상냥한 분이니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알겠어요. 부인, 감사합니다.”
이리 대답한 노교아는 옆에 있는 노인을 쳐다보더니 그를 부축하며 일어났다.
“노 낭자, 이곳은 어쩐 일로 찾아왔는가?”
엽연채가 냉담한 목소리로 묻자 노교아는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엽연채가 자신을 심문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미간에 슬며시 주름을 잡았고 자존심과 고집이 담긴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님, 오해이십니다. 저희는 진서후부를 찾아온 게 아닙니다.”
소전도 깜짝 놀라며 거의 동시에 외쳤다.
“마님, 오해이십니다!”
그는 더욱더 화가 났다. 지금 이게 무슨 말인가? 설마 노교아가 직접 진서후부를 찾아와 주운환에게 달라붙는다는 말인가? 어떻게 노교아를 그렇게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소전은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를 띠며 말을 보탰다.
“마님, 정말 오해이십니다. 이 여인은 나리를 찾아온 게 아닙니다. 친척에게 의탁하기 위해 도성으로 올라왔는데 그 친척을 만나지 못했답니다. 집으로 돌아갈 여비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길거리에 나앉게 된 거고요.”
“저런…….”
‘이렇게 가여울 데가!’
추길이 그녀를 동정하여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뜻밖에도 혜연이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낭자는 고향에서 의원이 아니었나요? 왜 갑자기 도성에 온 거예요?”
노교아는 미간을 찌푸렸고 소전이 그녀 대신 입을 열었다.
“낭자의 아버지가 마을 의원인 건 맞는데 이미 3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어. 그래서 집안에 낭자와 할아버지만 남게 됐고. 낭자도 의술을 익혔지만, 젊은 여인에게 진찰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거의 없으니 뱀을 잡아 그 쓸개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어.
그런데 지난번에… 이 낭자가 우리를 돕기 위해 어떻게 뱀을 유인하고 잡는지 비방을 알려 줬거든.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 산 아래에 한 촌민이 풀더미에서 쉬고 있다가 그 이야기를 들은 거야. 하필 시야가 가려져 우린 그 사람을 보지 못했고.
그자는 마을로 돌아가 비방을 모두한테 공개해 버렸대. 마을 사람들도 이 비방을 이용해 뱀을 잡기 시작하면서 이 낭자는 한순간에 생계 수단을 잃게 된 거지.
게다가 그 마을에 사는 한 파렴치한 놈이 이 낭자를 마음에 들어 해 여러 번 구혼을 했었는데 성사되지 못했어. 그런데 비방이 공개되자 그놈이 이 낭자에게 비방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숨겼다고, 이기적이라고 욕하고 다닌 거야. 또 어떤 사람은 이 낭자네 창문을 때려 부쉈다나.
낭자의 할아버지는 화가 나 몇 번이나 각혈을 하셨대. 그래서 할 수 없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도성에 있는 고모에게 의탁하러 온 거야. 그런데 막상 도성에 도착해 보니 낭자의 고모는 이미 이사를 간 후였지.
여비는 바닥나고 눈까지 내리니, 두 사람은 별수 없이 근처에 있는 주루 아래서 눈을 피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 주루의 주인이 마음씨 좋은 사람이라 주방 사람에게 이 낭자와 할아버지에게 만두를 좀 나눠 주라고 했대. 그때 마침 내가 형님 아우들과 함께 길을 지나다가 만두를 먹고 있는 낭자와 할아버지를 보게 된 거야.”
노교아는 할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살짝 물고 있었는데, 조그만 얼굴에는 굴욕적인 기색이 비쳤다.
“맞아!”
소전의 뒤에 있던 한 호위병이 탄식하며 말을 보탰다.
“그때 노 낭자를 봤을 때 우리 모두 깜짝 놀랐어. 처지가 이렇다니, 어디 말이나 되는 일이야! 어쨌든 간에 나리를 구한 생명의 은인이잖아.”
소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간절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 낭자와 할아버지를 데려오기로 일단 결정을 내린 거야. 마님, 저희를 꾸짖지는 않으시겠죠?”
혜연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어떻게 꾸짖을 수가 있겠는가?
엽연채는 차가운 눈빛을 보이며 냉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너희들은 무어를 어쩌고 싶은 것이냐?”
소전은 또다시 말문이 막혔고 너무도 화가 났다. 그의 뒤에 있는 호위병들도 미간을 째푸렸다. 노 낭자는 귀한 은인이니 엽연채 스스로 당장 그녀의 거취를 결정해 줘야 맞는 건데, 지금 이렇게 나 몰라라 나오는 건 정말 옹졸한 행동이었다.
보다 못한 소전이 다시 나섰다.
“마님, 이 낭자의 처지가 얼마나 가련합니까! 이 낭자와 일면식도 없는 주루 주인도 두 사람에게 만두 두 개를 베풀었는데, 이 낭자는 나리의 은인이고 저희 병사들도 구해 준 사람이니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이 낭자가 없었다면 저희는 이미 마 지부의 계략에 당했을 겁니다. 전부 그 산에서 죽었겠죠.
지금 이 낭자와 할아버지가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마님, 만약 나리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분명 이들을 거두셨을 겁니다. 일단 이곳에서 머무르게 하시죠.”
그러자 엽연채는 붉은 입술을 위로 올리며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렇게 하거라! 추길아, 저 여인과 그 조부를 벽옥헌碧玉軒으로 보내거라.”
말을 마친 엽연채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노교아를 쳐다보며 냉담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와 자네 조부는 이곳으로 오는 동안 분명 적잖이 고생을 했을 테니 우선 휴식부터 취하게.”
혜연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님께서는 지금 회임 중이시라 요 며칠 아주 피곤해하세요. 그러니 두 사람은 그곳에서 편한 대로 지내시면 됩니다.”
노교아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입술을 약간 오므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부인.”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고 혜연은 그녀를 부축하며 방으로 향했다.
소전은 엽연채가 노교아를 제대로 대접하지 않고 그녀를 대하는 태도 또한 친절하지 않은 데 화가 잔뜩 치밀었다.
지금 노교아는 의지할 데도 없고 집으로 돌아갈 수조차 없었다. 또 그녀는 주운환과 살을 맞댄 사람이자 그를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이곳으로 몸을 의탁하러 왔으니 엽연채는 마땅히 대범한 마음으로 노교아를 첩실로 들여야 했다.
또 엽연채는 회임 중이라 남편의 시중을 들 수도 없잖은가. 다른 집 부인들은 회임을 하게 되면 알아서 남편을 위해 첩실을 들였다. 남편은 아내의 체면을 살려 주기 위해 본인이 나서서 첩실을 요구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런데 엽연채는 첩실을 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편과 살을 맞댄 생명의 은인이 집을 찾아왔는데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부덕婦德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여인이었다.
소전은 속에서 짜증이 날 대로 났고 사내로서 도저히 이 모습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엽연채는 집안의 안주인이고 자신은 호위병에 불과하니 많은 이야기를 꺼내기는 곤란했다. 그저 속으로 주운환을 대신해 그녀가 하찮은 사람이라고 욕할 수밖에는.
“노 낭자, 날 따라와요.”
이때, 추길이 내려오더니 미소를 지으며 노교아에게 손짓을 했다.
“고마워요.”
노교아는 추길을 보더니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그녀를 따라갔고 소전 등도 그녀를 따라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추길은 그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고 돌더니 마침내 고아한 운치가 흐르는 한 처소에 도착했다. 추길은 예의를 차리며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냈고 또 어린 여종을 시켜 이불을 깔고 음식을 준비하게 했다. 그녀는 조금의 소홀함도 없이 세심하게 그들을 살폈다.
모든 것이 알맞게 갖춰지자 추길은 그제야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그러자 소전도 더 머물러 있기는 곤란해 노교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낭자, 난 이만 가 볼게요.”
노교아는 소전에게 예를 올렸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그녀는 검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고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소전은 얌전하고 소담스러운 그녀의 모습을 보다가 걱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의 표정을 읽고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낭자, 걱정 마요! 우리 나리는 전장에 나가 적을 무찌르는 분이지만 정말 선량한 분이에요.”
“전…….”
노교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소전 오라버니, 우린 여기서 의지할 곳이 전혀 없어요. 오라버니랑 알고 있는 게 전부예요.”
“하하. 염려되는 게 있거든 뭐든지 내게 말하면 돼요.”
소전은 가슴팍을 두드리며 장담했다.
지난번 동우산에서 주운환 등이 떠난 후 소전은 노교아를 마을로 데려다줬고, 그다음에도 소전이 노교아에게 답례 선물을 건넸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조금 친해졌다.
“전 일부러 이곳에 찾아온 게 아닌데… 부인께서 절 오해하신 것 같아요. 제가 은혜를 빌미로 보답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닐까요?”
노교아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그저… 지금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서 잠시 이곳에 머무르는 거예요.”
“무슨 그런 소리를 해요. 우리 나리는 사리에 밝은 분이니 낭자를 오해하지 않을 거예요.”
소전의 달래는 말에 노교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그에게 예를 올렸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걱정 마요. 이 일은 우리가 나리께 잘 말씀드릴 거예요.”
소전은 말을 마친 후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