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8화
엽연채가 이사를 나가고 주묘서도 시집을 가자 주묘화는 아무래도 적적했다.
주묘서는 마침내 소원을 성취해 황실에 시집을 갔다. 게다가 이제 태자비도 무너져 사람들 모두 주묘서가 황후가 될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치대로라면 진씨는 기쁜 마음에 주묘화에게 잘해 주며 좋은 혼처를 찾아봐 주는 게 맞는 건데 실상은 정반대였다.
진씨는 주묘화에게 확실히 어두운 얼굴보다 웃는 얼굴을 더 많이 보여 주기는 했으나 매번 그녀를 불러다 놓고 주묘서가 얼마나 수완이 좋은지 자랑이나 늘어놨다.
그러면서 서녀인 주묘화는 팔자를 암만 뜯어고친다고 해도 주묘서보다 복 있는 삶을 누릴 수 없을 거라고 비웃기까지 했다.
어디 이뿐인가. 진씨가 혼처를 찾아주지도 않아 주묘화는 이렇게 집에 처박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운환에게 꾸지람을 듣자 가슴이 뜨끔해진 주묘화는 할 수 없이 주학해나 데리고 담 모퉁이로 달려가 폭죽 막대에 불을 붙였다.
펑 하는 굉음과 함께 폭죽은 하늘을 향해 날아올라 공중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지면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불을 수놓았다.
“쯧, 터뜨리기 전에 미리 말도 안 해 주다니.”
주운환은 미간을 찡그리면서 두 손으로 엽연채의 귀를 막아 줬다. 그러나 이미 한발 늦은 터라 엽연채는 귀에선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머리가 흔들렸다.
주운환은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아예 그녀를 안아 들어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는 다시 그녀의 귀를 두 손으로 막아 주었다.
“이렇게 하면 시끄럽지 않을 겁니다.”
엽연채가 갸름한 얼굴을 살짝 들어 보니 하늘에선 불꽃들이 눈부시게 빛났고, 불빛이 번쩍이는 찰나에 함께 반짝이는 주운환의 눈빛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함과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에 엽연채는 가슴이 저릿해졌다. 그녀는 흑 소리를 내고는 몸을 돌려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그를 꽉 껴안았다.
“부군…….”
“음?”
주운환은 갑자기 그녀가 자신의 품으로 파고들자 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부인,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아가야,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내년에는 우리 가족끼리 불꽃놀이를 하죠. 분명 아주 흥겨울 겁니다.”
엽연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년에는 어디에 있을지 그녀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엽연채가 다시 고개를 돌려 보니 폭죽은 하늘을 향해 날아올라 단숨에 터지며 눈부신 빛을 보이다가 모습을 감추었다.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오르고 또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는 불꽃을 쳐다보고 있으니 그녀의 마음도 흩어져 사라지며 적막에 휩싸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두 부부는 궁명헌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이튿날 주 백야 등에게 새해 인사를 드린 후 바로 진서후부로 돌아왔다.
상전들이 집으로 돌아오자 집안 하인들이 함께 다가와 머리를 조아리고 절하며 새해 인사를 올렸다. 주운환은 또 주머니를 상으로 내렸는데, 안에는 지난번과 같은 액수가 들어 있어 하인들은 모두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주운환은 이번에는 기분이 그리 좋지 못했다. 어젯밤에는 분명 자신의 품으로 파고들었던 엽연채가 집으로 돌아오니 또 심드렁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 * *
새해 초이튿날, 엽연채와 주운환은 함께 엽연채의 친정에 갔고 그곳에서 점심 식사를 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계가 또 진서후부에 찾아와 주운환에게 태자, 노왕 등과 함께 밖에서 만나자는 말을 전달했다.
주운환이 외출하고 혼자가 된 엽연채는 바느질을 시작했다. 그녀 곁에는 혜연과 청유 등 꽤 많은 여종들이 머물고 있었다. 엽연채가 즐겁고 떠들썩한 분위기를 느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새해이니 그에 걸맞은 분위기가 느껴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곧 4개월이 되니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셔도 됩니다. 여기서는 태자부도 가까우니 그곳에 가서 주 측비에게 새해 인사를 하실 수도 있고요.”
추길의 말에 엽연채가 그녀를 쳐다보며 눈을 부라렸다.
“안 간다. 주 측비도 새해 인사를 하러 오지 않는데 내가 뭣 하러 간단 말이냐?”
추길은 표정이 굳어진 채 속으로 이렇게 반박했다.
‘주 측비는 곧 황후가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 체면은 좀 살려 줘야죠!’
엽연채는 1품의 봉호를 받았으니 지금 당장은 확실히 주묘서보다 신분이 높지만, 곧 주묘서가 황후가 되고 나면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는 처지 아닌가. 엽연채와 차기 황후의 관계가 좋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추길은 속으로 옅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엽연채와 주묘서의 관계가 아니라, 주묘서가 출가하면서 녹지와 춘산 외에도 그녀를 위해 태자의 총애를 붙들어 줄 어여쁜 여종들을 네 명 더 데려갔다는 것이었다.
추길이 알아보니 그중 두 명은 이미 잠자리 시중을 들었다고 했다.
전에 추길은 주묘서를 싫어했고 주묘서가 옹졸한 사람으로 컸다고 생각했는데,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나니 주묘서가 엽연채보다 대범하고 품위 있으며 도량이 더 넓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엽연채에게 주묘서는 어떻게 처신하는지 보여 주고 싶었다. 주묘서는 첩실임에도 정실인 엽연채보다 제대로 행동했다.
‘마님은 사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있는데 말이야!’
추길은 마음이 너무나도 초조해서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마님.”
이때, 소월이 찬바람을 풍기며 갑자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소전과 호위병들이 마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엽연채가 검은 눈썹을 찌푸리며 의아해했다.
“날 무슨 일로? 세뱃돈이 적어서 그러느냐?”
“그게 아니라…….”
소월은 주저하더니 이렇게 말을 이었다.
“중요한 일이 있어 꼭 마님을 봬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언뜻 보니… 그들 사이에 열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과 한 노인이 있었던 것 같아요. 차림을 보니 시골 사람들 같았습니다.”
엽연채와 혜연 등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시골 사람 같은 여인과 노인?’
엽연채는 그런 사람들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머리 회전이 아주 빠른 데다 그쪽 일에 온 신경을 쓰고 있던 추길은 갑자기 두 눈을 번쩍였다.
“분명 무슨 중요한 일이 있을 겁니다. 어쨌든 나리께서 가장 신임하고 아끼는 호위병들 아닙니까. 집에 있을 때는 나리의 지시를 받고 타지에선 나리와 함께 전장에서 싸웠죠. 그들이 일이 있어 마님을 뵈려고 하는데 마님은 딱히 할 일이 있으신 것도 아닌데 보지 않으셔서야 되겠나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지 한번 보시지요.”
혜연과 청유는 동시에 인상을 썼다. 추길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몹시 귀에 거슬렸다. 주운환과 생사를 넘나든 사람들이 뵙기를 청하는데 엽연채는 할 일이 없으면서도 그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으니까.
이는 엽연채가 주운환의 사람을 난처하게 하고 그들 앞에서 거드름을 피운다는 의미였다.
혜연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추길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만나 보지 않으면 확실히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보일 것이다.
엽연채는 냉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보자꾸나. 할 말이라는 게 뭔지 한번 들어나 봐야겠구나.”
그녀의 투명한 두 눈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
엽연채는 잡고 있던 운금 자수틀을 수람 위로 던지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발 먼저 밖으로 뛰어나간 소월은 소전 등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혜연은 몸이 무거워진 엽연채를 배려해 매화와 백수에게 진홍색 금수錦繡 방석을 깔아놓은 검은 의자를 문 입구에 놓으라고 지시했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어 보니 소전, 평해 등 스무 명 정도가 한 소녀와 노인을 빼곡히 둘러싸고 걸어오고 있었다.
열여섯에서 열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그 소녀는 조금 하얗게 바랠 정도로 깨끗이 세탁한 하늘색 긴 웃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같은 색깔의 두건을 쓰고 있었다.
고운 두 볼 옆으로 땋은 머리를 늘어뜨린 그녀는 다소곳한 느낌을 주는 얼굴과 커다란 두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눈에는 두려움과 무력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미간에는 농촌 여아들 특유의 억척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보아하니 수수하면서도 고집이 있는 농촌 여인이었다. 놀랄 정도로 아름답지는 않아도 단정하고 말쑥한 느낌이라 쉽게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환갑이 다 되어 가는 노인을 부축하고 있었다. 노인은 호호백발에 거친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진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밭에 나가 고된 노동을 하는 촌부로 보였고 걸을 때 절뚝거리는 걸 보니 절름발이가 분명했다.
혜연은 이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더니 조그만 얼굴이 잔뜩 경직됐다.
이 농촌 여인이 누구인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바로 엽연채가 얼마 전에 만났던 수주의 노교아였다. 주운환과 여한의 목숨을 구해 주고 주씨 가문 병사들에게 힘을 보태 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사람을 알아본 혜연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노교아가 주운환을 구해 줬을 때 그의 옷을 벗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었다. 당시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살이 맞닿게 되었다.
하지만 주운환은 소전을 통해 돈으로 사례를 했을 뿐이었다. 그에 혜연은 주운환이 노교아와 관계를 끊었다고 생각해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는데, 뜻밖에도 노교아가 지금 도성으로 올라온 것이다.
소전 등은 노교아와 노인을 빼곡히 에워싼 채 정원으로 걸어와 그곳에 멈춰 섰다.
노교아의 커다란 두 눈에는 당황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있었지만 저도 모르게 주위의 낯선 환경을 슬쩍 둘러봤다.
‘이곳이 말로만 듣던 후부란 말인가? 고관과 귀인들이 사는 곳?’
한편, 소전과 호위병들은 혜연을 비롯한 여종들이 의자를 가져오는 모습을 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나와서 사람 좀 만나는 것뿐인데 의자까지 옮겨 올 필요가 있단 말인가?’
소전이 하하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마님께서 드디어 저희를 보러 오셨네요.”
그 말에 혜연은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니?”
소전이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적이는데, 붉은색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 바로 엽연채였다. 그녀는 아래에 있는 소전 등을 힐끗 쳐다보더니 마지막으로 노교아의 얼굴에 시선을 향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빛이 한층 더 차갑게 변했다.
“마님.”
소전은 배시시 웃으며 호위병들과 함께 예를 올렸다.
한편, 노교아는 엽연채를 힐끗 훔쳐보더니 놀라 맹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지난번 수주에서는 말로만 듣던 후 부인이 눈만 좀 예쁠 뿐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엽연채의 미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곱고 아름답게 생긴 사람이었다니.’
“그래.”
엽연채는 냉담하게 대답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이냐?”